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를 키울 때는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한 마리에 수백만 원 하는 소가 도망을 가면 큰 손해를 봅니다.
그런데 호주와 같은 나라는 울타리를 치기에는 땅이 너무나 넓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할까요?
방법이 딱 하나 있습니다.
샘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소들은 샘 주위를 떠나지 않고, 설사 멀리 갔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돌아옵니다.
오늘은 이사야서를 마치는 날입니다.
장장 15개월에 걸쳐서 예언자 이사야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의 사촌으로 태어나 별 책임질 일도 없이 왕자에 버금가는 특권을 누리며
편안히 살 수 있었음에도, 하나님께 사로잡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므낫세 왕에 의해
톱으로 잘리는 처형으로 생애를 마쳤습니다.
우리들은 목숨을 걸고 전했던 메시지의 핵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핵심을, 이사야서를 마치면서, 더욱 강렬한 언어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고, 어린 양으로 제사 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하는 그들은 자기 길을 택하며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사 66:3)
하나님의 마음과 뜻은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그저 넘치는 제물로 하나님의 복만을 구하는
행위에 대한 통렬한 비판입니다.
아무리 정성을 다해도 그 제사 행위는 살인 행위와 같고,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
하더라도 우상숭배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끔찍한 단어들을 골라, 다시는 헛된 제사와 예배를 드리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나도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사 66:4)
시험을 받지 않고 액운이 내게 임하지 않기를 바라며 하나님께 정성껏 제사를 드렸는데,
오히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에게 시험과 액운을 내리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기복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사야는 두 종류의 사람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자,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그들이 무덤 사이에 앉으며 은밀한 처소에서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으며 가증한 물건의 국을
그릇에 담으면서 사람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자리에 섰고 내게 가까이 하지 말라.
나는 너보다 거룩함이니라.”(사 65:4-5)
이들은 누구일까요?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일컫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 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제사장, 너는 평신도”라며 종교적인 계급을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비단 목사와 평신도를 나누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신도 중에서도, 내 신앙이 네 신앙보다 낫다며, 종교적인 우월성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고, 이런 것들을 당연히 여기며 맹종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습니다.
“그들은 무덤 사이에 앉아 은밀한 처소에서 지낸다.”는 말은, 종교 체제를 유지하며 기득권을
누리는 데만 신경을 쓴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너희가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너희는 평토장
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눅 11:43-44)
“저희는 죽이고 너희는 쌓으니 너희 조상의 행한 일에 증인이 되어 옳게 여기는도다.”(눅 11:48)고
말씀하셨습니다.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말은, 실제도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돼지고기를 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건조한 중동지방에서 돼지를 키우기가 대단히 어렵고,
소나 양은 노동력, 우유, 털, 가죽 등 여러 용도가 있지만, 돼지는 오로지 식용으로만 키워,
부자와 귀족들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돼지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자신들만의 특권을 누린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부류의 사람들을 지칭하는지 금방 이해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내 코의 연기요 종일 타는 불이로다. 내가 잠잠치 아니하고
반드시 보응하되, 그들의 품에 보응할찌라.”(사 65:5)고 하셨습니다.
‘그들 품에 보응한다’는 것은,
몸의 중심이 되는 가슴을 가장 치명적인 징벌을 가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왜곡된 선민의식’을 가진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치명적인 보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복만을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기복신앙’과 “너와 나는 달라. 멀리 떨어져 있어”
라는 ‘왜곡된 선민의식’이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어떤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시는지 알아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면류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바가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과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사 62:4-5)
이 긴 구절은 결혼식을 묘사한 것입니다.
‘헵시바’란 “나의 기쁨이 너에게 있다”는 뜻입니다.
‘쁄라’란 “결혼한 여자”라는 뜻인데 이혼당했다가 다시 결혼한 여자를 지칭합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전히 바벨론의 포로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의 머리에는 아름다운 면류관을 씌우시고 다시 아내로 삼으신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아내’라는 개념은 우리들에게도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에서 우리들을 ‘그리스도의 신부’(계 21:2)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서는 6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성경도 66권으로 구성된 책입니다.
구약 성경은 모두 39권입니다.
이사야서 39장까지는 암울한 이야기로 채워지다가 40장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외치는 자의 소리여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즉, 신약 성경의 시작입니다.
이사야서의 마지막 부분인 65장에서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사 65:18)고 말씀하십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인 21장에서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계 21:1)
이사야서나 신약 성경 모두 ‘하나님과의 결혼’으로 그 대미를 장식하고 있습니다.
눈치 채셨습니까?
이사야서의 구성이 성경 전체의 맥과 일치합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를 ‘작은 성경’이라고 부릅니다.
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들의 삶은 하나님의 배우자로서의 삶입니다.
심방을 다니면서 알게 된 사실은 우리 교회에는 사이좋은 부부들이 참 많다는 것입니다.
