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넓은 예수님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실수가 잦은 베드로에게 명예 퇴직을 권고했습니다.
베드로는 억울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한국 사람들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눈이 침침하긴 했지만, 사람을 못 알아 볼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모습이 너무나 바뀐 한국 사람들을 도무지 알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천당 갈 사람을 지옥에 보내고, 지옥에 갈 사람을 천당에 보내는 실수를 종종 저질렀습니다.
모두 다 ‘그놈의 성형수술’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도 “어머, 하늘나라에도 찜질방이 다 있네! 게다가 유황불이야!”라며
지옥불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불 주위로 모여 들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생각을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런 게 어딨어!”라고 부인하는 부류와 “정말 있대.”라며 노심초사하는 부류.
죽음 이후에 대한 생각이 어찌 되었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인간의 불행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 일어난 결과들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닙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무서워하지 않아도 될 것을 무서워하고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을 무시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이 땅에서의 삶을 제대로 살게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오해한 결과가 인간의 교만과 탐욕이며, 그 결과는 실패와 파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두 사이에 끼었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니라.”(빌 1:23-24)
복잡하게 말하고 있으나 그 뜻은 간단합니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에 끼어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빨리 죽는 것이다.
그런데 살아서 너희를 위해서 할 일이 더 남아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죽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 때문입니다.
제프리 롱(Jeffrey Long)은 미국 방사성 종양학 전문의입니다.
그는 종교인도 심령학자도 아닙니다.
1998년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죽음 체험’에 관한 웹 사이트를 개설하였습니다.
별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전 세계에서 인종, 종교, 문화를 초월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 체험에 관한 글을
남겼습니다.
이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신빙성이 있는 사례들을 모아 조사해 보았습니다.
1,300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음, 그 이후”라는 책을 썼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긴 터널을 지나 밝은 빛 가운데 섰습니다.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나의 생각과 행동, 말, 미워한 것, 도운 것, 돕지 않은 것, 도왔어야 했던 것 등,
모든 것이 보였습니다.
내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비열했는지, 동물들에게도 얼마나 잔인하게 굴었는지!
너무나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었습니다.
내가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이 어떻게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삶에 물결을 만들어내는지
명확히 보았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작은 모든 결정과 선택이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지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을 실망시켰다는 느낌이 너무 생생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가 자신에 대해서 끔찍하게 느끼고 있는 동안에도 하나님이 나의 그런
한계를 동정하고 받아들여 준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증언들의 공통점은,
심장과 숨이 멎은 후, 유체를 이탈하여 자신을 내려다보았고, 갑자기 어둡고 긴 터널을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고, 그리고는 너무나 밝고 환한 빛(그러나 눈이 부시지는 않은)
가운데 섰고, 자신의 과거를 보았고, 그에 대해 한없이 부끄러웠고,
그러나 그 빛은 자신을 연민과 동정과 사랑으로 용납하여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같이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곳을 떠나서 다시 몸으로 돌아왔는데, 마치 더러운 옷을 입는 것 같았습니다.”
자, 이러한 내용들이 과연 성경적인 개념들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죽음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의 종교는 다양했으며, 심지어는 종교가 없는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는지 추적하며 점검해 봅시다.
사도 바울에게 죽음에 대한 인식의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스데반의 순교였습니다.
스데반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첫 박해의 최초의 순교자입니다.
스데반이 거리로 나가 예수님을 증거하자,
유대인들이 돌을 들고 몰려와 스데반에게 던졌습니다.
그때 아직 예수님에 대해서 모르던 바울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성경이 그때 일을 이렇게 전합니다.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행 7:58)
무수한 돌들이 날아와 스데반의 몸을 때렸습니다.
머리가 깨지고 피가 흘렀습니다.
그때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보며 말했습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행 7:56)
그 말에 더 많은 돌들이 날아왔습니다.
그러자 스데반이 이렇게 외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더욱더 많은 돌들이 날아왔습니다.
