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모두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많은 성과를 거둔 분들도 계실 것이고, 또한 어려운 일을 겪느라 별다른 열매를 걷지 못하신 분들도 더러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생존 자체가 숭고한 것입니다.
특히 요즈음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대과(大過) 없이 여기까지 오신 것만으로도 장한 일입니다.
먼저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스스로에게, 또 서로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십시오.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동화작가
트레버 로메인이 쓴 “넓은 하늘 아래”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할아버지가 손자를 불러 말했습니다.
“내가 떠나면 재산을 네게 물려줘야 하는데, 그 전에 인생의 비밀을 찾아오렴.”
그리고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준 단 하나의 힌트는
“드넓은 하늘 아래 그 비밀이 숨어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손자는 인생의 비밀을 찾아 여행하며 여러 격언들을 들었습니다.
나무에게서는 “땅에 단단히 뿌리 박아야 바람에 쓰러지지 않는다.”는 인생의 비밀을 배웠고,
농부로부터는 “삶의 비밀은 씨앗에 있단다. 씨앗을 심고 돌보듯 생각을 키우면 어느새 열매를
거둔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손자는 몇 년 동안이나 세상을 떠돌며 여기저기에서 인생의 비밀을 물어보았지만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할아버지에게 그동안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며 인생의 비밀을 못 찾았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아가야, 넌 이미 그 답을 찾았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인생의 비밀을 찾아 헤맨 네 여정이 바로 인생의 비밀이란다.
그 길을 따라서 배운 모든 것이 풍요로운 인생을 살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란다.”
그렇게 말씀하신 뒤, 할아버지는 “이제 내 모든 재산은 너의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재산은 어디에 있나요?”
그러자 할아버지가 대답했습니다.
“저 넓은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이 네게 줄 재산이란다.”
고규홍 씨는 나무 칼럼니스트입니다.
나무에 대해서 공부하고 전국의 유명한 나무들을 취재하여 나무 이야기들을 잡지에 기고하기도
하고 책으로 출간하기도 합니다.
그는 원래 유력 일간지의 잘나가는 기자였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던 해에 깊은 회의감이 찾아왔습니다.
그저 앞만 보고 달려온 삭막하고 피곤한 생활,
이렇게 열심히 일해도 10년 후에는 그저 아파트는 열 평 정도가 더 넓어지고, 지위는 두어 단계
승진하고, 자동차는 중형차로 바뀔 뿐, 그것도 운이 좋아야 그렇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 사표를 내고, 태안반도의 한 수목원에 칩거하고 그동안
켜켜이 쌓였던 생각들을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해 11월, 초겨울 어느 날 진눈깨비가 휘날리는 가운데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때 문득 눈에 들어온 나무 한 그루가 있었습니다.
이미 다른 나무들은 잎을 다 떨어낸 나목(裸木)인데 그 나무만은 하얀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가까이 가보니 목련이었습니다.
“아니, 목련은 봄에 꽃을 피우는 나무인데 참 신기하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 나무가 무슨
사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알아보니 그 목련나무는 초겨울까지 꽃을 피우는 그런 종류였습니다.
하지만 이를 계기로 나무의 사연들을 취재해 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전국 각지를 돌며 이름 있는 나무들의 재미있는 사연들을 조사하고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가 말합니다.
“세상 만물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나무가 없어지면 사람들도 없어집니다.
나무 이야기를 들으며 나무를 사랑하게 되기를,
그래서 사람들이 풍성하고 여유로운 행복을 찾기를 소원합니다.”
그는 기자로서 갈고 닦은 재능을 여전히 잘 발휘하고 있습니다.
달라진 것은, 수입이 훨씬 줄어들었다는 것과, 사람 대신 나무를 취재하고, 핏발이 날카롭게
섰던 각박한 삶이 따뜻한 사랑과 한가로운 여유가 조용히 흐르는 삶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글을 통해 행복하게 된 것입니다.
“낯선 것과의 조우를 통해 이성이 시작된다.”고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고 지위가 높아지고 번창해야, 또 내 손에 쥔 것이 많아야만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넓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이 네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이나 고규홍 씨의 삶은, 우리
보통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그래서 낯선 것입니다.
추수감사절 설교를 준비할라치면 늘 조금 곤혹스러워집니다.
지난해를 결산해 보고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쥔 것을 나열하며, 얻은 것이 많으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외치고 얻은 것이 적으면 그래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감사의 감정을 부추기는 설교를 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추수감사절이면 으레 행하는 너무나 익숙한 것입니다.
요즈음처럼 혼란스러운 시대에는 낯선 것들이 훨씬 더 많아집니다.
그런데 그 낯선 것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일 때 전혀 새로운 세계가
열리며, 그리고 그 익숙한 것들과 결별할 때 새로운 삶을 산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낯선
곳으로의 초대로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세상은 단순히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이 아닙니다.
풍요를 넘어 훨씬 더 깊은 의미와 하나님의 끝없는 신비로 가득한 은혜의 세계입니다.
