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야고보서 4:1~10)

새벽지기1 2017. 11. 17. 07:05


사관생도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꼿꼿한 자세, 절도 있는 행동, 눈만 보이게 쓴 모자 등등.
이런 것을 사관생도들의 ‘스테레오 타입’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인들 하면 떠오르는 스테레오 타입은 무엇입니까?
우리들 자신은 잘 모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개그맨들이 기독교인들의 스테레오 타입을 희화화하고 있습니다.
손을 높이 들고 열광하며 “할렐루야!” “믿쑵니다!”를 외치거나.
두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몸을 앞뒤로 흔들며 열심히 기도합니다.

기독교 방송에 출연하는 사회자나 출연자들을 보면 거의 대동소이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처음에는 몰랐는데,
지나고 나서야 모두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러면 사회자는 너무나 공감한다는 표정으로 살짝 미소를 띠면서 맞장구를 칩니다.
복음성가를 부르는 프로그램을 보면 출연한 사람들의 표정이나 멘트가 판에 박은 듯 똑같습니다.

이러한 스테레오 타입은 왜 생기며, 이러한 것은 과연 바람직한 현상일까요?

물론 지휘 계통에 따라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군인들에게는 필요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금방 답이 나옵니다.
당이 정한 규칙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튀었다가는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해바라기처럼 김씨로부터 내려오는 방침과 인정만을 바라봅니다.
그러는 동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주신 개성과 창의성은 실종되고 생각은 멈춰버립니다.

기독교인들의 스테레오 타입은 1980년도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980년도 이후의
우리나라 최대 화두는 ‘번영’이었습니다.
목사들은 번영을 하나님의 복으로 제시하며, 성경말씀을 복 받는 공식으로 가르쳤습니다.
그러자 복 받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수천, 수만 명이 모이는 대형교회들이 등장하였고 목사는 하나님과 거의 대등한 위치까지 올랐습니다.
그런데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특정한 사람과 몇 가지의 규칙에 반응하다보면 인간은 생각이 멈추고 획일화되기 마련입니다.

오늘날의 획일화된 기독교인들의 태도와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실까요?

필립 얀시는,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 실망했다고 아우성을 칠까요?
하나님은 내게 불공평하셨으며, 내게 침묵하셨으며, 언제나 숨어계셔서 내가 원하는 바를
이뤄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내가 번영에만 초점을 맞추는 한 획일화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께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무리(無理)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무리란, 생각이 멈춘 사람들, 생각이 없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오직 번영을 바라며 부르짖는 사람들이 바로 ‘번영’에서 생각이 멈춰버린 무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갈렙, 삼손, 드보라, 기드온, 사무엘,
요나단, 다윗, 엘리야, 다니엘, 이사야, 예레미야, 베드로, 사도 바울 등등.
그들에게서 획일화된 스테레오 타입 같은 것을 절대로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우리들처럼 보통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 전심으로 반응하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각자의 색깔대로
아름답게 꽃을 피우고, 서로 다른 풍성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제발 잊지 마십시오.
인간으로서 해야 하는 가장 위대한 일은, 상대방의 가치를 알아보고 가장 그답게 살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일입니다.
20세기의 예언자로 일컫는 마르틴 부버의 말입니다.

우선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나만의 가치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가장 나답게 살아야 합니다.
가장 나답게 사는 것은 내 기분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나만이 드릴 수 있는 가장 독특한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를 간절히 바라시면서 하나님은 오늘도 숨어계시며 침묵하십니다.

야고보 사도가 말합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야 4:2-3)
이 말씀만 보면 기도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뭔가 부족하고 필요한데, 그러나 쉽게 얻지 못합니다.
그 이유를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부르짖어 기도하라고, 그렇게 해서 응답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려주며 교인들을 독려합니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며 구합니다.
그런데도 기도가 부족한 것일까, 응답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드물거나, 또한 응답받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열심히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까 주시지 않는 것도 하나님의 응답임을 알았습니다.”
신앙 좋은 사람들이 하는, 흔히 듣는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저는 속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그걸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고서야 알게 되었어요? 처음부터 알아야지.”

또한 열심히 기도하는데도 응답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는 말씀을 듣고는,
자신의 기도 내용을 점검해 보고 말을 바꿉니다.
“하나님, 제 사업이 망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흥하게 해주세요. 제발!”
하지만 아무리 말을 바꿨다고 해도 내 기도의 내용은 내 사업 성공입니다.

