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위로부터 난 지혜 (야고보서 3:1~6)

새벽지기1 2017. 11. 15. 06:56

오늘 본문은 좀 이상한 말로 시작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선생이 되지 말라니, 이 무슨 소리인가요?
착한 학생으로서 고분고분 조용조용 살라는 것일까요,

아니면 자신들만 선생 노릇을 하겠다는 것일까요?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만약 선생이 되지 말라는 이 말씀을 하나님의 규칙으로 생각한다면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실제로 이 말씀을 목사나 특정 사람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뜻으로 악용하는 사례도 대단히 많습니다.

말을 할 때에는 정황이 있게 마련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이런 말을 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사회는 엄격한 폐쇄적인 계급사회로 한 번 타고난 신분은 대대로 이어지며 좀처럼 바뀌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 사회에서 신분에 구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분야가 있었는데, 바로 교육 분야입니다.
당시의 교육은 주로 종교 교육입니다.

당시로 돌아가 봅시다.
안식일에 회당에 사람들이 모입니다. 두루마리로 된 성경을 펼쳐서 읽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 그 구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자신의 깨달음이나 생각, 그 구절을 통해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들을 간증합니다.
(대천덕 신부가 세운 예수원에 가면 매일 저녁 이런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수이신 예수도, 어부였던 베드로나 요한, 텐트 제작자 사도 바울도 각지에
세워진 회당에서 자유롭게 말씀을 전할 수 있었고,
또한 명성을 얻은 사람들은 유명 순회전도자가 되어 부와 명예를 얻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가 이 말을 할 당시는 신흥 종교였던 기독교가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던 때였습니다.
오랫동안 별 변화가 없었던 당시로써 최대 사건이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며 각종 종교에 대해서 너그러웠던 로마마저 기독교를 경계의 대상으로 주목할
정도로 그 기세가 대단했습니다.
물론 복음 전도의 순수한 뜻으로 애를 쓴 사람들도 많았지만,
이 기회를 편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났습니다.

저마다 선생을 자처하며 가르치려 들었고,
신학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았음으로 엉터리 가르침이나 괴변들이 범람하였고,
거기에 서로 세력을 잡으려는 여러 집단 간의 비방이나 싸움으로 인하여 그 폐해는 자못 심각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가 그런 말을 한 것입니다.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의 진정한 뜻은, ‘무턱대고 높아지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높아지면 그에 따르는 책임도 많아지므로 그것을 잘 감당할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잘 준비하여 올바르고 좋은 선생이 되셔야 합니다.

이어서 야고보 사도는 입조심 말조심을 당부합니다.
자, 그런데 입조심 말조심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요?

입조심 하라고 하니 열심히 조심합니다.
그러다가 끝까지 참는 사람들은 속으로 골병이 듭니다.
참지 못하는 사람들은 끝내는 폭발하여 몇 배로 퍼부어 버립니다.
조심하고 참는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계율로 바뀔 때, 기독교는 무거운 종교적 짐이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하나님의 계율 준수를 독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에 담긴 깊은 의미를 깨닫고 행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를 누리고 또한 베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두 종류의 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적인 지혜’와 ‘위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세상적인 지혜는 ‘그 마음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것’(약 3:16)이며,
반면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과 화평과 관용과 양순과 긍휼 등, 선한 열매가 가득한 것’(약 3:17)입니다.

답은 나왔습니다.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얻으면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입조심 말조심하게 되고 그 외에도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위로부터 오는 지혜는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요?

예,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고 그분을 따르면 됩니다.
그런데 너무 막연합니다.
흔히 하는 일은 예배, 기도, 전도, 봉사, 헌금 등,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알고, 그렇게 열심히 하면 복 받고 천국 가는 줄 알고 그렇게 행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담합니다.
생각은 점점 틀 속에 갇히고 금기 사항은 점점 많아지고 허점은 점점 고착됩니다.
한편 세상으로부터의 지탄을,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것들의 일’로 일축하고 등을 돌려 버립니다.
그래서 본문 말씀대로 ‘세상을 향한 독한 시기와 다툼’이 증폭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하나님을 잘 믿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세상적이요 마귀적인 것’(약 3:15)이라고 못을 박고 있습니다.

저는 또 예수님을 따르고 닮아야 한다고 늘 강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과 그분의 본질을 모른 채 행한다면 또 다른 부작용을 낳습니다.
불의에 항거하는 폭력적 투쟁과 분노와 억울함 등이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민주화나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 동안 투쟁해 온 분들을 만나 이야기하다 보면, 모두는
아니지만, 그 사람들의 마음이 그다지 편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인도를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킨 마하트마 간디, 마더 테레사, 넬슨 만델라 등의 자서전을 읽어보면,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려 시기와 다툼 분노 억울함 등은 몰아내고 화평과
관용과 양순과 긍휼로 채워 가는 것을 봅니다.
모두 예수님으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마하트마 간디, 마더 테레사, 넬슨 만델라, 너무나 거창한 인물들입니까?
요즈음 노숙자와 빈민들을 돕고 있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우리들처럼 보통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오래 하면 할수록 그분들의 태도와 표정에는 양순과 긍휼과 관용이 자연스레 묻어나옵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일을 10년, 20년씩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들은 그 열악한 상황에서 그 절망적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도와주면서,
그런 마음의 상태를 유지 할 수 있을까요?
존경스러웠습니다.

