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진짜 경건 (야고보서 1:19~27)

새벽지기1 2017. 11. 8. 06:49


김인수 씨는 세계적인 심리상담 학자로서, ‘해결중심모델’이란 새로운 문제 해결방법을
창안하였고, 그녀의 이 모델은 지금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문제점을 파악하여 그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집중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해결중심모델은, 잘못된 문제점에 파고드는 대신, 긍정적인 면을 더욱 강화시켜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자면, 영국의 자동차 수리 서비스 회사인 비피 프로케어(BP procare)의 소비자
만족도가 79%에 그친다는 결과를 개선하기 위하여, 불만족한 21%에 대해서 철저히 분석한 뒤
그 결과를 회사에 발표하였습니다.
그러자 문제점에 대해서 서로 비난하거나 책임을 미루는 경향을 보였고 만족도는 오히려 더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비스에 만족한 79%에 대해서 분석한 뒤, 그것을 확산시켜나가자 소비자의
만족도가 급격히 높아졌습니다.

국제 구호단체인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에서 일하는 제리 스터닌은,
1990년에 베트남에 파견되어 최소한의 자원으로 6개월 안에 어린이들의 영양실조를 퇴치해야
하는 힘든 업무를 맡았습니다.
예산, 자원 및 위생설비, 주민들의 인식 부족 등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니었고, 그 문제들은
너무나 커서 해결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제리는 현지에서 의미있는 성공 사례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어린이들 중에 건강해 보이는 통통한 아이들을 발견하였고 그 어린이들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서는 논에서 잡은 작은 새우와 게를 고구마 잎과 함께 밥에 섞어 먹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거다!”는 생각과 함께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새우와 게, 고구마 잎으로 요리를 만드는 프로그램을 확산시켰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6개월 만에 65%의 어린이들의 건강상태가 개선되었고, 제리가 떠난 뒤에도 계속 나아졌습니다.

새해부터는 부정적인 문제점을 복잡하게 나열하는 일은 그치기로 합시다.
대신 작지만 의미있는 일, 실현 가능한 밝은 점들을 찾고 발전시켜 나가면 각 개인이나 우리들도
큰일을 이루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입니다.
복잡한 것을 한순간에 가장 간단하게, 그 본질을 드러내시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제시하십니다.
그래서 그 본질을 깨닫고 천천히 따라가노라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변화들이 일어납니다.

성경을 통독하신 분들은 다 압니다.
레위기가 가장 넘기 힘든 산입니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제사법이 끝도 없이 나열되기 때문입니다.
제사가 많은 집에 시집을 가면 골병이 듭니다.
조상님께 드리는 제사가 아무리 복잡해도 레위기에 기록된 제사와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안식일이나 월초, 그리고 각종 절기에 제사법에 맞춰 드려야 하고,
속죄제, 속건제, 화목제, 번제, 소제 등등 제사도 많지만 신분이나 재산 정도에 따라서도 각각
그 제사법이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1,500년간 행해졌고, 행하지 않으면 큰 질책과 징계를 각오해야 했던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구약의 제사가 일순간 효력을 잃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너무나 기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으로 드린 이 제사를
“한 영원한 속죄제사(The single sacrifice for sins)”(히 10:12)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정말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왜 예수님은 복잡한 것을 간단 명료하게 해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를 그저 편하게 해주시려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내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그 사실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아
이 땅에서는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어서는 천국에 가는, 최고로 간단한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가장 값싼 것으로 제사를 제정해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 채 무작정
행하므로 생명과 시간과 에너지를 엉뚱한 곳에 탕진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각자의 생명과 시간과 에너지를 하나님의 뜻에 맞는 합당한 곳에 사용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가 가장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이 말은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가야 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하나님 앞에서는 즉시 죽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죄도 용납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지은 죄들을 헤아려 보고 그에 해당되는 동물을 나대신 죽여 속죄제사를 드린 후에
하나님 앞으로 나갔습니다.
너무나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모든 속죄제사를 대신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속죄제사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영원히 온전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느니라.”(히 10:18)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더 나가야 합니다.
그것은, 제사에 드릴 정성과 비용과 에너지로 중요한 어떤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요한 일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3-25)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 그것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는 도리”입니다.
“소망을 굳게 잡으라”는 것은,
이런 일 한다고 뭐가 달라질까 라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우리들은 주일 날 하루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우리를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이라고 폄하합니다.
새벽기도회, 구역예배, 수요예배, 금요 심야예배 등등 열심히 모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말씀 전체의 맥락을 보아야 합니다.
즉 그렇게 모여서 무엇을 하느냐를 물어야 합니다.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뭘 서로 권하고 더욱 열심히 행하라는 것일까요?
그렇게 모여서 계속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신약의 예배는 곧 구약의 제사입니다.
일주일 내내 모여서 예배에 목숨을 걸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간단 명료하게 만드신 것을 또다시 복잡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더욱 모이기에 힘써서 해야 할 일은,

