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를 마친 후 목사님이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아주 가끔씩 교회에 오는 청년이 보였습니다.
“오랜만이군. 하나님의 충성스런 군사가 돼야지.”
그 말에 “저는 이미 하나님의 군사인데요.” 청년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부활절과 크리스마스 때만 볼 수 있지?”
그러자 청년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특수부대 비밀요원이거든요.”
하나님의 군사 가운데 최고의 군사는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기독교를 전 세계로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요원 중의 요원입니다.
신약성경 27권 중 사도 바울이 쓴 것은 모두 13권이나 됩니다.
오늘부터 몇 주에 걸쳐서 사도 바울이 쓴 빌립보서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합니다.
먼저 사도 바울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합시다.
160년경 어떤 사람이 바울행전(The Acts of Paul)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바울의 외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키는 작고 머리숱은 많지 않고 다리는 굽었으며, 양 눈썹이 맞붙어 있고, 코는 매부리코였고,
은혜가 충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때로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천사의 얼굴로 보이기도 하였다.”
사도 바울은 평생 독신으로 살았는데, 그 이유가 충분히 짐작이 됩니다.
그런데 외모보다 중요한 사항이 여럿 있습니다.
이런 사항들은 그의 글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합니다.
먼저 그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빌립보서에서도 언급하였습니다.
“내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빌 3:5-6)라고
자신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말리엘 문하생입니다.
가말리엘은 당시 유대교 최고의 랍비로,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는 것은 유대인으로서는
최고의 학문을 연마한 구약 성경에 정통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유대교 랍비로서 공부를 많이 한 두뇌가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유대인 중 6,000명에 불과한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에도 철저했는데, 이것은 그의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에 충실하였음을 의미합니다.
그의 고향은 다소입니다.
다소는, 오늘날 터키 동남쪽에 위치한, 길리기아의 수도였습니다.
교통과 해운의 요충지로서 대단히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권자였는데,
어떻게 디아스포라 유대인인 그가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을까요?
타국인이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두 길은, 로마 군인으로 20년 이상 복무하는 것과
돈으로 사는 것인데, 사도 바울의 선친이 다소의 부유한 상인으로 돈을 주고 로마 시민권을
산 것으로 추정합니다.
집안이 부유했으므로 예루살렘까지 유학을 보내 공부시킬 수 있었고, 분명 다소에서도
최고의 교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헬라어와 헬라 철학에도 능통하였습니다.
유대교와 헬라 철학에 정통한 엘리트요, 로마 시민권까지 갖춘 그는, 유대교의 벽을 넘어
기독교를 세계로 확산시키는데 최적의 인물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Pax Romana, 로마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여권 없이 어디나 여행이
가능했고, 언어는 헬라어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남은 일은 그를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는 유대교의 철저한 신봉자로서, 오늘날의 의회에 해당되는, 산헤드린으로부터
기독교인들을 색출 체포하는 권한까지 부여받은 인물입니다.
그 때, 예루살렘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났고,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는 그 기독교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가는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불러 세우셨습니다.
정오였습니다.
작열하는 태양빛보다 밝은 빛이 하늘로부터 그에게 갑자기 임하였고 그는 쓰러졌습니다.
그리고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26:14)
이에 대해 그는 “주여 뉘시이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말을 덧붙이셨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행 26:14)
이 말씀은 아주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황소에게 우차를 끌도록 처음 멍에를 메우면, 황소는 그것이 싫어 뒷발질을 합니다.
그런데 우차에는 나무못을 촘촘히 박은 가시채가 설치되어 있어 뒷발질할 때마다
고통을 느끼게 해놓았습니다.
고통을 당한 황소는 뒷발질을 멈추고 멍에를 메고 우차를 끌기 시작합니다.
“너는 애를 쓰지만 네 자신만 해치고 있단다.
내게 굴복하기 전에는 결코 평강을 얻지 못한단다.”는 뜻입니다.
그는 부활하신 예수님께 항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눈이 먼 상태로 어린아이처럼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커스에 들어온 그에게
예수님은 아나니아라는 사람을 보내어 그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셨고, 그리고 아나니아가
안수하자 그의 시력이 회복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께 돌아온 그는 아라비아 사막에서 몇 년 동안을 칩거하였습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공부했는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묵상하고
진수를 깨우치고 신학을 정립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도가 되어 죽는 날까지 예수님이 유일한 구원자임을 증거하였습니다.
다음으로 알아봐야 할 사항은 빌립보 교회에 대해서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유럽이 마주보이는 드로아라는 곳에 도착하였을 때, 어디로 가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마게도냐로 와서 우리를 도와 달라.”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유럽으로 건너가 빌립보에 당도하여 루디아라 불리는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 여인은 자주색 염료를 파는 상인이었는데, 당시 자주색 염료는 귀족들만 사용하는
고가의 염료로서, 대단한 부자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받아들인 그 여인은 자신의 저택을 가정 교회로 내어놓았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교회가 바로 빌립보 교회입니다.
