좋은 말씀/신우인목사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로마서 1:1~7)

새벽지기1 2017. 11. 23. 14:16

예수님 당시 세계의 중심은 로마였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유일한 백성인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오기를 간절히 고대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메시야가 오시기만 하면 로마를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고,
짓밟힌 자존심은 회복되고 불행은 끝나고, 메시야와 더불어 자신들은 세상에서 왕 노릇
하리라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셨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의 말 한 마디로 병자들은 낫고, 손길만 스쳐도 눈먼 자와 앉은뱅이들이 회복되고,
죽은 사람마저 살아났습니다.
귀신이 줄행랑치는 것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사람들은 놀라고 또 열광했습니다.
드디어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메시야가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15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백성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 하자 예수님께서 그 자리를 피하셨습니다.
왜 피하셨을까요?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일까요?
아직 예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메시야이십니다.
그런데도 세상의 왕이 되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때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열광하였습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니
정말로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자신들은 예수님과 왕 노릇하게 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행 1:6)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니라.”(행 1:7)
그리고는 하늘로 승천해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데도, 제자들이 기대하는 것과는 다른,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가 전 세계를 지배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교회는 모든 나라와 백성들 위에 존재했고, 황제들은 교황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그렇게 되면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그렇게 세워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역사가들과 세상 사람들을 그 때를 인류 역사상 가장 암울했던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았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역사상 가장 참담한 암흑기였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이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가톨릭이 물러나고 개신교가 역사 전면에 등장하였습니다.
왜곡된 신앙을 정립하고 명실공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개신교의 생각은 어떨까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집착했고 가톨릭이 실제로 세웠다고 믿었던 그 하나님 나라를 개신교가 이어받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왕 노릇하게 되는 것은 이스라엘이나 가톨릭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믿는 우리 개신교도들이라고 현재까지 외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믿고 있는 유일한 존재인 개신교도들의 기도와 노력을 가상히 여기시고,
아픈 몸을 빨리 고쳐주시고, 모자라는 돈을 넉넉히 채워주시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물리쳐주시고 윗자리에 빨리 나를 앉혀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는 세상 사람들이나 타종교인의 형통에 기막혀하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의 존재마저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윗자리에 오르기라도 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셨다고 은근히 목에 힘을 주며,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세력 확장과 제 몫 챙기기에 몰두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한다는 것이 과연 그런 것일까요?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단순한 편지가 아닙니다.
로마서는 변화의 능력이 있는 책입니다.

로마서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었고,
그 중에는 어거스틴과 마르틴 루터와 존 웨슬리와 칼 바르트가 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와 교회가 방향을 잃고 타락해 갈 때, 그 방향을 하나님께로 돌렸던 위대한 사람들입니다.

교회사의 유명한 어거스틴.
젊은 나이에 이미 명성을 얻은 그는, 그러나 연상의 거리의 여자와 사생아까지 낳고,
번민과 방탕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어머니 모니카의 속을 무던히 태우던 어느 날, 어거스틴
역시 비참한 심정으로 정원을 거닐 때 꿈결처럼 들려오는 노래 소리가 있었습니다.
“톨레 레게, 톨레 레게”.
“집어 들고 읽어라.”는 뜻입니다.
어거스틴은 홀린 듯 성경책을 펴 읽었습니다.
그가 읽은 구절은 로마서 13:13-14 말씀.
“낮에와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
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말씀 앞에서 고꾸라진 그는 회심하여 기독교 역사상 가장 탁월한 신학자로 복음을
바로 잡고 교회의 갈 길을 제시하였습니다.

타락한 가톨릭 교회에서 고민하던 비텐베르크 시골 작은 성당의 마르틴 루터 신부는
로마서 1:17 말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말씀 붙잡고 온 세상을 지배하던 가톨릭 교회에 반기를 들고 종교개혁의 횃불을 밝힙니다.

