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빌립보서 4:4~9)

새벽지기1 2017. 11. 2. 07:01


한 여자가 아파트 10층 베란다에서 유리그릇들을 밖으로 던지고 있습니다.
이 여자 분을 편의상 A라고 하겠습니다.
A의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이상한 행동은,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한 여자로 인하여 비롯된 것입니다.
이 여자를 편의상 B라고 하겠습니다.

학부모 모임이 끝날 무렵.
B가 A에게 휴대전화를 내밀며 A의 전화번호를 입력하라고 하였습니다.
같은 학부모인지라 별 생각 없이 자신의 번호를 입력시켜주었습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B로부터 연락이 왔고 두 사람은 만났습니다.
그런데 B는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B가 연락했던 그날 아침
갑자기 목걸이가 툭 끊어졌고, 그 순간 하나님께서 A를 만나라는 말씀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나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B는 A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열심히 했습니다.
자신은 늘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그 음성에 순종하지 않으면 위험한 일을 당하며, 그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들을 여럿 열거하였습니다.
A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었고, B와 자주 만나 구역 식구들과 함께 예배도 드리고 구역
식구들은 주로 그런 류의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런 만남이 잦아지면서 정말 A에게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마음의 감동으로 전해졌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백화점에 갔는데, 갑자기 마음에 감동이 왔고, 수많은 물건 중에 하나님께서 사라는 물건들이
눈에 확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머뭇거리자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자녀에게 큰일이 생길 것이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눈에 들어온 물건들을 급히 샀습니다.
200만 원이 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전혀 의도하지 않는 이런 류의 생각들이 계속 일어났는데, 거기에는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큰일을 당한다는 음성이 반드시 첨부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임에 가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그 모임의 권사나 집사들이 ‘순종 시험’이라면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고, 통과해야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안의 모든 유리그릇을 밖으로 던지라는 생각이 떠올랐고 그래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런 일이 계속 반복되자 급기야 정신과 치료까지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당사자를 부끄럽게 하기 위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너무나 심각한 것이며, 이런 일들이 너무나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언급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일산의 유명한 교회이며 담임목사도 제가 잘 아는 목사입니다.

꽤 오래 전에 한국 기독교에 빈야드 교회 선풍이 엄청나게 불었던 적이 있습니다.
캐나다에 있는 빈야드 교회에서 매일(매주가 아닙니다.) 집회가 열렸고, 예배 중에, 기도 중에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캐나다나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목사와 교인들도 구름 떼처럼 몰려갔습니다.

그즈음에 마침 저도 그 교회 근처를 여행하는 중이어서 빈야드 교회를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 교회는 의자는 없고 그냥 운동장처럼 넓디넓은 홀이었고, 홀 한가운데 밴드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엄청난 사람들이 모여 음악에 맞춰 노래 부르고 열광적으로 기도하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 후 사람들이 그 넓은 홀에 큰 원들을 그리며 둘러섰습니다.
여전히 노래하며 기도하며 소위 ‘영춤’을 추면서 서 있는데
일군의 사람들이 흩어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기도를 해 주자 사람들이 픽픽 쓰러졌습니다.
저도 정말 쓰러지고 싶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하면서
그 사람들의 안수를 받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저는 그냥 서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와서 기도를 했지만 저는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눈을 살며시 뜨고 둘러보니 거의 다 쓰러졌지만 몇 사람은 저처럼 그냥 서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쓰러지지 않은 사람들은 영적 문제아로 취급당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과연 저는 영적 문제아일까요?

전도의 사명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며 앞뒤 가리지 않고 점 찍은 사람에게 쳐들어갑니다.
밤낮 없이 전화를 걸고 만나자고 합니다.
스토커 수준입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이라고 해서
그렇게 해도, 사명에 충실한 것일 뿐, 괜찮은 것일까요?

신자들끼리 모여서 하는 이야기들은 대체로 두 종류입니다.
위에 열거한 이야기와 유사한 것이거나, 아니면 세상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전혀 구별이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는 그룹은 잘못된 것이고, 지금 우리들은
하나님과 신앙 체험 이야기를 하니까 바람직한 것이라고.
그러나 모여서 세상 이야기만 하는 것도 문제지만, 신앙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바람직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얼마든지 병든 영혼들이 모여 병든 이야기로 다른 사람들까지도 병들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말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

영적인 일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은 전혀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으나 모든 일들은 자신의 영의 상태를 드러냅니다.

인간은 영(spirit)과 혼(soul)과 육(body)의 결합체입니다.
흔히 정신(혼)이 행동(육)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더 깊게 들어가면 영이 정신과 육체를 지배합니다.
육체에 속한 이야기만 하는 이유는 정신과 영혼이 죽은 상태라 그에 관한 것은 관심이 없기  때문이며,

기이한 영적 체험에 대한 과도한 집중은 그 영이 건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올바른 신앙생활,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영들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 속한 영과 악한 영은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영을 분별하는 것은 무슨 신비한 특별 은사가 절대로 아닙니다.
건강한 영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쉽게 하나님의 영과 악한 영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자신은 영을 분별하는 은사를 받았다거나, 영을 분별한다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들이나 그런
사람을 소개한다는 사람들은 믿지 말고 귀를 기울이지 말고 따라가지도 마십시오.
십중팔구는 영이 병든 사람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영이 진짜로 건강한 사람들은 그런 말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영을 분별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상이 돌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진리’로 나를 통하여 ‘생명을 창조’해 나가십니다.
악한 영은 ‘거짓과 위협’으로 나를 통하여 ‘생명을 파괴’해 나갑니다.

