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시험을 만나거든 (야고보서 1:1~8)

새벽지기1 2017. 11. 4. 07:08


영어로 시(詩)는 poem입니다.
바로 헬라어 poiema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나이였어.
시(詩)가 나를 찾아왔지.

몰라. 그게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어.

아냐.
그건 목소리가 아니었고
말도 아니었고
침묵도 아니었어.

하여간 어떤 길에서 나를 부르더군.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쓴 ‘시(詩)’라는 제목의 시입니다.

칠레의 소년 파블로 네루다는 어느 날 문득 자신을 찾아온 시를 만납니다.
자신을 깨우는 시의 손을 잡습니다.
그리고는 평생 시와 동행합니다.
그는 시를 쓰고, 시는 다시 파블로 네루다를 창조합니다.
그렇게 쓴 시는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과 위로와 기쁨을 주며 또 다른 시인들을 창조합니다.
그만큼 깊어지고 아름다워진 세상은 그에게 감사하며 노벨 문학상을 수여합니다.

이탈리아의 한 작은 섬에 마리오 로뽈로라는 청년이 살고 있습니다.
주민 모두가 어부인 그 마을에서, 굼뜨고 병약한 마리오를, 남들도 자신도, 가장 무능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오늘도 어제같이 살아가던 그 섬마을에, 어느 날 세상의 관심이 집중됩니다.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파블로 네루다가 칠레 군사독재 정권을 피해, 그 섬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네루다가 그 섬에 도착한 날,
섬사람들은 태어난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과 카메라를 보았습니다.
최고로 멋을 낸 마을 이장이 나가 네루다와 그의 아내를 정중히 맞이하였습니다.
사람들과 기자들이 떠난 뒤에도 섬사람들의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흥분한 사람은 우체국 국장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팬들이 보내는 네루다의 우편물이 폭주하였기 때문입니다.
‘나 홀로 우체국’인지라 우편배달부가 가장 시급했습니다.
마리오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유는 두 가지, 마리오에게는 자전거가 있었고, 글을 읽을 줄 아는 몇 안 되는 섬사람들 중 하나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우편물이 섬 언덕에 위치한 네루다네 집에 배달되는 것이기에 사실 글을 읽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하여간 네루다와 마리오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네루다는 우편물을 전해주는 마리오에게 언제나 동전 하나를 팁으로 주었습니다.
동네로 내려오면 사람들이 마리오 주변에 모여 네루다의 근황을 물었고, 팁으로 준 동전을 돌려가며 구경하였습니다.
가끔 네루다는 마리오에게 마실 것을 주어 그곳에서 머무는 시간이 조금 길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마리오가 네루다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질문하였습니다.
“은유가 뭐예요?”
이것이 그의 첫 질문입니다.
그 질문에 네루다가 무심히 다시 질문하였습니다.
“하늘이 운다는 것이 무슨 뜻이지?”
“비기 온다는 뜻이에요.”
“그게 바로 은유야.”
그게 그날 대화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오에게 특별한 습관이 하나 생겼습니다.
뭐든지 은유로 바꿔보는 습관입니다.

어느 날인가, 마리오가 네루다의 심기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질문하였습니다.
“시는 어떻게 써요?”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질문입니다.
네루다가 대답합니다.
“해변을 따라 걸으며 주변을 느껴봐. 그럼 시를 쓸 수 있어.”

그 섬에서 가장 무능한 청년 마리오는 그렇게 시인으로 변해갔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에 반응하며 존재합니다.
내가 그 자극에 올바로 잘 반응하면 나는 성장하며,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면 쇠퇴합니다.

사람들에게 가장 큰 복은 좋은 집안에서 잘생기고 똑똑하게 태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로또에 당첨되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대단한 것이 주어진다고 해도, 잘못 반응하면 오히려 큰 화가 됩니다.