이 빌립보 교회는 유럽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로서, 기독교의 방향이 동양이 아닌 서양으로
전파되는 교두보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한 기독교는 지중해를 거쳐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 꽃을 피우고 태평양을 건너
우리나라에 전파되게 됩니다.
빌립보서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기록 장소입니다.
여러 가지 견해가 있지만, 로마 감옥에서 썼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사도 바울이 수감 중이라는 사실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빌 1:7)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서신은, 빌립보서 외에도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후서,
빌레몬서 등이 있습니다.
그 후, 사도 바울은 참수형으로 생애를 마감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
이러한 바울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가 반드시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빌 3:8-9)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진 여러 재능과 부와 명예와 특권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둘째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해야 할 첫 번째는, 내가 하는 일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가시채
뒷발질하기’가 아닌가 점검해야 합니다.
천하를 얻고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헛고생만 하다가 인생 마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그 인생이 어두운 상자에 갇힌 것처럼
전혀 꽃을 피우지도 열매를 맺지도 못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란,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각과 마음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을까요?
왜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복음 전파를 위해 사용했을까요?
예수님을 닮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종’은 주인의 생각과 마음을 읽고 주인 대신에 행하는 존재입니다.
신실한 종일수록 주인의 일을 더욱 많이 하게 됩니다.
우리가 별 볼 일 없는 인생, 열매 없는 인생을 사는 이유는 사도 바울이 배설물로 여겼던
학벌, 재능, 명예, 리더십, 특권 등을 얻으려고 애를 썼고, 그 얻은 것을 오직 자신을
위해 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갔으나 점점 예수님과는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입니다.
“양으로 하여금 생명을 얻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케 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질문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참수형으로 인생을 마쳤잖아요?” 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발견된다는 것은 모두 그렇게 희생과 순교로 끝난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나 이태석 신부님과 같이 희생과 순교로 끝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꽃과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인생을 좀 알게 되었습니다.
좋은 자질과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실망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오직 자신을 위해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똑똑하면 할수록 가까이 가면 갈수록 주위 사람들에게 해가 될 뿐입니다.
사업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도 바울처럼 하면 반드시 성공합니다.
내 생명도 살아나고 날이 갈수록 풍성해지며, 다른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듭니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날수록 나는 더욱 살아납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을 예수님의 종이라고 소개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빌 1:3)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나를 만난 것을 감사하고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만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나 에베소 교회나 골로새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모두 사도 바울에게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교인들만은 예외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스펀지 물 빨아들이듯이 빨아들였고 그 말씀에 따라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사역의 가장 큰 후원자였으며 무엇보다도 구제에 아낌이 없었습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예루살렘 교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음을 듣고 바울을 통하여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큰 기쁨을 느꼈습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5)
생각하면 감사하고 간구하면 기쁨을 느끼는 이유는, 복음 안에서의 교제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복음 안에서의 교제”란 무엇일까요?
신문의 한 칼럼에서,
현대인들이 외로운 이유를 모두 다 상대방을 향하여 “저것 주세요.”라고 외치기 때문이라고
쓴 것을 읽었습니다.
즉, 서로를 수단으로 보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과 물건에 둘러싸여 있어도 점점 외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복 받는 수단으로 봅니다.
아내는 남편을, 남편은 아내를, 부모는 자녀를, 상인은 고객을 자신의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 봅니다.
교회를 이득을 얻는 수단으로 봅니다.
그래서 상대방으로부터 아무 것도 얻지 못하면 ‘욕하고’ 돌아서 버립니다.
요즈음 한국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교인들을 수단으로만 본다는 것입니다.
또한 목사를 단순한 수단으로 보는 교인들을 만날 때도 종종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을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우리들은 “애가 끓는다”는 표현을 씁니다.
너무나 사랑하고 걱정하면 애간장이 녹고 창자가 끊어집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걱정하고 계십니다.
바로 예수님의 그 마음으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과 모든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얼굴이 가끔씩 천사로 보였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만 내 인생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고 하였습니다.
복음 안에서의 교제란, 그 공동체 전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교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서로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대할 때, 복음 안에서
교제가 일어나고, 오늘 본문 말씀대로 “우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최고의 복을 우리 안에서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최고의 복이 무엇일까요?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빌 1:9-10)
무엇을 하든지 그 출발이 ‘사랑’임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장기간의 불황이 계속될 것입니다.
살기가 점점 팍팍해질 것입니다.
이기주의와 탐욕의 결과입니다.
탐욕은 자기만 잘 살겠다는 이기주의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러나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탐욕은 상상력과 영감을 사라지게 하고, 어느덧 그 사람을 작은 상자 안에 가둬두고 맙니다.
이에 대한 해답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남을 도와주겠다는 마음입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을 위한 잔머리 굴리기를 멈추는 것입니다.
거짓은 그 모양이라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나는 점점 더 깨끗하고 큰 그릇이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는 의의 열매를 가득 채워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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