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최종 병기, 진실 (빌립보서 2:19~27)

새벽지기1 2017. 10. 24. 07:20


마이클 샌델 교수는 1980년부터 30년간 하버드 대학에서 정치철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의 정의에 관한 강의는 최고의 명강의로 꼽히고 있고, 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는
우리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쉽지 않은 그의 책에 수많은 독자들이 관심을 보이는 현상을 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아무리 인간의 탐욕이 세상을 흔들어도 하나님의 뜻, 정의는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현재 온 세계가 앓고 있는 금융위기는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마지막 혼란입니다.
걱정하고 절망하고 분노하며 또한 살길을 모색하면서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들을 쏟아냅니다.
그 수많은 생각들은 혼란을 더 깊은 혼돈으로 몰아갑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는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카오스의 한가운데, ‘정의’라는 화두를 던지며
수많은 생각들의 가닥을 잡아줍니다. 그리고 갈 길을 제시합니다.

그 책 중에서 케이시 마틴이라는 장애인 프로 골프 선수 이야기가 나옵니다.

희귀 질병을 앓고 있어 걸으면 심한 고통과 함께 출혈과 골절의 위험이 따르는 그는 미국 PGA
경기 중에 골프 카트를 이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PGA는 프로들의 경기 중 카트 이용 금지 규정을 들어 거절하였습니다.
마틴은 장애인법을 근거로 하여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이 사건은 결국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갔고, 근엄한 대법원 판사들은, “골프 코스에서
카트를 타고 다니면서 샷을 하는 사람도 프로 골프선수라 할 수 있는가?”라는 언뜻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과 머리를 맞대고 씨름해야 했습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골프계의 거물들과 함께 수많은 전문가들이 증인으로 나왔는데,
그 중에는 18개 홀을 걷는 데는 500칼로리가 소모되며 이는 맥도날드 햄버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한 생리학 교수의 증언도 있었습니다.
결국은 대법원 판사들은 7:2로 마틴이 카트를 이용할 수 있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승패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긴 재판 과정을 통해 판사들이 다뤄야 했던 것은 다름 아닌 골프의 ‘본질’이었습니다.
샌델 교수가 그 재판을 거론한 것은, “좋은 삶의 본질을 논하지 않고는 공정성(정의)을 말하기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도 본질을 찿으면 그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마이클 샌델 교수가 말하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곧 정의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 등 그 어렵고 골치 아픈 수많은 이론들과 사례들을 들먹이며 정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놓고 너무나 간단히 결론을 내린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드디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살벌한 적자생존의 경쟁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만들기”가 대세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에 동참해야 합니다.
자녀 양육도, 공부도, 사업도, 정치도, 목회도 모두 더불어서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 생각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하고, 인간 탐욕의 마지막을 보고 아우성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즉, “더불어, 함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21세기의 시대정신이며,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본질이자, 키워드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경쟁하고 탐욕을 부리고 대립하고 권모술수를 쓸 것입니다.
그러나 “더불어, 함께”라는 본질을 결코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두 사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입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를, “자식이 아비에게 함과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빌 2:22)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는 오늘날의 터키 동남부에 위치한 루스드라 출신으로,
아버지는 헬라인이고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유대인으로, 조용한 성품의 청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1차 전도 여행 때 만나 그리스도인이 된 디모데는 평생 동안 사도 바울을 도우며
맨 마지막에는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평생 독신이었던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으로 낳은 아들’(고전 4:17)이라 부르며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빌 2:20)


빌립보 교회에 심각한 문제가 생겼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빌립보 교인들 간의 불화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수감 상태라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보냅니다.
사도 바울 자신처럼 생각할 사람이 디모데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또 에바브로디도를,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빌 3:25)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 바울이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돈을 모아 사도 바울에게 보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전달자가 아니라 사도 바울의 선교에 적극 동참하여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머무르며 자유롭지 못한 사도 바울 대신 복음 사역을 수행하였는데, “군사 된 자”라는
설명을 통해 몸을 사리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고 할 정도로,
얼마나 열심히 맡은 일을 수행하였는지 병을 얻고 죽기 직전까지 갔고, 그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빌립보로 되돌려 보낸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 독신이었으나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 같은 사람들이 있어 행복했을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나름의 의도와 목적이 있습니다.
돈을 버는 목적, 하나님을 믿는 목적.
또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는 의도,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그렇게
설명하는 의도, 또 그들을 빌립보로 보내는 의도,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사도 바울을 물불
가리지 않고 돕는 의도 등등.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의도를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빌 2:19).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 2:30)
언뜻 들으면 사도 바울 자신을 위하여, 안위를 받고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그 먼 길을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로 가게 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만약에 정말 그런 의도로 그렇게 하였다면 사도 바울은 나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과 우리 인간들을 창조하신 목적과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분명한 목적과 의도가 있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그렇게 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이 편지를 신약성경에
포함시키지 않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모든 삶의 기초가 됩니다.

우리 인간들이 불행한 이유, 교회가 타락하고 기독교가 변질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고 왜곡하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헬라어로 ‘하마르티아’라고 하는데, 그 원뜻은 “과녁에서 빗나가다.”입니다.
하나님 자신과 그분의 뜻이 곧 우리가 향해야 하는 과녁입니다.
그 과녁에서 빗나간 모든 것이 곧 죄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오늘날 많은 교인들이 열심히 그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함으로써 전혀 엉뚱한 방향, 때로는 정반대 방향으로 날아가버립니다.

