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역사하는 힘이 큰 의인의 간구 (야고보서 5:13~18)

새벽지기1 2017. 11. 22. 07:04


성경은 참 이상한 책입니다.
사람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냥 지나치고,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시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의 신비가 있습니다.

모세 당시 이집트의 파라오는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당시 초강대국 이집트의 지존인 파라오의 결정은 이집트 백성뿐만 아니라 주변에 산재한
많은 나라들의 운명과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좌지우지 하였습니다.
그에 비해 아기를 받는 산파는 그 숫자도 많을 뿐만 아니라 전혀 중요하지 않은 존재입니다.
산파가 없으면 시어머니가 아기를 받으면 됩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 왕이 히브리 산파 십브라라 하는 사람과 부아라 하는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출 1:15-16)

학자들은 그런 명령을 내린 이집트 파라오가 누구인지 연구했지만 명확히 밝히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한 노예의 아기를 받아내는 노예 출신의 산파, 지고한 파라오의 명령을 거역하고

더욱 지고하신 여호와의 명을 목숨 걸고 따른 산파의 이름을 십브라와 부아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십브라와 부아가 여호와 하나님의 ‘아신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권세를 누린 사람들은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싸잡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 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마 7:23)고 하셨습니다.

그 많던 바리새인들 중에 유일하게 이름을 남긴 사람은 ‘니고데모’ 한 사람입니다.
니고데모만이 예수님께서 ‘아신 자’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엘리야를 예로 듭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약 5:17)

엘리야 당시 아합 왕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때보다 나쁜 때는 없었습니다.
바보 아합 왕과 그를 조종하는 왕비 이세벨 때문입니다.
이세벨은 최악의 여자로 여호와 하나님을 폐하고 바알 숭배를 이스라엘의 국교로 삼았고,
그에 따라 백성들도 풍요의 신 바알을 정성을 다해 섬겼습니다.
통탄한 엘리야는 목숨을 걸고 갈멜산에서 홀로 바알 제사장 사백오십 인과 아세라 제사장
사백 인에 맞서 싸웠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과, 그들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백성들을 향하여 외쳤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이에 대하여 성경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니라.”(왕상 18:21)

아합과 이세벨과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던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땅에 가뭄이 들게 하였습니다.
의인 엘리야의 기도는 자연마저 움직이는 힘이 있었고, 정말 역사하는 힘이 컸습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누구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특별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도 그 점에 대해서 분명히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성정이 같다는 것은 뭔가 남다른 점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승리를 거둔 엘리야도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12절 말씀대로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였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읽고 어떤 위협과 어려움도 무릅쓰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마음이 합한 사람’입니다.

자, 그런데 의인이 누구인가 알아보기 전에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14절 이하 말씀을 주목해 봅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그를 일으키시리라.”(약 5:14-15)

여기서 말하는 교회 장로란,
오늘날의 목사와 장로들로서 당시에는 그에 대한 구별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몸이 아픕니다. 그렇다면 장로를 찾으라는 것입니다.
장로는 그 환자에게 기름을 바르고 기도합니다.
그러면 병이 낫는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신봉한 나머지 의사를 찾지 않고 목사나 장로를 찾는 사람들이 요즈음에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장로를 통한 치유 규정을 정해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특정 사람과 특정 행위에 특별한 능력이 있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없습니다.
이런 류의 개념은 올바른 기독교에서는 절대로 성립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은사를 주십니다.
은사란, 은혜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은사를 주시는 목적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12:4-7)

목사, 장로, 집사, 선교사 등등의 서로 다른 직분이 있습니다.
병 고치는 은사, 가르치는 은사, 방언의 은사 등등 서로 다른 은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직분들과 은사들을 말하면서 성령은 같고, 주는 같고, 하나님은 같다는
말을 강조하고 있음을 유의해야 합니다.
직분과 은사의 원천과 주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직분과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특정인을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하게’ 하려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좀 더 명확히 말합니다.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고전 12:25)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우리들은 그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 지체들에게 다양한 기능과 직책을 주신 이유는 ‘서로 같이 돌보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계급이 없습니다.
오직 한 분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다양한 직책과 기능을 가지고 서로 돕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존재할 뿐입니다.
물론, 그 직책에 따르는 권한이 다르겠지만, 그 역시 더 많은 일을 하라는 것이지,

결코 군림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은사와 직책을 설명한 뒤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

최고의 은사는 사도의 은사로서 12명 외에는 없습니다.
또한 아픈 사람들이 많은 요즈음 최고의 은사는, 손만 얹으면 병이 척척 낫는 치유의 은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것, 가장 큰 은사, 가장 좋은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은사에 대한 설명 다음 전개되는 것은 바로 고린도 전서 13장, 그 유명한 ‘사랑장’입니다.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꽹과리가 되고,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최고의 은사, 최고의 직책은 바로 ‘사랑의 은사’이며 사랑을 베푸는 직책입니다.

