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사야 60:1~7)

새벽지기1 2017. 10. 3. 10:09


지난주 초에 여수에 내려가서 인문학 강의를 하였습니다.
그 사람들에게서, 또 서울로 돌아와서는 몇몇 사람들에게서 자신들이 당면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들은 살 길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보다도 지친 심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별다른 방도가 있을 리 없는 저로서는 듣고 있는 수밖에 없었고,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사 60:1)

“네? 하루하루 사는 것도 힘겨운데, 일어나 빛을 발하라니요.”라는 소리가 절로 나옵니다.

현재 처해있는 상황도 힘듭니다.
하지만 당시 바벨론의 포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일이 힘에 부쳤고
무엇보다도 소망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일어나 빛을 발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며 영웅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 또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몰라도 한참 모르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께서 모르실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사 60:2)
하나님께서 어두움이 얼마나 심각한지, 또한 그 어둠이 더욱 짙어지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모두에게 일어나 빛을 발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평범한 사람들도 일어나 빛을 발할 수 있는 길, 살 길이 분명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이 뭘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요?
그 답이 2절 이하에 나와 있습니다.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입니다.

‘오직’ 단 하나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께서 내게 임하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임하시면 나는 일어설 수 있고 빛을 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매달립니다.
밤낮없이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에 몰두합니다.
없는 시간과 힘을 짜내 헌금도 열심히 하고 전도와 봉사도 합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내게 나타난 것 같지 않습니다.
뭔가 근본적으로 크게 잘못된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뭐가 잘못된 것일까요?

극작가이자 언론인인 얼 쇼리스는,
어느 날 뉴욕의 한 중범죄자 교도소에서 비니스라는 여죄수와 마주 앉았습니다.
그녀에게 “사람들은 왜 가난할까요?”라고 질문하였습니다.
얼 쇼리스의 뜬금없는 질문에 그녀는 한참을 경멸하듯 노려보다가 마침내 입을 열었습니다.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도덕적)인 삶(the moral life of downtown)이 우리에겐 없기 때문이죠.”

얼 쇼리스는 한방 얻어맞은 것 같이 잠시 멍했습니다.
The moral life of downtown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침과 저녁으로 출퇴근하는 서울 시내에 넘쳐나는 세련된
사람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이들은 각자 전문 분야의 고등 교육뿐만 아니라 예술과 문화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습득하고

사회 여러 중추기관의 일환으로 일을 합니다.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인 삶’의 토대는 인문학이라고 결론을 내린 쇼리스는 1995년
노숙자, 중범죄자들을 대상으로 정규대학 수준의 인문학 강좌인 “클레멘트 코스”를 만들었습니다.
희망도 없는 그런 사람들에게 웬 인문학이냐 라는 비아냥과 싸우며 첫 1년 코스를 마쳤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료자 대부분이 정규대학에 진학했으며, 1회 졸업생 가운데는 치과의사가 2명, 철학박사, 간호사,
패션 디자이너, 영문과 교수 각 1명씩을 배출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얼 쇼리스가 말합니다.
“클레먼트 코스에서는 매일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토록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며 간구했음에도 기적이 잘 일어나지 않는데,

인문학 강좌에서는 기적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이 답이란 뜻일까요?

그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여전히 복음이 답입니다.
하나님의 복음은 영원한 궁극의 답입니다.

그런데 인문학 강좌에서 기적이 일어나는 이유를 잘 파악하면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오류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잃고 거리의 노숙자가 되고, 감옥의 중범죄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한 미술과 철학과 문학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귀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강의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성찰하게 됩니다.
생각 없이 얼마나 하찮게 살았는가 깨닫게 됩니다.
세상에는 돈보다 소중한 것이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예술과 본질과 삶의 궁극적 질문에 관심을
두며 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대로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서 꿈틀대기 시작합니다.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일어섭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인 거리와 감옥에서 일어섭니다.
길을 갑니다.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갑니다.
모든 것을 이기고 의사가 되고 교수가 되고 전문인이 됩니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만으로도 다른 이들에게는 이미 소망의 빛입니다.
“아,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생각이 멈춘 사람들을 깨웁니다.

그들은 답도 없는 인문학 강의를 듣고, 거리에서 감옥에서 일어나는데,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생명이요 빛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편안한 집에서도 일어나질 않습니다.
여전히 걱정과 안일로 내 마음을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사야서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열과 성을 다한 종교행위라도 그것은 그저 성전 마당만 밟는 것이며, 맹목적인 종교행위는
아무런 능력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천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 교회에서,

잘못된 목적으로 십일조를 강조하고 그것도  모자라 일천 번제를 독려하고,

전도와 봉사를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문을 활짝 열어주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저 눈앞의 이득에 급급함으로, 또 생각이 멈춰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문도
보질 못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를 두고 탄식합니다.

“우리가 곰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같이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 멀도다.”(사 59:11)

“우리가 소경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으니라.”(사 59:10)
강장하다는 ‘아쉬마님’으로, 죽은 자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게 죽은 자를 의미합니다.

주봉이 아버지는 환경미화원이었습니다.
학교 친구들은 “봉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고 놀렸습니다.
그러나 주봉이는 미소만 지었습니다.
주봉이는 효자였습니다.

