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최고의 법 (야고보서 2:1~9)

새벽지기1 2017. 11. 10. 06:24


세계 인구 20억 이상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고,
5초에 한 명, 하루에 1만 8천 명의 어린이가 가난과 기아 때문에 죽습니다.
우리 주변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쪽방 동네 사람들이나 아프리카 난민들의 영상이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 어떤 느낌,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들은 왜 그토록 가난한 것일까요?
게을러서?
국가의 잘못된 정책 때문에?
아니면 하나님을 제대로 올바로 섬기지 못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을 가다가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입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그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요 9:1-2)

저의 질문이나 제자들의 질문이나 본질상 같은 질문입니다.

노력이 부족했건 운이 없었건 뭔가 부족하기 때문에,
또 누군가 잘못했기 때문에 가난과 질병과 불행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부분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모든 원인을 포괄하는 답은 없습니다.
또한 여러 답 중에 가장 틀린 것은,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해서’라는 답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그런 질문을 한 이유도 당시나 지금이나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해서 벌을
받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마치 액운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굿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대단히 잘못된 답입니다.

꽤 오래 목회를 하면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그 원인을 분석합니다.
물론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원인만 분석하다가 끝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저 그 문제와 씨름하다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문제가 족쇄가 되어버리고 그 사람은 지쳐갑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문제에도 답을 갖고 계십니다.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답은 이렇습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요 9:3)

자, 이러한 예수님의 답에 대하여 몇몇 사람들은 들고 일어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시려고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들어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러실 리가 있겠습니까?

해럴드 쿠시너는 유대교 랍비입니다.
그에게는 아론이라는 총명한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론이 원인을 알 수 없는 조로증이라는 병에 걸려 14살의 어린 나이로 죽었습니다.
너무나 참담한 심정으로 하나님과 독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쓴 책이 “선한 사람들에게 왜 불행이 오는가?”라는 책입니다.
그가 훌륭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끝내지 않고, 더 깊은 은혜와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 하나님의 마음과 우리들이 해야 할 일들의 영역을 넓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무엇일까요?

두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입니다.
불행을 당한 사람과 그 불행한 사람을 대하는 사람들의 차원에서의 일입니다.
그런데 불행에서 예외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두 차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먼저 불행의 당사자가 되었을 때 해야 할 일입니다.
좋은 예가 2부 성가대 지휘자 김선영 선생입니다.

김선영 선생을 처음 만난 때는, 몇 년 전인가, 귀국독창회에서였습니다.
‘주기도문’을 앙코르곡으로 불렀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많은 성악가들이 부른, 수없이 들었던 그 노래가 감동을 준 것은,
그 노래 안에 김선영 선생의 고뇌와 그 고뇌를 이긴 깊은 신앙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바를 대충 정리해서 말씀드립니다.
전북 고부인가, 농사를 짓는 집안에서 태어나 5학년 때인가 시력을 잃었고,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장학금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포함하여 그 어려움은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시력을 잃었으므로 기도는 일상입니다.
그러나 간단없이 찾아오는 절망감은 기도로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손끝으로 읽는 점자 성경.
그 손끝에서 점점 살아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김 선생과 마주 앉아 조용조용 인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이후 예수님과 더불어 살아났습니다.
손끝에서 살아나시는 예수님을 생각할 때 전율을 느꼈습니다.

김선영 선생을 영입하기 위해 애를 많이 썼습니다.
김선영 선생은 시력이 없어 누구보다도 훌륭한 ‘소리 선생’임을 알았고, 무엇보다도 그의
살아있는 영이 다른 사람들에게 감화를 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 선생은 성가대 지휘자를 넘어 다른 사람들의 영적 멘토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가야 할 길은 멀고 험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계속 드러내야 하겠지만, 그는 그 길을
앞장서서 가고 있습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 불행을 당한 사람들 모두 그래야 합니다.
어려움과 불행의 원인을 분석하고 원망하고 절망하고 그 불행의 책임을 떠넘기느라 시간을
보낼 것이 아니라, 그 어려움과 불행을 하나님의 처사로 겸손히 받아들이고, 어렵고 힘들지만
그 불행을 통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야 합니다.

