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믿음을 온전케 하는 것 (야고보서 2:14~22)

새벽지기1 2017. 11. 12. 07:03


“이날은 주의 심판이 행하여지는 대재난의 시작이라.

 너희는 각자의 마지막 날을 준비하라.”

지난 10일 새벽 4시, 35살의 이 아무개 씨는
자신의 인터넷 카페에 ‘천명하였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리고,
다음 날 낮 11시 코엑스 몰의 한 대형 서점가에 불을 지르고, 이어서 인근 현대 백화점 무역
센터점에서 한 여자를 인질로 잡고 인질극을 벌이다가 체포되었습니다.
이씨는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나는 하늘의 뜻을 따라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고 소리쳤습니다.

중동 지역에서는 자신의 몸에 폭탄을 두르고 자폭하는 무슬림 테러범들에 의한 폭발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습니다.

1987년 북한 공작원 김현희는 대한항공 여객기에 시한폭탄을 장착한 아브다비 공항에서 내렸습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이룩한 여객기는
인도양 아다만 해역 상공에서 공중 폭파되고 115명의 무고한 승객들이 산화되어 버렸습니다.

위의 세 사건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세계종교 협의회는
북한의 공산주의를, 정치 이념이 아니라, ‘김일성 종교’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슬림들은 거룩한 전쟁에서 순교할 경우 천국으로 직통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세 사건은 본질상 같은 행동들입니다.
모두 다, 자신의 안위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믿고 있는 바를 목숨을 걸고 행하는 것들입니다.

예로부터 유명한 포항 풍어제를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여 도시 축제로 치르는데, 그때마다
곤혹도 함께 치릅니다.
포항의 보수적인 교회 목사들이 모여 대대적으로 반대 데모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 쓴 피켓을 들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대로를 오가며 확성기로
전도하는 사람들, 명동 한복판에서 온종일 찬송을 부르는 사람, 어깨띠를 두르고 전도지를
나눠주는 사람들, 가가호호 방문하며 전도하는 사람들, 골 세리머니로 기도하는 축구선수들,
이런 모습들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위에 열거한 일들은 모두 배운 대로, 또 믿고 있는 바를 열심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중에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몇 가지나 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지적은 그저 말로 그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 가면 입만 가득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기독교가 가장 많은 활동을 합니다.
예배도, 전도도, 기도도, 헌금도.
각종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독교만큼 열심히 하는 종교도 없습니다.
교인들도 열심히 참여합니다.
모두 행함이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말을 듣는 것일까요?
딱 한 가지를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신자 교육 첫 시간에 늘 하는 말입니다.

“교회에는 이런 사람들이 항상 있습니다.
기도를 굉장히 열심히 하는 사람인데, 내가 기도를 잘 하지 않아서 할 말은 없지만 그 사람이
이상하게 싫습니다.
봉사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봉사를 하지 않아 할 말은 없지만 그 사람이 이상하게 싫습니다.
성경에 대해서는 또르르 꿰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성경을 잘 읽지 않아서 할 말은 없지만 그 사람이 이상하게 싫습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믿음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뭔가 힘이 잔뜩 들어가 있고, 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어떤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하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무식하다면 존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이 알아야 합니다.
많이 알고 마음이 따뜻하긴 한데,
약속도 지키지 않고 게을러 터졌다면, 그 사람을 신뢰하거나 존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는 것도 많고, 마음도 따뜻해서 남의 처지를 잘 이해하며, 또 알고 느낀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을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이 말을 간단하게 정리하면, 지정의(知情意)가 모두 발달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인격’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온 우주의 비밀을 다 알고 계시는 창조주이십니다.
우리 인간은 물론 온 우주의 모든 생명을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랑을 말로만 그치신 분이 아닙니다.
살아생전에는 머리 둘 곳도 챙기시지 않으셨으면서도,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감내하시면서
그 사랑을 이루셨습니다.
최고의 인격자는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29)

예수님께서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능력에 대해서 언급하거나 과시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성품에 대해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에 대한 수많은 명칭들이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무소부재하신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 여호와 이레, 여호와 닛시,
여호와 샬롬, 여호와 라파, 숨어 계시는 하나님, 질투하시는 하나님, 고난 받는 종으로
오신 하나님 등등.
이러한 명칭들은 하나님의 실존과 성품과 경륜들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명칭들은 믿음의 선배들이 고난과 역경 가운데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온몸으로 체험한 너무나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심코 읽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아브라함이 백 세 때 얻은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는 사건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잘 아는 사건입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번제는 태워서 바치는 제사입니다.
그런데 번제 장소는 삼 일을 걸어가야 하는 모리아 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갑니다.
삼 일 밤낮을 걸으며 아브라함은 오로지 한 가지 생각만 하였을 것입니다.
“여호와냐, 이삭이냐?”

그동안 살아오며 체험한 하나님의 은혜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을 것입니다.
수많은 갈등과 번민의 시간을 뒤로 하고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 오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이삭을 결박하고 장작더미에 눕히고 칼을 들어 찌르려는 순간, 하늘에서 급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그때 아브라함과 이삭은 ‘여호와 이레’를 체험합니다.
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건을 기록한 이유는, 아브라함처럼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으며, 또한 우리 모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보다 무병장수 부귀영화를 더 사랑하면서도 ‘아브라함 흉내’를 내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으려고 합니다.
목사는 교인들로 하여금 ‘아브라함 흉내’를 내라고, 그러면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된다고 독려합니다.
그런데 목사에게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게 만드는 것보다는 여러 다른 목적들이 있습니다.