스데반이 마침내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며 말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
그 모든 것을 보았던 바울에게는 분명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뇌리에는,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스데반의 평온한 얼굴이
박혔을 것입니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게 하였는가?
그러나 그는 유대교에 충실한 사람, 그러다가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은 바울에게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밝히셨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핍박하는 자신마저 받아주시고 용서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
가운데서 마침내 죽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체험한 매우 특이하고 신비한 경험을 고린도후서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습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중략)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1-4)
사도 바울이 가봤다는 셋째 하늘은 과연 어디였을까요?
왜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하였을까요?
먼저 셋째 하늘이라는 개념은 유대인들에게서 왔는데,
유대인들은 하늘이 일곱으로 나뉘어져 있고, 그 중 셋째 하늘은 의롭게 죽은 사람들이 머무는 장소라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0절에도 “내리셨던 그(예수)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하늘 위”는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머물고 계시는 하늘을 의미하며,
사도 바울도 그곳을 다녀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몸 안’과 ‘몸 밖’을 구별했던 것은 혹 “유체 이탈”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도 바울은 ‘몸’을 ‘장막’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니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고후 5:1-3)
사도 바울의 이 말은, 죽었다가 살아났을 때 다시 더러운 옷을 입는 것 같았다는 사람의 말과
동일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말도 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8-39)
죽음을 체험했던 사람들의 공통된 증언들은, 그 빛이 절대자였으며 그 빛은 자신을 한없는
사랑과 연민으로 용납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음마저도, 죄마저도, 권력과 부와 깊이와 높은 것을 추구했던 욕망마저도 하나님의 사랑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 누가, 어떤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능가할 수 있겠습니까?
이 모든 것, 죽음에 대한 자유가 사도 바울에게만 특별히 주어진 것일까요?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된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들도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죽음의 실체를 올바로 알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 어떤 죄도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용서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그 사랑과 용서를 거부하고 제 길로 가버립니다.
그 끝이 지옥입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온 힘을 다해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살면, 그 삶이 천국으로 이어지고 천국에서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죽은 후에 누리게 될 영원한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으므로, 오늘의
시험과 유혹을 견디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가장 두드러진 것은 죽음 후의 변화입니다.
과연 그들은 어떻게 변화되었을까요?
자신감이 늘고, 영성이 더 강해졌으며, 물질이나 지위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줄었습니다.
삶의 신성함에 대한 믿음, 신의 존재에 대한 신념,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해졌고, 다른
사람들이 필요에 민감해져 그들을 돕고자 하였으며, 인생을 더 충만하고 즐겁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왜 비장해지지 말아야 하는지 아시겠죠?)
이미 갖고 있는 종교에는 더 헌신하였지만,
그 종교의 잘못된 점에 대해서는 고치려고 했고 적대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직업에 대해서 재평가하였습니다.
그전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겨야 한다.’는 사고방식과 경쟁이 최고의 가치였는데,
점점 더 공감과 연민 쪽으로 그 가치가 옮겨갔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고 아무리 많은 부와 명예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직업을 바꿨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집착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너그러워졌고,
나누기를 즐겨했고, 무엇보다도 다시 죽게 되었을 때 너무나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 1:27)
복음에 합당한 삶이 바로 죽음을 체험했던 사람들이 살았던 삶이 아닙니까?
복음에 합당한 삶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합니다.
첫째,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는 욕심을 버리고 정직과 성실로 열심히 돈을 버십시오.
그리고 교회에서는,
자신을 높이려는 생각을 버리고, 이웃을 살리는 일에 열심히 힘을 모으십시오.
둘째,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에게 털끝 하나 손상을 입히지 못합니다.
다만 미혹하여 스스로 올무에 빠지게 하고 남을 해하게 만듭니다.
사탄의 궤계에 벌벌 떨지 마십시오.
Only Just Say No!
“나는 너랑 놀지 않을 거야!” 외치는 순간 사탄은 꼬리를 내리고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들은, 죽음 너머의 세계도 사랑으로 관장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하나님의 자녀들이 해야 할 일은 당연히 이 땅에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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