그 세계로의 여정은 때로는 힘이 들고 겉으로 보면 실패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의 초대를 받아들였고, 하나님께서 지시하는 곳으로 가고 있다면 나는 땅에서는 결코
얻지 못하는 열매의 씨를 이미 뿌리고 있는 중입니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계속 가노라면 언젠가는 반드시 100배의 결실을 추수할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이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눅 15:19)
이런 생각은 실패한 사람들이 당연히 하는 익숙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아들이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화가 난 큰아들이 말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눅 15:29)
이런 생각은 보통 사람들이 하는 당연하고 익숙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눅 15:31)
내 생각을 고수하며 내일을 또 어제처럼 그렇게 사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 “아니다, 너는 죽었다가 살아온 귀하고 귀한 내 자녀다.”,
“내 것이 곧 네 것이다.”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부디 새로운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빌 4:10)
사도 바울이 기뻐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수감되어 있고, 자유롭지 못합니다.
죽음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뻐하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쁨과 감사는 억지로 짜낸 것이 아닙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라는 말에서 그 첫 번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빌립보 교인들의 변화를 말합니다.
“싹이 나다.”는 말처럼 기쁜 것도 드뭅니다.
걱정거리 자녀가 철이 들어 자신의 할 일을 열심히 합니다. 싹이 난 것입니다.
폭삭 망하여 절망 가운데 헤매던 사람이 실패를 통해 큰 교훈을 배우고 다시 일을 시작합니다.
싹이 난 것입니다.
많으면 목에 힘을 주고 적으며 원망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의 무한함을 깨닫고 겸손해졌습니다. 싹이 난 것입니다.
못 하겠다고 오만 가지 이유를 나열하거나 죽지 못해 행하던 사람이 드디어 말귀가 열리고
진실한 마음으로 맡긴 영혼들을 돌봅니다. 싹이 난 것입니다.
저 파릇한 싹이 어떻게 자랄까?
어떤 꽃을 얼마나 아름답게 피울까?
어떤 열매가 얼마나 많이 열릴까?
그 열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까?
생각만 해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사도 바울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두 번째 이유는 결정적인 것으로, 온전히 이루려는 우리들이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2)
비천에 처하면 절망하고 풍부에 처하면 으스대는 것이 아니라, 비천에 처해있어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풍부에 처해있어도 겸손하며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모든 일에 배가 부르며, 어떤 처지에서도 감사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일까요?
그것은 수행과 득도와 훈련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이 말씀처럼 오해한 구절도 드뭅니다.
잘못 가르친 이 말씀으로 인해 곤경에 처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준비가 전혀 되지 않는 사람이라도 기도와 헌금 등 종교행위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돈도 많이 벌고 성공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에 나가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뭔가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융통하여 사업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잘 되지 않습니다.
정성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더욱 열심히 종교행위에 몰두합니다.
그러다가 몸과 마음 모두 지쳐버립니다.
과거의 여행들을 떠올려보십시오.
기억에 남는 것은 대부분 곤경과 난관에 얽힌 것들입니다.
왜 여행에서 고생한 기억들이 추억으로 남는 것일까요?
단 하나의 이유가 있을 뿐입니다.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이 접하는 가장 낯선 것은 ‘부활’일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정말 말도 안 되는 것이 ‘죽은 자의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생생한 실체였습니다.
그 낯선 존재, 그러나 너무나 생생한 그 분과의 조우를 통해 사도 바울은
전혀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부활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치고 돌아갈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 집에는 우리들의 영원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두 팔 벌려 우리를 기다리고 계심을 알려줍니다.
그분은 내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올바로
깨닫고 그 뜻을 행하면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공급하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올해 57세인 서영남 씨는 원래 가톨릭 수도사였습니다.
2003년 수도원을 나왔습니다.
집도 가족도 없는 그의 수중에는 300만 원이 있었습니다.
이 돈으로 뭘 할까 궁리하다가 노숙자들을 먹이자는 생각으로 인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많은 동구 화수동에 국수집을 차렸습니다.
무료 급식자가 늘어남에 따라 후원금과 자원봉사자도 덩달아 늘어났습니다.
요즈음 하루 400명에게 무료급식을 한다고 합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덩이로 5,000명을 먹이신 예수님보다 더 큰일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하고 또한 그보다 큰일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요 14:12)
그런 그에게 국가는 석류장이라는 훈장을 주었습니다.
서영남 씨는 훈장을 받으며 무슨 느낌이 들었을까 생각해봅니다.
드디어 세상이 나를 알아준다고 좋아했을까요?
그에게 성공의 의미는 무엇일까?
무료 급식자가 늘어나는 것일까요?
글쎄요.
그렇다면 그에게 실패란 어떤 것일까요?
가게 문을 닫는 것일까요?
글쎄요.
훈장을 받았다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더 크게 웃는다면,
내일부터는 그의 표정은 굳어질 것이고 목소리는 더욱 커질 것입니다.
그 마음에서 감사라고는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원래부터 늘 웃는 그는 여전히 그 정도로만 웃고 있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그에게 성공과 실패라는 개념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저 남을 돕고 남들이 소망을 얻을 수만 있다면 늘 기쁘고 그렇게 모자람이 없이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 많은 것을 갖고도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소출이 없으면 낙망하고 절망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숫자로 환산하고 내 손에 쥔 것만 내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세상은 나누기에는 충분하고 혼자 갖기에는 언제나 부족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빌 4:17)
남을 위해 희생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희생한다는 생각은 언제나 생색을 동반합니다.
나는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며 생색을 내는 한 아무리 많아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기뻐할 수 없습니다.
남에게 유익을 끼치리라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체험하며
어떤 처지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 마음 위에 하나님께서는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십니다.
우리 이제 그렇게 살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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