바로 “소망을 굳게 잡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일”입니다.

이 긴 설명을 오늘 본문에서는 간단하게 이렇게 천명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라.”(약 1:27)

‘진짜 경건’은,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고, 동시에 자신이 세속적인 욕심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 고귀한 목숨을 버려 복잡한 구약의 제사를 폐하신 이유는,
우리로 ‘진짜 경건’에 힘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가짜 경건’은 어떤 것일까요?
2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구절은,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입니다.
이 말은 말조심하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런 뜻이 아닙니다.

경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드레스코스(dreskos)”입니다.
이 말은 ‘드레오마이’에서 유래하였는데, 그 뜻은 ‘기도문을 중얼거리다’입니다.
비아냥거림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그러니까 여기서 말하는 경건은, 겉으로 꾸며낸 ‘헛된 경건’으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다’는 것은 주문을 외우듯이 뜻도 모른 채 중언부언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속은 시커멓습니다.
바리새인을 생각하면 쉽게 상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을 향해 “돈을 좋아하는 자”로서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마 23:25)고 책망하셨습니다.
곧 “자기 마음을 속이는 것”입니다.
이런 ‘헛된 경건’이란, 한 마디로 ‘그래 봤자’ 아무런 득이 없다는 것입니다.

진짜 경건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첫째로 해야 할 일,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약 1;21)고 말합니다.

여기서 키워드는 ‘온유함’입니다.
온유함이란, 그저 순하고 착한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아나우’는,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킨다는 의미입니다.
내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존재와 그분의 가르침으로 바꾸는 것,
즉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을, 거울을 보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당시 부자는 청동거울로, 보통 사람들은 꼭 봐야 한다면 대야에 물을 떠놓고 자기 모습을 보았습니다.
요즈음 거울과는 달리 정확한 모습을 볼 수가 없으므로 대충대충 보았습니다.
그래서 쉽게 잊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하여 습관처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온유함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으면 행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합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26)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란 표현은 많은 비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이지 율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직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종교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마르틴 루터는,
이런 구절들을 들어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 폄하하며 신약성경에서 빼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말하는 바는,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 중 핵심입니다.

너무나 간단하고 명료한 교리입니다.

원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영이 죽어서 영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잊어버렸고, 또한 잃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죽은 영을 살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의 죽은 영이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야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었고,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인간 부모도 자기 자녀를 지옥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지옥으로 보내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시간과 생명을 탕진해도 될까요?
네, 됩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어리석고 연약하고 사악하고 유한한 존재이므로 그렇게 산다면, 악한 영의 미혹에
빠지게 마련이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반드시 잊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제 발로 타락으로 파멸로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여기에 예외란 없습니다.

시간과 생명과 재산까지 탕진한 아들이 그 사실을 깨닫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런데 아버지로부터 무서운 벌을 받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눈이 빠지게 아들을 기다리던 아버지가 한걸음에 달려와 돌아온 아들을 덥석 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셨습니다.

돌아와서 또 빈둥댑니까?
그렇다고 경찰을 부르지는 않습니다. 내쫓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실망과 걱정은 이만저만 아닐 것입니다.

돌아온 아들이 해야 할 일은 딱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자녀답게’ 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헤아리며, 기쁘게 열심히 그 뜻을 행합니다.
그 자녀를 보시는 아버지가 얼마나 흐뭇하시겠습니까?
더 잘하라고 좋은 아이디어도 주십니다.
영감입니다.
필요한 것은 뭐든지 내주십니다.
기회와 재능과 사람과 자원입니다.

그것을 야고보 사도가 간단히 말합니다.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야고보 사도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간단히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이것이 복 받는 비결 중 비결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