당시에는 의사가 귀했고, 의학이 발달하지 못했습니다.
아프면 대부분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연히 병자들을 불쌍히 여겨 고쳐주셨고, 승천하신 후 그리스도인들에게 병 고치는
은사를 포함하여 여러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서로 돌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어떤 직책이나 은사도, 지위와 권한이 아니라, 책임과 사랑을 의미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는 구절에서,

"역사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네르구메네(energoumene)’는 수동태입니다.
수동태는 주체(주어)가 따로 있습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힘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특정 사람이나 기도 자체에 능력이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의인이 되어서 특별 능력을 받고 그 사람이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 기도 자체가 주문처럼 영험이 있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능력의 원천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의인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그 기도를 들어주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전구가 있습니다.
아무리 비싸고 성능이 우수한 전구라 할지라도 전원에 연결시켜야 빛이 들어옵니다.
또한 전원에 연결시키는 전선이 있어야 합니다.
전구는 기도이고 전선은 사람이라고 하면 전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전선은 짧을수록 좋습니다.
잇고 또 이어서 전선이 길어지면 불빛은 약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슨 신기한 전선이라도 되는 양 목사나 신령하다는 사람을 찾아 기도를
받는데, 요즈음 상태가 좋은 목사가 희귀합니다.
목사를 통해서 전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려는 사람들은 아예 불을 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나마 전구도 깨져버리기 십상입니다.

자신이 직접 전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 가장 효율적입니다.
직접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십시오.
너무 복잡하게 얽혀서 회로를 만든 종교 지도자들이나 바리새인조차도 모르는 전선을 가장
간단하게 만들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곧 ‘의인’이고,

그 의인이 직접 하나님과 연결될 때 가장 밝은 빛을 얻습니다.
아기는 엄마와 직접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기가 울면 엄마는 만사를 제쳐두고 달려갑니다.

레너드 스윗이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듣는 것보다 하나님께 직접 말씀드리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 직접 아뢰십시오.

그런데 왜 장로를 찾으라 하셨냐 하면, 장로는 교회의 어른으로서 바른 길을 가르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함께 기도하며, 서로를 위하여 중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형제들이 서로 진정으로 위하여 기도하며 도울 때 부모는 기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곧 의인이며, 가장 좋은 은사를 행하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 역사하는 힘이 큽니다.

‘할라카’와 ‘아가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할라카는 율법을, 아가다는 율법의 의미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법(할라카)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법을 주신 뜻(아가다)을 모른 채 열심히 지킨다면, 아무 소용이 없고 오히려 해가 됩니다.

기도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할라카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접속이며 대화입니다.
아가다입니다.
그런데 기도 자체가 무슨 효험이 있다고 생각하여 백일기도보다 천일기도가 능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면 아가다가 왜곡되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목사와 장로로 세우셨습니다.
할라카입니다.
그 직분으로 사람들을 살리고 도우라는 것입니다.
아가다입니다.
그런데 직분을 계급으로 생각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합니다.
아가다가 왜곡되고, 오히려 그 직책은 해가 됩니다.

의인은,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뜻(아가다)을 잘 받들고 정해주신 법(할라카)을
즐거이 지키는 사람입니다.

폴 투르니에는 ‘가치(의미) 있는 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나의 작고 개인적인 모험(일)이 하나님의 거대한 모험(일)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내가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대한 모험의 일부분을 체험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일이다.”

미모, 재능, 돈, 권력 자체가 가치(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조화를
이루며 일부분이 될 때만 가치(의미)가 창출됩니다.

아브라함 헤셀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무리 작고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면

나는 세계를 선한 방향으로 조금 움직인 것이다.”
반대로 아무리 굉장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또한 그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역행하였다면 그는 세계를 악한 방향으로 움직인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은 작고 연약하고 미미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합할 때,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때, 나는 결코 작은 존재가 아닙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소수의 사람이 담당해야 할 과제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쟈크 마리탱이 소수의 사람이 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과 그 영을 위해 참 진리를 증거하는 일이며,

소수의 사람의 진리에 대한 신뢰는 마치 핵분열과 같이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다.”

독재 정권에 속절없이 당하며 살던 튀니지의 과일 노점상을 하던 한 20대 청년의 분기가
중동지역의 민주화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하여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일에 내 힘을 보태는 사람이 의인입니다.
당연히 의인의 간구는 그 역사하는 힘이 클 수밖에 없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합니다.
그리하여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합니다.

내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의 일이기를, 그리하여 다 형통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