사업이 부진한 이유는 기도가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시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준비가 안 되었거나 상황판단을 잘못했다거나 내 노력과 능력이 모자랐거나, 다른 여러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제발 하나님을 조폭 두목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은 흥하게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망하는 그런 분이 아닙니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에 쓰려고 구함이니라.”는
말씀은, 기도의 공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음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묻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야고보서 4:1-2)

아무리 열심히 구해도 정욕, 즉 이기적인 목적으로 구한다면, 결코 얻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욕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서로 차지하겠다고 열심히 싸우고 시기하고 살인까지 하여도 결코 얻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살인은, 실제 살인을 포함하여 남을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을 말합니다.

번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만, 삶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되고, 생각이 돌기 시작하고 새 길이 보입니다.
그때 비로소 무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고보 사도가 뜬금없는 말을 합니다.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약 4:4)

위에서 언급한 ‘정욕’이라는 단어는 ‘성욕’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말씀은 남녀 간의 불륜으로 인한 다툼에 관한 것이 되고,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말이 됩니다.

‘간음한 여인’에 해당되는 헬라어는 “모이칼리데스”로 이 단어 자체가 여성 명사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바람피우는 유부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천 년 동안 바람피우는 주역은 단연 남자들이었습니다.
그런 남자들은 괜찮고 그런 여자들은 책망할 야고보 사도가 아닙니다.
여성 명사 모이칼리데스를 ‘간음한 여자’로 번역한 것은 잘못이며, 다른 뜻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신을 섬기는 것을 ‘간음’이라고 하였고,

여호와 하나님을 바알처럼 섬기는 것을 ‘간음하듯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바알신은 번영과 풍요의 신입니다.
그러므로 ‘모이칼리데스’는 하나님을 바알신처럼 섬기는 사람들, 세상의 번영과 풍요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섬기는 “기복 주의자”들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것”(약 4:4),
“두 마음을 품은 자”(약 4:7)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번영만을 바라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복주의자들은,
세상과 벗 되는 것으로 두 마음을 품은 간음한 여인과 같으며,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한다고 해서 번영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실망을 넘어 통한과 비애를 느끼십니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찌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찌어다.”(약 4:8-9)

그런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슬퍼하며 애통하며 회개할 것을 촉구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어 이렇게 부자가 되었다고 웃고 즐거워 할 것이 아니라,

근심하고 애통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 귀족으로
초대 교회 장로가 된 플리니(Pliny the Elder, 23-79)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로마인이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수 없게 되자 큰 건물을 만들었다.”
로마가 최고의 전성기를 누릴 때 자신의 조국에 대해서 한 말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만이 가지는 놀라운 통찰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로마인들이 번영만을 추구하자 창의력과 상상력을 상실하였고,

그저 과시를 위한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영원할 것 같던 로마는 망했습니다.

전혀 새로운 시대가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보지 못했던 시대입니다.
현재 스위스 다보스에는 영원할 것 같았던 자본주의의 갈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번영만을 추구하던 자본주의가 탐욕으로 오염되고,
그 결과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벽에 부딪힌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로 가야하나?

오늘 주목해야 하는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약 4:5)는 말씀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시기하기까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출 20:5)이십니다.

“그것(우상)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5)

우상은 부처상이나 조상님 위패 같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자리에 앉아있는 모든 것,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곧 우상입니다.

폴 틸리히의 말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 곧 우상이다.

우상은 반드시 우상숭배자들을 악마적인 힘으로 파괴해 버린다.”
건강이 우상인 사람은 건강으로 인하여, 권력이 우상인 사람은 권력으로 인하여,

목회성공이 우상인 목사는 바로 목회성공으로 인하여 파괴된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될 생각을 버리라면 가난하게 살라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삶의 목표가 부귀영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말씀”은 헬라어로는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투스에 따르면, 모순과 대립을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순과 대립을 연결시킵니다.
긴 막대기가 있습니다.
양 끝을 줄로 팽팽하게 연결시키면 두 종류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는 자신을 지키고 남을 죽이는 활.
다른 하나는 사람들을 춤추게 하는 하프입니다.

수천 년 동안 인류는 자신만 높아지고 강해지기 위한 활만을 만들어왔고,
설사 하프를 만들었어도 유명해지기 위해서 연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더불어서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 생각으로 공부하고 직업을 구하고 일 하십시오.
이것이 사랑의 하나님의 뜻입니다.
자연히 길이 보이고 열립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찌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번영에 집착하는 한, 아무리 기도해도 마귀는 계속 따라 붙습니다.
그러나 더불어서 함께 춤추는 세상으로 만들 생각을 하는 순간,

분열의 영 마귀는 대적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연히 꼬리를 내리고 자취를 감춥니다.

자신을 높이겠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주 앞에서 자신을 낮추면 하나님께서 최고로 높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