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층들에게 인기 있는 작가이자 CBS 라디오 피디 정혜윤 씨의 책,
“여행, 혹은 여행처럼”에서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글들이 적혀 있습니다.
“누군가 나 대신 여행을 하는 것을 상상도 못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누군가 나 대신 뭐라도 해 주길 바란다.”
“여행지에선 나는 누군가 나 대신 내 짐을 드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누군가 나 대신 내 짐을 들어주길 원한다.”
“여행지에선 나는 세상 만물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그런데 삶 속에선 많은 것에 애써 눈 감으려 한다.”
“여행지에선 내가 누구인지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런데 삶 속에선 제발 나 좀 알아봐달라고 애원하다.”
“여행지에선 나는 나 자신이 이방인임을 당연시한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행여라도 이방인이 될까봐 두려워한다.”
“여행지에선 누구와도 친구가 된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가장 득이 되는 자들과 친구가 된다.”
“여행지에선 나는 목표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더 알고 더 느끼는 데서 행복해한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수많은 것들을 오로지 수단으로 삼는다.”
“여행지에선 가장 단순한 풍경에서도 위대한 진리를 느낀다.
그런데 삶 속에서 나는 눈앞의 일에 급급하느라 어떤 진리에도 이르지 못한다.”
흔히들 인생을 여행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여행이 자발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늘 억지로 떠밀려가는 것이 되고 맙니다.
다시 말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안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전혀 내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인생의 불행과 삶의 왜곡이 일어납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자기 정체성은 나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내 인생도 달라집니다.
스스로를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자신의 직업과 관련된 자기 정체성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은 겉으로 드러난 정체성으로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너무나 취약한 것입니다.
회사에서 퇴직하자 감당할 수 없는 허무감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무력감이 엄습합니다.
종교가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땅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신으로부터 정체성을 부여받는다는 점입니다.
종교마다 규정하는 인간에 대한 정체성에 따라 각 종교들의 상하와 고저가 결정됩니다.
천박한 하등종교일수록 ‘쇠똥 밭에 굴러도 좋다. 그저 이 땅에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잘 먹고 잘 살자.’는데 몰입합니다.
반면 고등종교일수록 고귀한 인간의 품성에 초점을 맞춥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가 무엇이 되기를 원하실까요?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우리 인간에 대한 여러 명칭이 곧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나의 정체성’
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에서 출발하여,
‘여호와의 제사장’, ‘하나님의 청지기’를 거쳐, 최후의 만찬에서 천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에서 정점을 찍고, 마침내 하늘나라에서 ‘그리스도의 신부’로 영생을 누립니다.
이 과정은, 한 아기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것과 대단히 유사합니다.
아기가 자라면서 다양한 교육을 받습니다.
교육의 목표는 독립된 성숙한 인간으로서 세상에서 자기의 몫의 삶을 잘 사는 것입니다.
그 과정 중에 친구들을 사귑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함께 해로하다가 삶을 마감합니다.
이 과정을 잘한 사람이 성공한 인생을 산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여호와의 제사장이자 청지기, 예수님의 친구와 신부로서 제대로 산 사람이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을 살기 위해서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의 삶 자체가 여행이며, 우리들은 ‘순례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곳으로 가라.”(창 12:1)
본토 친척 아비 집에 안주하려 하지 말고, 하나님과 함께 여행을 시작하자는 것입니다.
‘순례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에 아무런 소망도 없던 75세 된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듣고 떠납니다.
그리고 그는 믿음의 첫 조상이 되고, 누구보다 위대한 인생을 삽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9)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3-14)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고후 5:1)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중략)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 11:13 이하)
이 모든 말씀은 우리들은 이 땅에서는 나그네요 순례자라는 것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나는 순례자”라는 정체성은,
하나님의 자녀, 여호와의 제사장과 청지기, 예수님의 친구와 신부라는 모든 정체성의 기초가 됩니다.
나는 순례자라는 사실을 망각하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도 그 삶은
왜곡되고 이 땅에서 가장 불쌍한 자들로 전락해 버립니다.
삶의 방향을 잃고 땅에 집착하게 되고 마침내는, 두고 가는 소돔과 고모라에서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
롯의 아내처럼 ‘소금기둥’이 되어 버립니다.
소금기둥, 바로 ‘짠돌이’와 ‘짠순이’를 말합니다.
소금기둥의 무서운 점은 생각이 멈춰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금식에 대한 것입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
너무나 유명한 구절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교인들에게는 어떤 고난도 해결해 주는
마지막 비결로, 그래서 늘 숙제처럼 생각하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하루 한 끼라도 금식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시는 분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아주 좋은 일입니다.
저는 가끔 북한강 변 산속에 위치한 강남금식기도원을 찾습니다.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 있고, 어려운 때일수록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며칠씩 금식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모두 다 금식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현재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흉악의 결박과 멍에의
줄을 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금식기도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금식기도뿐만 아닙니다. 교회에서 행하는 모든 종교행위(예배, 새벽기도, 헌금, 전도, 봉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금식”이라는 것은, 하나님은 특별히 금식을 기뻐하신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금식, 그것도 금식 기간이 오래일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행한 금식 기간을 자랑합니다.
큰 오해입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고행과 나아가서는 자신의 몸을 괴롭게 하는 자학까지 권장합니다.