감리교 창시자 요한 웨슬리는 루터의 로마서 서론을 읽다가 마음이 뜨거워져 회심을 체험합니다.
칼 바르트는 33세에 ‘로마서 강해’를 써서 잠자는 유럽을 깨웠고, 세계 양차 대전으로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신뢰를 한꺼번에 잃고 방황하던 기독교를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린 20세기 가장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저도, 돈이 다 떨어져 가장 싼 학교를
찾아 발을 들여놓은 노스케롤라이나의 한 침례교 신학교 강의실에서 로마서 강해를 들으며,
혼동과 어두움이 물러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Paul, the servant of Jesus Christ.....”
미국인 교수는 ‘종’이란 무엇이며,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를 별 특별한 내용이랄 것도 없이 설명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교수의 설명은, 잡다한 공부와 도탄에 빠진 삶으로 인해 뒤죽박죽된 제 머리에
시원한 물방울처럼 떨어지기 시작했고, 더불어 전율을 느꼈습니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평생을 해야 할 일을 보았습니다.
남침례교도들의 별명은 “Bible Lover”입니다.
신학적으로는 전혀 내세울 것 없는 그들은 험난한 세월을 성경 한 권 붙잡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켜냈습니다.
“목사로서 사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만들다 가자.”
그 이후로,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를 원하는가를 생각해 왔습니다.

로마서는,
그 누구든 그 말씀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그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듭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 자신이 그랬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철저한 유대교 신봉자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스스로를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부르며, 그 일에 선봉에 섰습니다.

그런데
예수란 사람이 와서는 유대교의 율법을 무너뜨렸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도 그랬습니다.
이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그는 예수쟁이들을 잡으러 예루살렘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그것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날도 그랬습니다.
박해를 피해 다메섹까지 도망친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러 가는 중, 정오 때쯤이었습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엄청나게 강한 빛이 임하였습니다.
눈을 뜰 수도, 서 있을 수도 없었습니다.
땅에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바울은 그 소리에 놀라 떨며 되물었습니다.
“주여 뉘시오니이까?”
그러자 하늘에서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그렇게 해서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완전히 다른 존재,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 바울은 스스로를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종은 헬라어로 ‘둘로스’(doulos), ‘노예’라는 뜻입니다.

존 맥아더(John MacArther)는 그의 책 “슬레이브”에서 ‘둘로스’에 대한 번역상의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둘로스를 servant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slave가 옳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둘로스란 단어가 124회 나오지만, 대부분 servant로 번역했습니다.

servant와 slave.
종과 노예는, 우리들에게는 비슷한 개념일수 있지만, 서구 사람들에게는 확연히 구분됩니다.

해방 이후 좀 산다는 집에는 ‘식모’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함께 살면서 집안일을 도맡아하는 여자입니다.
하는 일은 조선시대 노비와 같고 몸 고생, 마음 고생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식모는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습니다.
식모가 servant라면 노비는 slave입니다.
servant는 누구를 위해 할 것인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선택할 자유가 있지만,
slave는 그 어떤 자유도 자치권도 권리도 없습니다.
servant는 사람으로서 고용된 존재라면, slave는 물건으로서 소유된 존재입니다.

노예는,
자신의 목숨을 주인에게 맡겨버리고, 주인의 명령이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힘들다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만 둘 수도 없습니다.
자신을 예수의 종으로 소개한 바울은 노예처럼 자신의 목숨을 예수 그리스도께 맡기고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명령을 무조건 따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도 바울이나 우리들이 예수님의 노예로 만들려고 하시는 것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쩌지 못하는 도탄에 빠졌습니다.
허기와 비통함에 정신을 차린 아들이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군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7-19)

여기서 품군이라고 번역된 것이 바로 ‘둘로스’, 즉 노예입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노예이기를 자청한 둘째 아들을 아들로 맞아주셨습니다.
그 사랑에 감격한 아들은 이제부터 노예의 심정으로 살아갑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자세는, 자녀이면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고 노예의
자세로 아버지께 절대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니라.”(롬 1:6)

‘예수 그리스도의 것’.
노예는 주인의 소유이듯이,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둘째 아들의 심정으로 예수님의 소유를 자청하였고,
또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도 또한 우리들도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노예는, 그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습니다.
열심히 예수님의 뜻을 행하여 장차 예수님과 왕 노릇할 것을 절대로 바라지 않습니다.
주면 먹고, 안 주면 굶고, 죽이면 죽겠다는 것이 노예의 태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둘로스(노예)로 소개한 바울의 심정이고,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입니다.