그런데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하나님과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이며,
둘째는 종교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신들에 관한 것으로 특별히 신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이미 세뇌되어 그것이 거짓인지 자신도 모르고 하든지, 교묘하게 거짓을 진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

교회 일을 누구보다 열심히 앞장을 섰던 어떤 분이, ‘성서학당’ 강의를 듣고는, 자신이 과연
옳은 일을 하고 있는지 깊은 회의에 빠졌습니다.
교회 일을 점점 등한히 하게 되자 주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아니, 아들 군대 보내놓고 그렇게 엉터리로 신앙 생활하면 아들이 무사할 줄 알아?!”

흔히 하고 듣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명백한 공갈과 위협입니다.
그렇다면 절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올바로 받은 사람들은 절대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도, 말하지도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의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무엇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전전긍긍하십니까?
악한 영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밤낮으로 ‘참소하는 자’(계12:10)로서, 남의 잘못을 들춰내게 하거나, 스스로 죄책감에 빠지게 합니다.

제 자신도 자괴감에 빠져 스스로 '야, 너 그러고도 목사라고 할 수 있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 때, 참소하는 악한 영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2)는 말씀을 새기며 참소하는 악한 영을 단호히 물리치며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해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 사람의 영혼은 날로 건강하게 창조되어 가고, 몸과 마음도 건강하게 됩니다.

명심해야 할 것은, 악한 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상대방을 사로잡으려 한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언제나 자신의 휘하에 묶어두려고 합니다.
겉으로는 예수님께 인도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똘마니’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람들을 미혹하여 자신의 하수로 만들기 때문에 악한 영을 ‘미혹의 영’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좋은 영향력으로 사람들을 설득하여, 자신이 아닌, 예수님께 향하도록 돕습니다.
더불어서 함께 예수님을 향하여 가는 ‘예수님의 사람들’을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제가,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맹목적으로 의존하는 ‘영적 의존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늘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악한 영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언제나 자신의 영적 우월성을
내세워 다른 사람들을 압도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자, 이런 설명을 들으면, 악한 영의 인도를 받는 목사나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정말 그렇습니다.
악한 영의 세력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엄청납니다.
예수님도 시험했으니까요.
자신을 되돌아보지 아니하면 반드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한 영에게 놀아나게 됩니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악한 영에게 간단없이 놀아나고 있는 자신을 보며 탄식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 7:24)

그런 장탄식의 원인은 이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중략)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 7:19-23)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그랬다면, 우리들도 당연히 악한 영의 교묘한 공격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행하는 이 생각과 일로 인하여 내가 살고 남을 살리고 있는지 늘 점검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당부합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

그렇다면 늘 긴장하고 자신을 살펴야 할까요?
이에 대한 답은 ‘그렇다’인 동시에 ‘아니다’입니다.
늘 긴장해야 한다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없습니다.”
또한 긴장과 부담을 준다면, 기뻐할 수 없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이미 복음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기쁜 가운데 즐거이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내용을 거슬러 올라가면 보다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빌 4:8)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하는 행동이 사랑할 만한가, 칭찬 받을 만한가 점검하는 일입니다.

남을 힘으로 누르거나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강요는 언제나 반발심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전도가 중요하다고 해서 무턱대고 쳐들어가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또한 그렇다고 해서 남의 눈치를 살피라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착한 여자 콤플렉스’에 걸려 불행한 인생을 삽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정말 신경 써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내가 하는 일이 참되고 옳으며 정결한가를 점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할 때,
자동적으로 내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할 만하게 칭찬할 만하게 보입니다.

그렇게 행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아무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나의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며, 열심히 살면 됩니다.

사도 바울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빌 4:5)

‘관용’은 헬라어 ‘에피에이스케’로,
손해나 역경을 당해도 쉽게 동요되거나 넘어지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영적 인내’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너그러운 태도로 베푸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라는 것이 있습니다.
보상을 기대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엔돌핀은 3배로 증가하고 콜레스테롤과 혈압은 내려가는 효과를 말합니다.
‘마더 테레사 효과’라는 것도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거나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보기만 해도 면역 항체 물질인 'Ig A'가 강화되어
암마저도 낫는다고 합니다.
Ig A는 근심, 걱정, 분노할 때는 급격하게 줄어드는 물질입니다.

지각에 뛰어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남을 돕는 선한 일에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충분한 보상을 이미 가득 담아 놓으셨습니다.
이것이 움직일 수 없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처음에 열거한 엉터리 영적 이야기들이나 넘어지고 자빠지는 일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음에 새기십시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며 괴이한 일을 행하는
종교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들을 해방하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에도 우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기이한 일과 기적들은 풍성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좇아가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나와 남의 생명을 풍성케 하기 위해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물임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 6: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