그래서 더욱 힘든 고행과 더 깊은 자학을 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그 종교에서 존경을 받으며 높아집니다.
인도의 힌두교의 수행자를 구루라고 하는데, 어떤 구루는 20년 동안 모래로만 목욕을 합니다.
장소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옆입니다.
어떤 스님은 수년 동안 벽면참선에 정진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그런 일들을 절대로 금합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알겠다고 화장실에 들어가 일주일 동안 안 나온다고 합시다.
이것이 벽면참선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그놈이 아버지로부터 복을 받겠다고 자신의 몸을 자학한다고 합시다.
이것이 고행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그놈이 어려운 일을 당했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내겠다고 40일을 굶으며 조른다고 합시다.
이것이 금식이 의도하는 바입니다.
아버지로서 그러는 아들이 옳게 보이겠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아들을 나무랄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식을 그런 방편으로 사용하였습니다.
2절 말씀입니다.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의를 행하여 그 하나님의 규례를
폐하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겨하며
이르기를,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은 어찜이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은 어찜이니이까 하느니라.”(사 58:2-3)
번역이 어렵게 되어 있는데, 이 뜻입니다.
금식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성전에 모여 기도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란, 요즈음 말로 하면,
‘어떤 주식을 살까요?', '무슨 사업을 할까요?’ 등과 같은 것을 알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라 하였고,
그런 행위를 마치 “의를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금식하되, 주께서 보지 아니하심이 어찜이냐?”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주께서 알아주지 아니하심이 어찜이냐?”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어찌 나의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느냐?”
아주 쉬운 말로 하자면, “너희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겉으로는 내게 가까이 와 의로운 척하지만
진정 내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네 이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냐?”입니다.
또 예를 들어 봅니다.
두 아들이 열심히 사업을 하다가 어려움을 겪습니다.
큰아들은 온갖 불쌍한 표정과 갖은 궁상을 떨면서 징징댑니다.
작은아들은 밥도 잘 먹고 밝은 표정으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씩씩하게 더욱 열심히 일합니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를 기쁘게 합니까?
작은아들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금식이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금식할 때 “지지궁상 떨지 말고” 머리에 안 바르던 "기름도 바르고
얼굴도 깨끗이 씻고" 더욱 깔끔하게 하여(마 6:17-18) 남들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왜들 이렇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 기독교인들이 왜 이 모양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하늘 본향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임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이 땅이 전부로 알고, 그래서 돈과 지위가 없으면 죽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새기고, 새기고 또 새겨야 하는 것은, 종교 행위로 절대로 하나님을 움직여 보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사랑하십니다.
무엇이 필요한 줄 알고 계시고 또 공급하십니다. 그것도 풍성히.
예배, 금식, 기도, 묵상, 헌금, 구제, 전도 등등 모든 종교행위는 오직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요,
사랑에 대한 감사이며, 하나님과의 가장 친밀한 교제입니다.
금식은 소중한 행위입니다.
그 목적은 내 소원풀이의 방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과 나와의 독대’입니다.
금식의 목적을 예수님께서 잘 보여주셨습니다.
40일 광야에서 금식하신 후,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은 하나님의 복이 아닙니다.
사탄의 시험입니다.
그 시험에서 가장 중요한 진리를 뼛속에 각인하셨습니다.
그 진리는 곧,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나님을 어떤 경우에도 시험하지 말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사 58:9)
금식함으로 바늘 끝처럼 팽팽해진 정신으로 하나님과 독대합니다.
고파오는 배를 통하여 우리들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는 것이 내 삶의 멍에가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손가락’, 사람을 향한 비판과 원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 깨닫습니다.
‘허망한 말’ 종교행위로 하나님의 눈에 들어 복을 받아보겠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것인지 깨닫습니다.
하나님과의 독대를 통하여 영혼이 깨어나고 하나님께서 뭘 원하시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여행지, 나는 하늘 본향을 향해 가는 순례자. 여행은 짐을 줄이는 것, 여행은 함께 서로
도우며 가는 것입니다.
금식은 뭘 더 얻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몸과 영혼을 가볍게 하는 가장 깊은 묵상입니다.
주린 배와 삶에 지친 영혼에 하나님의 기운과 은혜로 가득 채우는 잠시 동안의 휴식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을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마음을 만족케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발하여
네 어두움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사 58:10)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리하면 네 치료가 급속할 것이며 네 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라.”
(사 58:8)
한재순 할머니는 지난 12월 10일 명동성당 서울 대교구장실에 봉투 한 장을 내 밀었습니다.
그 안에는 1억 원짜리 수표 9장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분은 이미 한 수도원에 1억 원을 기부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이 세상에 나와서 잘한 일이 없습니다.”
남편과 함께 평생 채소와 쌀 장사를 하며 다섯 남매를 키웠습니다.
한 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할머니의 통장에는 이제 280만원만 남았습니다.
동행한 둘째 딸이 말합니다.
“전 재산을 기부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이틀 뒤인 지난달 28일에 본향인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팔십 여 년을 열심히 행복하게 씩씩하게 살다가 가신 것입니다.
가톨릭은 홈런을 치는데 개신교는 병살타만 당한다고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홈런타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의 순례자인 우리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나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케 하며 네 뼈를 견고케
하리니 너는 물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사 58:11)
이 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풍성히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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