시골 땅값이 오르자 수많은 효자 효부들이 생깁니다.
오히려 더 나빠집니다.
‘아브라함 흉내 내기’나 ‘가짜 효자’나 별로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소개하시면서, 자신을 배우라고 권유하시는 뜻은,
우리더러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께 반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도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해지라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만 하나님의 샬롬,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의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이 말씀은 섬기러 오신 예수님께 반응하여 우리들도 힘을 얻으려는 몸부림과 힘자랑을 멈추고
그 힘으로 섬기는 일에 돌입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칠십 인을 선발하여 귀신축출과 병 고치는 능력을 주시며 동네로 보내셨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만나 능력을 행하니 귀신들이 혼비백산 달아나고 병자들이 벌떡벌떡 일어났습니다.
신이 난 칠십 인이 예수님께 외쳤습니다.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7)
그러자 예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뭐나 된 양 착각하지 말고, 능력 받았다고 힘자랑하지 말고, 하나님 사랑의 봉사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 일에 신경을 쓰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무료급식소들을 찾아다녔습니다.
끼니조차 못 잇는 가난한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배식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또 책임자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분들은 하나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이분들을 작은 예수로 섬기지 못하면 이 일은 계속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대단한 일을 하는 양 비장한 사람들은 며칠 못 가 그 사람들을 욕하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믿음은 그 정도였고 온전해지지 못하고, 오늘 본문 말씀대로 죽어 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년째 그 일을 하고 있는 그분의 표정이 그렇게 밝고 편안할 수 없었습니다.

‘구제’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당연히 담당해야 하는 가장 큰 책임 중 하나입니다.
즉 교회의 사명 중 가장 큰 몫을 차지합니다.

모세 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행해야 할 일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교 행위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대한 구제의 내용이 대부분입니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난 다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땅을 공평하게 분배하였는데,
아들과 딸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빈부의 차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분배받은 땅을 팔고 남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사람들도 생깁니다.
그러나 7년째가 되면 모든 부채가 탕감되는 면제년이 됩니다.
하지만 부채를 탕감해 주어도 가난한 사람들은 여전히 생깁니다.
그러다가 50년째 되는 해에는 원래 조상들이 분배받았던 땅을 되돌려 받게 됩니다.
그가 누구이든 어떤 일을 했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대희년”입니다.
‘더없이 큰 기쁨의 해’라는 뜻입니다.
사랑과 공평으로 세워진 기쁨의 나라가 곧 하나님 나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떠난 베드로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고개를 떨구고 더듬거리며 대답합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
한 번 더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성경은 당시를 이렇게 서술합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베드로가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받자 근심하였습니다.
근심이란 속이 편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짜증이라도 난 것일까?
그런데 거기에는 깊고 깊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느냐는 질문에서 ‘아가페’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아가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베드로는 ‘필레오’로 답합니다.
필레오, 흠이 많고 부족하고 변덕스러운 인간의 사랑을 말합니다.
베드로는 감히 아가페 사랑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예수님께 어떻게 했는지 잘 아시지 않느냐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이 예수님을 배반하고 저주하였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 번째 질문에서 베드로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누더기 같은 자신의 ‘필레오’ 사랑으로라도 사랑하는 것일까?
베드로는 그렇다는 대답 외에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요 21:17)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흠 많고 연약하고 어리석은 사랑이지만,
그 사랑으로 예수님 대신에 불쌍한 양들을 먹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끝입니다.
또한 우리들의 할 일입니다.
우리더러 예수님 대신 길 잃은 양들을 인도하고 보살피고 먹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행함’이란, 다름 아닌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입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을 살게 하는 행함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한다고 목에 힘을 줘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행하지 않을 때 내 믿음은 점점 죽어갑니다.
그 일을 기쁘게 행할 때 믿음은 점점 온전케 되어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납니다.

한 집사님이 매달 장애우들이 모여 사는 집에 쌀과 부식을 가져다 주는데, 겨울에 난방비가
없어 동상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회의를 열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의 저금통을 깨고 또 절약한 돈을 모아서 가족이 함께 가져다주었습니다.
자녀들이 무엇을 느꼈을까요?
분명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보람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교훈을 얻었을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믿음이 보다 더 온전케 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영혼과 배가 너무 고파서, 또한 제대로 살고 싶어서 예수님께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나 살아났습니다.

오늘도 영혼이 고픈 사람, 배가 고픈 사람들이 천지에 깔려 있습니다.
우리 이렇게 합시다.
“저 교회로 가면 산다.”
예수님께로 달려갔듯이, 우리 교회로 오면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 주기로 합시다.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느니라.”(약 2:23)

교회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몸이며, 우리들은 온유하고 겸손한 작은 목자들입니다.
뭐 좀 한다고 비장해지지 맙시다.
이런 일을 기쁨으로 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열심히 동참합시다.

혹시 압니까?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벗이라는 황송한 칭호를 얻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