압살롬은 다윗 왕의 아들입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뛰어난 외모에, 게다가 총명하고 뛰어난 지략을 가졌습니다.
백성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한 몸에 받아 아버지 다윗을 폐위시키고 왕위까지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잠시 잠깐,
그의 죽음은 성경에 기록된 죽음 중 가장 우스꽝스럽고 가장 비참합니다.
가장 뽐내던 긴 머리카락이 상수리나무에 걸리고 달리던 나귀는 달아나고,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는 추격하던 요압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가장 큰 복은 무엇일까요?
나보다 더 깊고 큰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큰 인물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얼마든지 나를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진리와 사랑으로 나를 자라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나를 온통 살리는 일에,
내 생명을 더욱 풍성케 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남을 이용해 먹지 않는 자존자이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고,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모든 사람들이 다 변화되고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가장 빈번하게 만난 사람은, 가족들과 마을 사람들과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나사렛을 찾아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마을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고,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길게 사설 늘어놓지 말고

가버나움에서 행했다는 그 기적이나 한번 보여 주거라.”(눅 4:22-23)
마음이 답답하신 예수님께서 비유로 책망의 말씀을 전하자,
고향 사람들은 분기탱천하여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끌고 가서 밀쳐내려고 하였습니다.

한편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고수하느라 예수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따르던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6)

예수님으로부터 뭔가 얻으려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따라다녔지만 아무 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복신앙은 정말 나쁜 것입니다.
무당을 따라다니면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며 오히려 엉뚱한 일에 생명과 돈을 탕진하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무당 좇듯 한 것입니다.

체포된 예수님이 헤롯 왕에게 보내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헤롯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로라.”(눅 23:8)

헤롯 왕은 예수님께 여러 가지를 물었으나 예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흔히 하고 듣는 말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면 세상이 왜 이 모양이냐고”,
“하나님이 정말 존재한다면 왜 내가 원하는 일이 이뤄지지 않느냐고”

자, 이런 것은,
나는 어리석고 미성숙한 채 남아 있으면서 하나님께서 움직이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바보 같은 내 자신에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불의한 세상이나 어리석은 내 자신에게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셨다면

이미 세상과 나는 끝나버렸을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끊임없이 기회를 주시며 내가 변화되고 잘라나기를 참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부터 야고보서를 상고하려고 합니다.

야고보서를 쓴 사람은 누구일까?

야고보는 생소한 이름이 아닙니다.
‘야곱’에서 따온 것입니다.
이 이름은 중동지방에서는 요즈음에도 흔히 쓰는 이름입니다.
영어식으로 하면 ‘제이콥’입니다.
신약성경에 야고보라는 이름을 가진 네 사람이 등장합니다.

먼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열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인데 가장 먼저 순교를 당합니다.(행 12:2)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이 역시 열두 제자들 중 한 사람인데 그저 이름만 언급됩니다.(마 10;3)
사도 유다의 아버지 야고보 역시 사도 유다와 관련하여 언급될 뿐입니다.(눅 6:16)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승천하신 후,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초대 교회 발전을 위해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네로 황제 박해 때 순교를 당하고 육신의 형님 예수님 곁으로 돌아갑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커온 동생으로부터 존경받는 형이 되기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존경은커녕 사이가 나쁘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더군다나 자기 형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정신병원에 집어넣거나 혀를 끌끌 차며 돌아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자신의 형 예수님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었고, 그 부탁한 일을 누구보다
훌륭히 수행하고 기꺼이 순교를 당했다는 사실은, 정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입니다.
오늘 설교 버전으로 바꾸면, 야고보는 형 예수님께 올바로 반응하였고,
목수의 아들이 전혀 새로운 존재, 누구보다 훌륭한 생명의 리더로 재창조되었습니다.

야고보는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기의 형을 ‘주’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형의 종으로 자처하고 있습니다.
형님이 부탁하신 일을 기꺼이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기쁘시겠으며 하나님 아버지는 또 얼마나 뿌듯하시겠습니까?
또한 확실한 정체성으로 어떤 환난도 굴하지 않는 야고보 자신은 또 얼마나 당당하겠습니까?

곁길로 잠깐 빠지겠습니다.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하여 그 후손이 남아 있다는 둥의 이야기가 여전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다면 동생 야고보가 어찌 형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 주라고 부르겠으며, 종으로 자처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히 청년 여러분.
이런저런 사념과 회의를 멈추고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의 가르침에 올바로 반응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하면 어떤 처지에서도 살아납니다.
보람 있고 행복한 인생을 삽니다.
사람들을 여럿 살립니다.