노예의 심정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 바울을,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를 의미합니다.
본래 이 단어는 황제나 왕으로부터 특수한 임무를 띠고 파견된 사람을 말합니다.
오늘날의 “대사”입니다.
대사는 왕의 전권을 가지고 왕 대신 일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예수님의 노예가 된 사도 바울을 예수님은 전권 대사로 임명하셨다는 뜻입니다.

로마서는,
로마 황제가 친히 통치하는 로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예수님의 칙서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로마 황제는 단순한 통치자가 아닙니다.
살아있는 神입니다.
황제를 신으로 숭배하였고,
골수 로마시민들은 스스로를 ‘가이사의 사람들(Kaisarianoi)’이라고 불렀습니다.
‘가이사의 소유’라는 뜻으로, 그렇게 불리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무소불위의 힘으로 최고의 번영을 이룩한 로마 제국,
영광의 도시 로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그 내용이 유대인들과 가톨릭과 오늘날 많은 개신교도들이 오해하고 있는 그런 류의
하나님 나라를 세우겠다는 것일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황제에서 하나님으로, 억압자가 핍박자로, 강자가 약자로, 부자가 빈자로
바뀌고, 개념은 똑같은 그런 나라가 아닙니다.

진정한 메시야, 구원자로서 예수님은, ‘가이사의 소유’에서 ‘그리스도의 것’으로의
완전한 전환을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통해 제시하십니다.
로마서는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와 통치 방식과 그 세계로 부름을 받은, 전혀 새로운
존재들에 대한 변증서입니다.

여전히 하나님의 힘을 빌어 또 다른 ‘가이사의 소유’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예수님을
가이사로, 자신은 이중 첩자로 전락시키는 사악하고 어리석은 짓입니다.

19세기를 살았던 존 뉴톤은 열한 살 때부터 바다에서 일했습니다.
영국 배의 선장이었던 아버지 덕분에 그는 어려서부터 왕실 해군이 되는 훈련을 받았지만,
자유분방한 그는 권위에 반항하고 범죄행위도 멋대로 하였습니다.
20대 초반에 아프리카로 갔다가
수지맞는 노예무역에 가담하게 되었고, 노예무역선 그레이하운드 호의 선장이 되었습니다.

존은 도덕을 비웃고 기독교를 조롱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대서양 한복판에서 엄청난 폭풍을 만났습니다.
존이 깨어보니 선장실에는 이미 물이 가득하였습니다.
배의 한쪽 옆구리가 파손되어 침몰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선원들을 독려하여 물을 퍼냈습니다.
아홉 시간 사투를 벌였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갑판에 지친 몸을 던지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더 이상 우리 힘으로는 어쩔 수 없습니다. 주여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구할 염치도, 가치도 없이 제멋대로 인생을 살았던 존 뉴튼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와 그레이하운드 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날 밤 그 사건은 존 뉴튼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영국으로 돌아와 모든 방탕과 무절제를 청산하고, 노예무역도 완전히 손을 떼었습니다.
그리고 설교가가 되어 50년 동안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또한 많은 찬송시를 지었는데 그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은 찬송가 405 장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노예 무역을 하던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충실한 노예가 되었습니다.

생애 말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기억력은 거의 사라졌어. 하지만 두 가지 사실만은 기억하고 있지.
나는 큰 죄인이며 예수님은 크신 구원자라는 사실.”
이것 말고 우리가 더 기억해야 할 사실이 또 뭐가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나 존 뉴턴이나 장차 왕 노릇을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최대 보상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행입니다.
지고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자신보다 사랑하사 구원하셨고, 자신을 사랑의 대상으로
우리들에게 내어주심에 감격할 뿐입니다.

우리는 그저 예수님의 노예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갈 뿐, 우리가 해야 할 말은 오직
“우리는 무익한 종(노예)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눅 17:10)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노예)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마 25: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