한 부부의 나이는 49세 동갑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안 지는 49년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은 같은 해에 앞뒷집에서 태어나 같이 학교 다니고 서로 사랑하게 되고
결혼하여 지금까지 사이좋게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가 하는 일에 깊이 신뢰를 합니다.
그전 교회에서는 예배에 목숨을 걸고 봉사를 열심히 해야 복을 받는다고 해서 일주일에
새벽기도까지 포함하여 열 번 넘게 교회를 가느라 개인 생활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게 아니다.’는 결론을 내리고 우리 교회로 왔습니다.
갑자기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처음에는 둘이서만 할 일이 없어서 어색했다가, 지금은 함께 운동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사회봉사도 열심히 하면서, 새로운 행복을 만들어 가는 중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사랑하지 않은 채, 체제를 유지하려면 규칙이 많이 생깁니다.
가정이고 교회고 사회고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 안의 사람들을 묶어 놓느라고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굉장히 많아집니다.
특히 교회에서의 규칙들은 하나님의 법이라면서 어기면 하나님의 벌을 받는다는 조건이 붙습니다.
즉, 모든 규칙들은 사람들을 규제하는 울타리가 되고 그 중 종교적인 울타리는 가장
무서운 것이 됩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사람들, 특히 종교지도자들은 울타리를 열심히 세우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 열심히 그 울타리들을 부수는 일의 반복입니다.
모세를 통해
울타리에 갇혀 사는 노예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한 나라를 세우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채” 하나님의 복만을 구하며, 이렇게 하면 벌 받고
저렇게 하면 혼난다며, 울타리를 빽빽하게 세웠습니다.
이사야는 그 울타리들을 무너뜨리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아예 울타리를 걷어치우고 다른 나라 포로로 보내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불러서 하나님의 신부로 삼으시며 그 지극한 사랑을 가르치셨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는 종교지도자들이 앞장서 울타리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더 높고 견고한 울타리를 그 어느 때보다 견고하게 세워졌습니다.
보다 못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기독교가 시작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또 다시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1000년 동안이나.
그때 울타리를 얼마나 높이 쳤는지 사람들의 숨통을 누르고 하늘을 가렸기에,
‘중세 암흑기’라고 불렀습니다.
종교 개혁으로 그 울타리들을 무너뜨렸습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또 다시 열심히 울타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전도와 봉사와 십일조와 성수주일과 교회 건물 짓기와 목사를 하나님처럼 섬기기의 울타리입니다.
요즈음 신종 울타리는 일천 번제 울타리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울타리를 쳐도 하나님의 복은 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 말씀대로, “시험과 무서워하는 것들만” 더 많이 생기고, 하나님의
무서운 보응이 가슴에 꽂힐 뿐입니다.
이런 종교생활을 계속하시겠습니까?
매리 케이 애시가 말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마음먹은 만큼만 갈 수 있다.”
여러분들은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울타리에 갇힌 소입니까?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는 그리스도의 신부입니까?
목사의 똘마니입니까?
예수님의 친구입니까?
예수님께서 고별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요 15:15)
마음에 새기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마음먹은 만큼만 갈 수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신앙생활의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종교의 울타리 안에서
헛된 예배에 몰두하다가 불행한 채 사라집니다.
신부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신랑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사 66:2)
“떨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킬’chil은, 무서워서 벌벌 떤다는 의미보다는,
‘민감하게 반응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말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듣고 믿고 마음에 간직하고
행합니다.
씹고 뜯고 맛보고 즐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떠는 사람들은 ‘심령에 통회하며 그 마음이 가난’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신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의 친구다.”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그 말씀에 떠는 사람들은,
“웃기고 있네.
아니, 하나님의 신부이고 예수님의 친구라면서 왜 나는 이 모양으로 사는 거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랬구나. 그동안 내가 부끄럽게 살았구나.
이제부터는 정결한 그리스도의 신부로, 당당한 예수님의 친구로 살아야 되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사랑할 때, 울타리는 자연히 걷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줄 알게 됩니다.
자연히 하나님은 영원한 샘물이 되십니다.
그 물에는 지혜와 영감과 위로와 죽은 것까지 살리는 능력이 있습니다.
젊은 날 샘물을 찾아 끝없이 방황하였던 어거스틴이 마침내 생명 샘 곁으로 돌아와
말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마음대로 하십시오.”
49년 동안 사랑하는 두 부부가 마음대로 해봤자, 서로를 위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씩씩하게 삽니다.
절대로 구차해지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신부이기 때문입니다.
있으면 감사하며 신랑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일을 열심히 합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과 바꾸지 않습니다.
돈, 명예, 권력, 쾌락 그 어떤 것도 내 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죽는 것도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을 영으로 만나는 가장 행복한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으로 살아갈 때, 나는 하나님의 기쁨인 ‘헵시바’가 되고, 내가 황무지에
거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쁄라’가 됩니다.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고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롬 8:38-39)는 사도 바울의 고백이 곧 나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 사랑을 가르쳐주신 예수님께 무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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