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리니 (이사야 29:13~20)

새벽지기1 2017. 10. 17. 13:07


한 경건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 수도사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수행을 잘하면 언젠가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게 될 것이라
믿으며 몸과 마음을 잘 다스리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결과 깊은 학식과 따뜻한 성품과 솔선수범의 진솔한 태도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딱 하나 있었습니다.

주일이면 그 수도원에서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성가대원 중 하나가 늘 ‘파’ 음에서
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가대에서 성가를 부를라치면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어느 주일, 아니나다를까, 또 ‘파’음에서 틀린 소리가 하나 삐져나왔습니다.
순간 머리꼭지가 열렸지만, 얼른 마음을 다스렸습니다.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자꾸 그 일이 생각나 다른 일에 집중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인가 알아보고는 그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 사람은 강 한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서 혼자 사는 어부였습니다.
배를 타고 그 섬으로 갔습니다.
그 사람은 낡은 움막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 어부는 귀한 수도사님이 이 누추한 곳에 오셨다고 몸 둘 바를 몰라서 쩔쩔 맸습니다.
수도사는 자신이 찾아온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그 어부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는 더욱 쩔쩔 맸습니다.
“수도사님,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여영 잘 안 됩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잘 배워서 반드시 고치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에 수도사가 그 어부에게 정확한 ‘파’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어부는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파. 파. 파......” 정확하게 ‘파’음이 나왔습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하다는 어부를 뒤로 하고 흡족해진 수도사는 배를 타고 섬을 떠났습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멀리서 자신을 급히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수도사니임 !, 수도사니임!” 수도사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어부였습니다.
수도사에게 다가온 그 어부가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수도사님,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 됐는데 혼자 해보니까 잘 안 됩니다.
다시 한 번만 더 가르쳐 주십시오.”
수도사는 그에게 다시 ‘파’음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몇 번 연습을 하던 어부가 이제는 혼자서도 잘 할 수 있겠다며 감사의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갔습니다.
그 어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수도사는 정신이 완전히 나가 있었습니다.
그 어부는 물 위를 걷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빌 2:3)

‘겸손’, 정말 얻기 어려운 덕목입니다.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스스로를 겸손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겸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훌륭한 수도사는 왜 그 어부를 찾아갔습니까?
‘다툼’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싸우러 간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다툼, 불편함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잘못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키워드는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입니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남들로부터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어린아이로부터도 배워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공자도 세 사람이 모이면, 그 중에 반드시 스승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착해지거나 하나님을 잘 섬겨 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장하는 것”(엡 4:14)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장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엡 4:14)

왜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지지 말아야 할까요?
그래야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이 더욱 풍성하게 되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자랑스러운 자녀요,
사람들의 존경받는 생명의 리더로서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입니다.
배우기 위해서는 겸손이 필수입니다.

그런데 명심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겸손 자체가 삶의 목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덕(德, virtue)에 해당되는 헬라어가 두 가지입니다.
‘아레테(arete)’와 ‘디카이오수네(dikaiosune)’입니다.
이 두 단어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먼저 ‘아레테’는 인간 자체의 능력과 성취를 강조합니다.
내가 열심히 마음을 다스려 겸손해졌다고 합시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대견합니다.
스스로 훌륭하게 여겨집니다.
이때 겸손이 곧 ‘아레테’의 겸손으로, 겸손이 삶의 목표입니다.
경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열심으로 경건하려고 합니다.
남들로부터 “그 사람 참 경건해.”라는 칭찬을 듣기를 원합니다.
이를 두고 사도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없다.”(딤후 3:5)고 말합니다.
봉사, 전도, 헌금, 기도 등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다는 사람 가운데 목에 힘이 잔뜩 들어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바로, 자신의 노력과 능력으로 이런 어려운 일들을 성취했다고 생각하는 ‘아레테’의 사람들입니다.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남들을 판단하고 가르치려고 듭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경직돼있고 비장하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리새인들입니다.

반면 ‘디카이오수네’하나님과의 관계와 영혼의 온전함를 중시합니다.

“남을 괴롭게 하면 하나님께서 슬퍼하시고 내 영혼은 파괴된다.

내가 올바로 살지 않으면 예수님께서 슬퍼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이 ‘디카이오수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마 11:29)
그래서 예수님을 생각하며 겸손하려고 애를 씁니다.
잘난 척한 것이 생각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 너무나 후회스럽습니다.
그러다가 요번에는 잘 해냈습니다.
예수님을 기쁘게 한 것 같아 나도 기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디카이오수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날이 갈수록 밝고 따뜻해진다는 것입니다.

아레테와 디카이오수네의 차이가 어렵게 들립니까?

망나니 자녀가 어느 날 부모님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구나 생각하고 부모님의 심정과 자신의 삶을 생각하며 열심히 삽니다.
이것을 보고 철들었다고 말합니다.
아레테는 ‘영적으로 철이 드는 것’을 말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일을 감사함으로 행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당부합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빌 2:4)
여기서 사도 바울의 기쁨은 곧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자,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무엇일까요?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사탄의 제안을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탄이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 사탄이 한 말 중에, 너무나 의미심장한 말이 있습니다.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영광과 권세의 원천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사탄에게 영광과 권세를 주실 리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자녀들인 인간만이 영광과 권세를 창출할 수 있습니다.
코끼리가 아무리 힘이 세도 금메달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코끼리보다 힘이 약한 장미란 선수에겐 금메달을 줍니다.
영광을 창출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광과 권세를 하나도 받은 적이 없는 사탄이 현재는 천하만국의 영광과 권세를
거의 다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탄이 스스로 그 영광과 권세의 출처를 밝히고 있습니다.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누군가가 사탄에게 넘겨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넘겨준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영광과 권세가 언제 사탄에게 넘어가는가를 잘 아셔야 합니다.

사탄에게 영광을 넘기는 경우는 부지불식간에 일어납니다.
그리스도인들까지도 너무나 쉽게 저지르는 행동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요5:44)

사람들끼리 영광을 취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떤 사람이 자신이 태어난 동네를 위하여 많은 돈을 기부하였다고 합시다.
좋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향하여 박수를 치고 찬사를 보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의 중심을 봅니다.
“정말로 가난한 그 동네를 위한 일이냐, 아니면 네 이름을 내서 장차 국회의원이 되기
위함이냐?”고 묻습니다.

만약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것이면, 그가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였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 영광은 사탄에게 돌아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3)

이사야서 14장 12절 이하에 사탄의 정체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자꾸 높아지려는 마음을 품는 순간, 천사나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지라도 사악한 존재로 돌변합니다.
가장 높아지려면 다른 사람들을 파괴해야 합니다.
그 위에 군림해야 합니다.

자신을 높이려는 사탄의 말로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서 찍혔는고,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사 14:15)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심판하신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교만한 자가 필연적으로 가게 되는
결과를 뜻하기도 합니다.

국민과 나를 위한다고 외치던 리비아의 카다피가 아주 좋은 예입니다.

사도 바울은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길을 보여 줍니다.
너무나 명쾌하고 간결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

예수님은 누구인가?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한 분입니다.
그러나 그 높으신 분이 점점 낮아지십니다.
인간으로, 종으로, 그리고 가장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달리심까지 낮아지셨습니다.
왜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보십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 그리스도는 최고로
높이셨고, 스스로 높아지려는 사탄은 가장 낮아졌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높이십니까?
사탄의 조종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영광을 사탄에게 넘겨주고 있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높이려는 데 비례하여 낮추십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그에 비례하여 높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 5:4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