스위스 내과 의사이자 정신의학자로서,
기독교와 심리학을 통합하는 데 크게 기여한 폴 투르니에가 쓴 ‘강자와 약자’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폴 투르니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에는 강자와 약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비난 허세 흥분 폭력성 등은 강자들의 전유물이고, 억울함, 수치심, 강박관념, 굽신거림 등은
약자들의 전형적인 반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약하디 약한 존재입니다.
누구나 죄에 빠져 있고, 패배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여 있습니다.
단지 이러한 똑같은 문제를 강한 반응과 약한 반응이라는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뿐입니다.”

여러분들은 강자입니까, 약자입니까?
저마다의 답이 있을 것입니다.
또 상황에 따라 그 답이 달라집니다.
강자 앞에서는 약자가 되고, 약자들 앞에서는 강자가 되기도 합니다.

성경에는 두 여인이 하나님께 올리는 송가가 있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눅 1:52-53)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고 난 다음 부른 노래입니다.

“용사의 활은 꺾이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유족하던 자들은 양식을 위하여 품을 팔고 주리던 자들은 다시 주리지 않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삼상 2:4-8)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부른 하나님을 향한 송가입니다.

즉, 약자를 강자로 만드시고 강자를 약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나는 약자였습니다.
그런 내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강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제 강자가 된 나는 약자가 되어야 합니다.
과연 이 송가는 하나님의 ‘뺑뺑이 놀이’를 말하자는 것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누구나 강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하고, 때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열심히 종교생활에 매진하는 이유도, 그렇게 하면 강자가 된다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려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 2-3)
세상을 들여다 보면 정말 그렇습니다.
열심히 구하고 노력하여 설령 강자가 되었다고 해도 영원한 강자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강자가 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약자로 살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상한 말을 하였습니다.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고후 12:9)

사도 바울은 강자 중의 강자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 가장 탁월한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180도 달라집니다.
그동안 최강자가 되기 위해 열심을 다해 갖췄던 스펙들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열심히 은폐하였던 자신의 약점들을 자랑한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후 12:9-10)

그동안 한국 교회는 이 말씀의 뜻을, 나의 약함을 자랑하면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의 능력이
내게 임하여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 강자가 된다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정말 잘못 가르친 것입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물 위를 걷고 폭풍을 잠잠케 하고 죽은 것을 살리고 산 것을 죽이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한
능력을 예수님은 물론 가지셨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단 한 번도 사용치 않으셨습니다.
모두다 돕고 살리는 데 사용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남들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까지도 감내하는 능력입니다.

사도 바울이 왜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당했습니까?
강자가 되고 유명해지기 위해서 당한 것이 아닙니다.
우매한 사람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기꺼이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예수님을 따르다가 당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약자들의 아픔에만 관심을 두십니다.
강자들을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자들의 횡포와 교만과 이기심을 싫어하십니다.
힘과 권력과 부를 싫어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의 이득만 챙기는 것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엎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가장 중요한 개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으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원래부터 강자입니다.
부잣집 도련님은 태어날 때부터 강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강자가 되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놀고먹으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책임과 사명을 수행하라는 것입니다.

밤새 내리던 눈.
살며시 그친 아침.
세상은 온통 하얀 도화지.

두 눈을 크게 뜨고
사립문을 열면
누가 먼저 지나갔나.

이 고운 눈길
한발 두발 걸어가는
눈 위의 그림.

이 아름다운 시는, 서울 숭인동에 있는 서울 어머니 학교 샛별반 최미자 할머니가 서툰 글씨를
연필로 꼭꼭 눌러쓴 시입니다.
최미자 할머니는 2년 전만 해도 한글을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서울 어머니 학교에 다니며 최창우 선생님으로부터 한글을 배워 70년의 한을 풀었습니다.

올해 56살의, 마른 체구에 아이처럼 맑은 눈동자를 가진 최창우 선생님도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렵게 어렵게, 대학 공부까지 하였습니다.
모두다 여기저기서 만난 야학 선생님들의 헌신과 수고 덕분입니다.
그래서 최 선생님은 야학에 대한 마음의 빚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먹고 사는데 바빠 그 빚을 갚지 못하다가 어느 날 전봇대에 붙어있는 어머니 야학 모집 광고를 았습니다.
그 길로 그 야학을 찾아갔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야학 선생 생활이
세월이 흘러 대표가 되고, 셀 수 없이 많은 할머니들의 까막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글을 모르면 일상생활을 하는 데 상상을 초월할 만큼 어려움을 겪는다고 합니다.
한글은 쉬워서 일주일이면 깨우칠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글씨를 익히고 읽고 자신의 생각을 쓸 수 있기까지는 2~3년은 족히 걸린다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을 짧은 글이라도 써 놓고는 모두다 눈물을 흘립니다.

강자가 되려는 마음 자체를 버립시다.
강자나 약자의 개념을 버립시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우리들은 모두 도토리들입니다.
도토리 키재기를 멈춥시다.
시기와 다툼과 요란과 모든 악한 일들이 자연히 사라집니다.

강자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살리기 위해서 열심히 합시다.
이것이 바로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이 지혜를 받은 사람들이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의의 열매를 백 배로 거두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