C.S.루이스는 ‘고난은 나를 깨우는 하나님의 확성기’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깨어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나갈 때,

그의 삶은 누구보다도 존귀한 것이 되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는 것, 그런데 이것은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들이 더욱 열심히
해야 할 일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설명이 전혀 필요 없는 너무나 평범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부자를 우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뭐 이런 간단한 이야기를 그렇게 길고 어렵게 푸냐고 반문 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만,
하나님은 그저 교회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대하라는 규칙을 제정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근본을 묻고 계십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우리의 중심을 보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약 2:1)

이 말씀을 뒤집으면 이렇게 됩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며, 믿음의 형제라고도 할 수 없다.”
특히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하였습니다.
즉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의 영광에 참예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대하는 교회가 많을까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니요, 희귀하다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한 신문 칼럼에서 본 내용인데, 어떤 목사가 이렇게 푸념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늘었는데, 맨 백수들이야.”
요즈음 너무나 어려워 그래도 교회에서 위로받고 용기를 얻기 위해 찾았는데,
목사가 보기에는 ‘돈 안 되는 백수들’만 모인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에서 가난한 교인들이 담임목사 만나는 것이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다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큰 교회도 아니고, 또 저를 만난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다행이지만, 이런 것들이 오늘날 교회에서 생기는 어처구니없는 세태들입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 힘 있는 사람을 우대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하대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믿는다는 것을 ‘거듭난다’고 말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그 근본 가치관과 인생관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내 인생관이 예수님의 가치관으로 전환하였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우대받고, 힘 있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해야 합니다.

25살에 건국대 미대 교수가 된 화가 엄정순 씨는 교수직을 버리고 청주맹아학교로 가서 시각
장애인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습니다.
부친이 청주에서 병원을 운영하셨는데 맹아학교 학생들이 아파서 병원에 오면 아무리
환자들이 많아도 언제나 일순위로 치료를 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묻자 부친은 “저 아이들은 너 대신 맹인이 되고, 너 대신 아픈 거란다.”라고
대답하셨다고 합니다.

15년째 시각장애인 학생들을 가르치는 동안, 그의 평생 화두였던 “본다.”는 것을 깨달아갔고,
비례하여 그의 그림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는 이런 말을 합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약 2:9)

‘최고의 법’은 헬라어로 ‘노몬 바실리콘’으로, ‘바실류스’ 곧 ‘황제’라는 뜻이며,
이는 황제의 칙령을 의미합니다.
로마 황제가 일단 정하면 누구도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법이 됩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누구도
변경할 수 없는 ‘최고의 법’입니다.

한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마 19:16)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십계명을 잘 지키는 신실한 청년이었습니다.
그 청년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 19:21)
그런데 그 청년은 부자였고, 또한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그는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중에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보통 고민이 아닙니다.

데이비드 플랫 목사가 미국 앨러배머 주 버밍엄에 위치한 브룩힐즈 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그에게 붙은 꼬리표는 “최연소 대형교회 담임목사”였습니다.
그 명칭이 너무나 부담스러웠습니다.
예수님과 독대한 데이비드 목사는, 오늘날 주님의 교회가 ‘성공신화’라는 노련하고
매혹적인 여인의 유혹에 놀아나고 있음을 뼈아프게 절감하였습니다.
그리고 결단합니다, 성공신화를 버리기로.
자신도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욕심을 완전히 버리고, 교인들에게도 예수님을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지 않기로, 자신부터 예수님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도들을 가르치고 교회를 운영하였습니다.
성도들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하더니 놀라운 일들을 해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쓴 책이 ‘래디컬’입니다.

제프는 승승장구하는 잘나가는 비즈니스맨입니다.
온두라스 여행에서 충격적인 경험을 합니다.
산처럼 쌓인 쓰레기 더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물으셨습니다.
“내가 준 리더십과 재산들을 이들을 위해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
제프는 그 질문에 대답하고 이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는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애드와 패티 부부는 70대로 은퇴 생활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넉넉한 재산과 연금, 그러다가 데이비드 목사의 설교를 듣고 즐거운 은퇴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리고 재난 지역으로 가서 자원 봉사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홍수를 당한 루이지애나 주.
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보람찬 시간이었습니다.
점점 지역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나이지리아도 다녀왔습니다.
스리랑카 반군 지역에 가서 무상 급식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애드가 이런 말을 합니다.
“이보다 신나는 은퇴 생활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소유를 다 팔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휴, 다행입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기로 합시다.

가장 먼저 성공신화를 버립시다.
가난한 사람들은 나 대신 가난해졌으며, 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작은 예수님’으로 봅시다.
사치나 낭비를 절대로 하지 말기,
필요치 않는 것은 사지 말기,
절약한 돈으로 구제하기를 생활화 합시다.
우리 교회도,
흉내 내기가 아니라 본격적으로 조직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살리는 일에 돌입합시다.

엊그제 한 청각장애인 집사님으로부터 진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낮아지면 사랑은 저절로 나옵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힘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낮아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로 합시다.

오 하나님, 우리는 굶주림을 없애달라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올바로 사용하기만 하면, 이 세상 전체가 먹을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자원을 당신께서
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 하나님, 우리는 편견을 뿌리 뽑아달라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제대로 사용하기만 하면, 모든 사람에게서 선을 볼 수 있는 눈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 하나님, 우리는 절망을 없애달라고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바르게 사용하기만 하면, 빈곤을 몰아내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힘을 당신께 우리에게 주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학자 잭 리머가 쓴 기도문의 일부입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케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약 2:5)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이것이 우리들의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당연히 이웃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