한 유명한 목사의 설교를 듣다가 화들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여호수아 시대 때 가나안 땅으로 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습니다.
기생 라합의 집에 숨어들었고, 가나안 군사들이 집을 수색하러 들이닥쳤습니다.
그때 라합은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기고는 군인들에게 거짓말을 하여 따돌렸습니다.
그 사건을 예로 들면서 옳은 일을 위한 거짓말은 ‘하얀 거짓말’이므로 해도 괜찮다면서 성경에서
몇 가지 예를 더 들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도를 완전히 왜곡시킨 엉터리 설교입니다.

종교 개혁이 일어난 결정적 계기는 교회의 면죄부 판매입니다.
교회가 인간의 죄, 죽은 사람들의 죄까지도 사할 권한을 가졌다고 주장하며 면죄부를 고가로 판매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얼토당토하지 않는 일을 벌이게 되었을까요?

공적(功績)사상 때문입니다. 좋은 일, 훌륭한 일을 하면 공적이 쌓입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음 단계로 넘어가면서 아주 작은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훌륭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은 천국에 가고도 남을 공적을 남긴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성 프란시스는 정말 신실한 성도였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평생을 청빈하게, 또한 겸손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으며 진실로 소외된 이웃을 돌보며 살았습니다.
성 프란시스가 100만큼의 공적을 쌓고, 자신이 천국에 가는데 1만 쓰고 99를 남겼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나머지 99의 공적은 교회가 관리할 권한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 근거로 내세웁니다.
여러 성인들도 그와 같이 공적을 남겼고, 교회는 성인들의 남긴 공적들을 면죄부로 만들어 판 것입니다.
그 돈으로 성 베드로 성당을 짓는데 썼습니다.
물론 떨어진 콩고물은 종교지도자들이 나눠가졌습니다.
콩고물이 너무 많았고, 콩고물이 숨은 의도였다는 것 외에는 논리상 별 하자는 없었습니다.

가톨릭을 비방하자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오해하고 왜곡하기 시작하면 얼마나 큰 오류를 범하는지 보자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주요 모토 중 하나는, ‘오직 믿음’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의 공적이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결코 자신의 구원을 이루지 못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오직 믿음’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전적으로 옳은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전무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개신교에서, ‘오직 믿음만으로의 구원’을, 예수님을 구주로 시인하고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으면 이루어진다는 교리로 가르쳤습니다.
이 또한 맞는 교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의도는 망각하고 기계적으로 시행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참담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종교계의 신뢰도는 그 문제 많다는 대기업보다 낮으며,
개신교는 가톨릭과 불교보다 낮으며, 목사의 신뢰도는 신부나 스님보다 낮았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종교간 갈등의 원인을 제공하는 종교로, 57%가 기독교, 12.7%는 불교를 지목하였습니다.
가장 낮은 것은 가톨릭으로 2.8%였습니다.
한마디로, 기독교와 목사는 사회의 문제아요 망나니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종합하며 우리가 봐야 하는 본질이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과 의도대로 세상은 움직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과 의도는 언제나 ‘사랑’과 ‘창조’입니다.
즉 생명을 살리고 더욱 풍성케 하는 것입니다.

둘째, 세상이 아무리 예측할 수 없이 흐른다고 해도, 그 원인은 언제나 인간의 탐욕입니다.
인간은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온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의 자녀들이므로 작은 것 같으나 큰 영향을 미칩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면 좋은 영향을, 나쁜 의도를 가지면 나쁜 영향을 미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과 복음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생명을 살리고 더욱 풍성케 하시는 예수님께서,
죽는 일에 몰두하는 줄도 몰랐던 바울 자신을 불러 살리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오직 살 길인 예수님과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중입니다.

감옥에 갇힌 것도, 빌립보 교회에 유대주의자들이 들어와 소란케 하고 교인들 간에 불화가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는 것도, 자신의 지위와 영향력과 세력을
유지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직 살 길인 하나님의 뜻을 바로 세워 빌립보 교인들로 하여금
제대로 올바로 살게 하기 위함입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도 사도 바울과 같습니다.
곧 예수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그래서 디모데를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헬라어로 “에일리크리네이스”인 진실은 ‘완전무결한 태양빛으로 시험하다’입니다.

이 혼란스럽고 혼탁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어떻게 이겨내야 하나?
경쟁력, 외모, 재산과 배경, 학벌, 정직과 성실, 통찰력, 재능, 의지력, 용기 등등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이 ‘진실’입니다.
‘진실’이 최고의 병기입니다.

언제나 예수님의 완전무결한 빛 아래서,
“나는 왜 이것을 원하며, 어떤 의도로 이 일을 하는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대답해야 합니다.

이득을 얻기 위해서, 유명해지기 위해서, 영향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인정과
보상을 받기 위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서, 좀 더 편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의도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 어떤 의도와 목적도 예수님의 완전무결한 빛 아래에선 밝히 드러나며,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 그림자는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시들고 병들게 만듭니다.

오직 진실만이 예수님의 완전무결한 빛을 통과하며 그림자가 생기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상대방에 대해서 “그대는 진실한가?”를 묻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나를 향해 “너는 진실한가?”를 물으시고,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은 과연 진실한가?”를 묻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향해, 아내는 남편을 향해, 교인들은 목사를 향해, 대원들은 지휘자를 향해 묻습니다.
“그대는 진실한가?”

이 질문은, 다른 말로 하면 “그대는 나를 사랑하는가?”입니다.

하나님을 ‘진짜로’ 사랑하고 다른 사람들을 ‘진짜로’ 사랑할 때 비로소 진실할 수 있습니다.
진실할 때만이 나는 살아나고 사람들을 살려냅니다.

제자들이 마을로 나가 음식을 마련하여 예수님께 드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요 4:32)

의아해 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

드디어 많은 사람들이 더불어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동의를 한 것입니다.
그 일에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께서 먹이십니다.
그것도 베풀고도 넘칠 만큼, 너무나 충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