어느 해 겨울 주봉이 아버지가 거리 청소를 하다가 크게 다쳤습니다.
주봉이는 6개월 동안 아버지 일을 혼자 해냈습니다.
가난한 주봉이는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직업 전선에 나갔고 이후 연락이 끊겼습니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어른이 된 주봉이가 친구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는 관록과 품위가 넘쳤습니다.
주봉이는 잔잔한 목소리로 지난 세월을 말해 주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동네 건물 청소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그의 성실함이 소문이 나기 시작하고 그에게 여러 채의 건물 청소가 맡겨졌습니다.
지금은 대형 빌딩 50여 개를 청소하는 청소 용역회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몇 달 뒤 주봉이의 사진이 신문에 실렸습니다.
환경미화원 자녀들에게 매년 장학금을 주는 공로로 상을 받았다는 기사였습니다.

주봉이는 가난과 어두움에서 일어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따뜻하게 밝히는 빛입니다.

종교행위를 독려하는 교회나 그 뜻도 모른 채 무작정 매달리는 교인들은
소경이 담을 더듬으며 이제나저제나 하나님의 복이 올까 기다리는 사람들이며,
인문학 강좌로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나는 노숙자들이나 중학교만 나온 주봉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불쌍한 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엊그제 50대의 한 여집사로부터 시력을 점점 잃어간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일종의 면역 결핍으로 생긴 병인데, 심신이 약해져서 조금만 과로해도 증상이 악화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세월인데, 그저 조심하고 기도한다고 될 일도 아니고,
끝내는 실명할 텐데.”
이대로는 절대로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어 만사를 제쳐두고 근본부터 철저히 성찰하고 개혁하라고, 눈을 크게 뜨고
살 길을 찾으라고, 반드시 보일 것이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산야초 동호회가 발전하여 생명공동체로 발전하기를 소원합니다.
뜻이 맞는 사람들이 모여서 힘을 모아 건강한 농산물과 식품을 생산하고 우리 교우들이 소비하는
생명 공동체.
그래서 이 답답한 도시 생활에서 심신이 지친 사람들이 협동과 노동을 통해 회복되는 생명
공동체를 세워주시기를 바랍니다.
여유 있는 교우들은 땅도 빌려주고 기금도 마련하여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자립하여 더불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합시다.
교회가 있는 힘껏 돕겠습니다.

몇 분에게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서울 근교에서 유기농 먹거리와 밑반찬 등을 생산하고,
교우들은 매달 일정 액수를 내고 구입을 합시다.
예를 들자면
한 달에 20만원을 모아서 보내면 100가정이면 2,000만원 1년이면 2억 4천만 원입니다.
매주 생산하는 농산물과 먹거리를 주일마다 가져오거나 택배로 부칩니다.
이런 시스템을 가동하면 여러 가정이 살아납니다.
또 공급받는 교우들은 유해 농산물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교우들이 모인 자리에 가면,
너무나 가까워 십년지기 친구인가 해서 물어보면 교회에 와서 친해졌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우리 교회의 가장 큰 자산은 바로 ‘신뢰’입니다.
정성 다해 더욱 굳게 신뢰를 쌓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소중히 여기며 열심히 쌓아가야 합니다.
저도 신뢰를 쌓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이 신뢰를 바탕으로 너도나도 행복하게 사는 일들을 계속 만들어가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을 받고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외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행 2:17)

“그가 누구이든 성령을 받고 하나님의 꿈을 꾸리라.”
이 말씀이 신약교회의 출발을 알리는 나팔소리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매달려 소원을 비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꿈을 꾸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꾸는 것이 곧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구체적으로
응답하는 것입니다.

혼자면 언제나 생각에서 끝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함께라면 행동으로 옮길 수 있고, 반드시 결실을 맺게 됩니다.

사람들이 모이면,
형통한 사람들은 자기 자랑을, 곤궁한 사람들은 신세 한탄으로 함께 어두움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은 모이면 하나님의 꿈을 꾸고, 마음을 모으고 아이디어를 모으고 힘을 모으기를 바랍니다.
형편이 좋은 사람들은 기도와 후원으로,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은 앞장서서 살 길을 마련하십시오.
요즈음 정부와 지자체에서도 사회적 기업에 대한 지원이 많습니다.
적극 알아보고 지원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교회에도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그런데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새기고 새겨야 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하며 우리 하나님을 좇는데서 돌이켜 포악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발하니,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사 59:13-14)

하나님의 선한 뜻,
모든 사람들을 살리려는 마음과 더불어서 행복하게 살려는 마음을 나 또한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풍성하게 공급하시며 반드시 하나님의 꿈을 실현시켜 주심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 마음만 견지하면 포악과 패역과 거짓말은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 됩니다.
언제나 함께 하는 사람에게는 공평과 의를 행하며, 자신의 이득보다는 공동의 이익을 우선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성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길을 열어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공평과 의, 성실과 정직을 어떤 상황에서도 계속 견지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길은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
이 마음과 이 자세를 견지할 때 그 길이 보입니다.
죽은 것도 살려내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연히 임합니다.

음악의 역사를 연구한 어니스트 뉴먼에 따르면, 역사상 위대한 작곡가들은 영감이 떠오른 뒤에
작곡을 한 것이 아니라, 작곡을 하면서 영감을 떠올렸다고 합니다.

일상생활도, 사업도 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태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일어나 빛을 발하기로 작정하고 떠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지혜와 영감을 주십니다.
일을 시작하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뜻하지 않는 조력자들이 나타납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행운도 어디선가 튀어나옵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들입니다.

“열방은 네 빛으로, 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사 60:3-4)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사 60:7)

우리 포이에마 예수교회로 오면 반드시 살아난다는 증거를 우리들이 보여줘야 할 때가 드디어 도래하였습니다.
그래서 포이에마 예수교회에 오면 반드시 살아난다는 것을 우리들이 함께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빛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