누가 그랬습니다.
“나는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안 부럽다.”
떵떵거리고 살라고, 또 그럭저럭 스스로를 위안하며 살라고 이 아름다운 지구에 그 귀중한
생명과 시간을 주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그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나를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을 반드시 찾아야 합니다.

저는 야고보서를 좋아합니다.
실천적인 신앙, 움직이는 신앙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 시대에 어린 시절부터 예수님을 속속들이
알았던 야고보 사도를 통해 예수님의 마음과 그 가르침을 보다 더 깊이, 더욱 생생하게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편지입니다.
편지는 수신자가 있습니다.
그 수신자들은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들”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첫 박해가 일어나고 기독교인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습니다.
멀리 터키까지 간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신앙을 지키며 성실하게 살며 전도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점점 불어났습니다.
그러자 타종교에 관대하였던 로마까지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신앙이 흔들리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 배교자들마저 생겼습니다.
그 상황에서 야고보는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 신앙의 지조를 지킬 것을 당부하는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이 편지에서 야고보는 엄청난 말을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자,
교회 생활을 오랫동안 한 사람들은 시험을 만나면 기쁘게 여기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말에 아무런 감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상투적으로 들릴 때 스스로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별다른 의미나 감흥이 없을 때, 이미 불행은 시작된 것입니다.

미국을 생각해 봅시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옮겨갔습니다.
메이플라워호를 탔던 102명의 사람들 중 44명이 기아와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모두다 사랑하는 가족들입니다.
그들이 한 발자국 움직일 때마다 모든 것이 시험과 시련이었습니다.
그때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이 말씀은 그들에게 그 어떤 말씀보다
큰 지침이 되었고, 미국 건국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만약 이 말씀이 미국에 아직까지 살아있다면 온 세계는 이런 혼란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언제나 살아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야고보서를 쓸 당시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아와 질병과 위험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 사도로부터 편지가 도착하였고,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누군가가 일어나 그 편지를 읽습니다.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분명 예상치 못한 큰 충격이 온 회중에게 덮쳤을 것입니다.
온갖 시험에 마음은 사정없이 흔들리고 깊은 회의에 심신은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습니다.
시험은 너무나 두려워 한사코 피하려고만 하였고 하나님까지 원망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시험이 찾아오면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온전히’ 기뻐하라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은 그동안 단 한 번도 해 보지 못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시험을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지침을 가르쳐 주고 있는 중입니다.

편지가 이어집니다.
“이는 너희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렇긴 합니다.
지금까지 이를 악물고 어렵게 해 온 것이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소나마 위안이 됩니다.

편지가 계속 이어집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그 말을 들으며,
끝까지 참고 인내하면 하나님께서 곧 구원해 주신다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4)

이 말씀에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구원의 핵심을 찌르는 소중한 말씀입니다.

내가 어려움 가운데 있습니다.
참고 기다리면 하나님께서 수퍼맨처럼 오셔서 나를 구해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온전히 자라나 그 어려움을 능히 이길 당당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찾아온 시험과 시련에 올바로 반응하라는 뜻입니다.
이럴까 저럴까 갈팡질팡하지 말고, 하나님이 이러실까 저러실까 하늘을 보고 기다리지 말고,
두 마음을 품어 바람에 밀려 요동치지 말고, 세다고 휘두르지 말고, 약하다고 비실대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올바른 것을 구하며, 그 시련을 통하여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배우라는 것인지
깨닫고 또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온전히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는 자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가 말합니다.
“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렸다고 생각하며 기도합니다.
동시에 나는 모든 것이 내게 달렸다고 생각하며 행동합니다.”


어느 날 문득 자신을 찾아온 시에 반응하여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파블로 네루다,
그와의 만남을 통해 시인으로 거듭난 감기쟁이 마리오,
형님과의 만남으로 버려진 땅 나사렛의 무지렁이에서 교회 지도자가 되어 흔들리는 초대교회를
든든히 세워준 야고보.

그래서 시험과의 만남도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로 받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땅에서는 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침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 2,000년 전 이 세상과 나를 만나러 오셨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의 실체와 본질,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나를 향한 간절한 소원과
애끓는 마음을 온몸으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신 예수님.
그분을 만난 나는 시련들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어떻게 재창조되고 있는지,

마침 불어오는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모두 세월이 더할수록 아름답고 온전해지는 하나님의 포이에마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