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죄 아래 있는 사람들 (로마서 3:1~9)

새벽지기1 2017. 12. 4. 07:27


미국의 극작가 테네시 윌리암스의 희곡 [올훼]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여주인공 “레이디”의 아버지는 양조장과 큰 과수원을 경영해서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거대한 저택에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며 행복하고 풍요롭게 살아가던 어느 날,
한 난폭한 젊은이가 과수원에 불을 질러 집이 불에 타고, 레이디의 아버지도 불에 타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남게 된 레이디는 훗날, 제이브라는 한 젊은 청년을 만나 결혼을 했습니다.
오붓한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남편 제이브가

과수원에 불을 지르고 아버지를 죽인 살해범이란 것을 나중에 알게 됩니다.

그때부터 남편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에 불타는 레이디는,
남편 제이브를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제이브가 불치의 병에 걸려서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레이디는 매일 신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제이브를 돌봐주지 않고 그대로 방치하여 죽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아버지를 죽이고 가정을 파멸로 이끈 저 남자는

어떻게든 고통스럽게 죽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런 아내의 모습을 보다 못한 제이브는 

결국 권총으로 아내를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립니다.

테네시 윌리암스가 말하고 싶은 것은 누구의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죄로 인하여 파멸되어 가는 모든 인간의 아픔과 비극을 깨닫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마음 깊숙한 곳에 이런 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드러나 자신과 남을 괴롭히고 파괴합니다.

사도 바울은,
1장에서 헬라인으로 대표되는 모든 인간이 지닌 죄성을 고발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그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입니다.

2장에서 유대인의 죄악을 고발하였습니다.
유대인은 헬라인들에 비하여 대단히 도덕적이었고 종교적인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죄인들입니다.

그들의 죄성은 오히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데서 기인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심이 그들의 죄성의 원인이라는 것은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굉장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이란, 단순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정복하고 박멸되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유대인의 지혜를 모아놓은 책 탈무드에,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을 사람의 모습으로 만드신 이유는 그들을 종으로 부릴 때 혐오감을
느끼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유대인의 자만심은 대단하였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오로지 전도의 대상으로 보고 타 종교인들은 타도의 대상으로 봅니다.

사도 바울이 말합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는 그 특권이
오히려 그들에게 올무가 되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보다 더 큰 죄를 지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결론적으로 말합니다.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아니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롬 3:9)

구체적으로 어떤 잘못을 범하고 있는가를 살펴봅니다.

첫 번째 잘못은 무엇일까?
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지만물과 인간의 창조,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열심으로 구원의 약속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오늘도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고 지적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다 믿는 것은 아닙니다.
내 입맛에 맞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약속이 파기되거나 취소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미쁘심이란 말은
하나님은 믿을만한 분이며, 신실하셔서 한 번 정하신 것은 변동이 없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잘못은,
5~8절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잘못을 저지르면,
오히려 하나님의 의가 더 두드러지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거다.
그러므로 그런 나를 벌주신다면 하나님이 잘못된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궤변입니다.

문선명 통일교도들이 주장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또한 예수님을 배반하고 은 삼십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가 없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일이 어떻게 가능했겠느냐?
그러므로 가롯 유다는 하나님의 계획에 큰 역할을 한 것이 아니냐?
그러므로 가롯 유다를 벌하는 것은 하나님의 불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불의하실 리가 없다.
그러므로 예수 십자가의 죽음은 그저 제자의 배신의 결과일 뿐이지,
이것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런 궤변도 있습니다.
7절 말씀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내가 죄를 지음으로써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지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면,
내가 왜 죄인이냐는 항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더 드러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더욱 열심히 죄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유대인들은 갖은 핑계를 대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겼던 사명을 등한히 하고, 자신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모세에 의해
율법을 받은 선민이요, 의인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개념조차도, 궤변조차도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저 예수 믿고 세례 받고 교회 다니면 다인 줄로 아는 것이 아닙니까?

사도 바울이 결론처럼 말합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말씀 앞에서 각자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중국이 개방되기 전의 일입니다.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 스파이 한 명을 체포하였습니다.
오랫동안 CIA의 의심을 받고 있었는데, 결정적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생긴 것은 백인 남자, 영어는 완벽하였고, 제스처도 전형적인 미국인이었습니다.

유럽 여행 중인 그를 추적하면서 한 정보요원이 테스트를 하였습니다.
시내버스 속, 그 사람 옆에서 휘파람으로 미국 국가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중국 국가를 휘파람으로 불렀습니다.
그랬더니 한번 흘깃 쳐다보았고, 계속 휘파람을 불자 낮은 소리로 흥얼거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체포되었습니다.
완전한 미국인으로 가장하였지만, 혈관 속에는 중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뇌와 모방과 훈련에 의해서 얼마든지 겉모양은 그리스도인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사도 바울은 “표면적 그리스도인”(롬 2:28)이라고 부릅니다.

표면적 그리스도인의 반대는 “이면적 그리스도인”(롬 2:29)입니다.
속까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이 되기로 합시다.
예수님의 피로 행하는 진짜 세례로 받아들이며,
내 생각과 논리로 예수님의 가르침을 왜곡시키지 않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내 삶에서 예수님의 생각과 행동이 저절로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행하려고 애쓰는,
겉과 속이 점점 일치하는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마음에 새겨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유대인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굉장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의 말로 바꾸면,
“그리스도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세례의 유익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또 유익이 무엇입니까?

나은 점이 있습니까?
유익이 있습니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예수님을 믿은 다음, 불치병이 나았습니다.
나쁜 습관을 끊었습니다.
생의 목표를 찾았습니다.
참 행복을 알았습니다.
절망과 슬픔을 이겼습니다.
정직해졌습니다.
성실해졌습니다.
가정이 화목해졌습니다.
신뢰와 존경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것들입니다.
너무나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는 구약 백성인 유대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겼습니다.
그랬더니만 그 말씀을 믿고 순종해 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남에게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 말씀을 죽은 의문, 즉 율법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신약 백성인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말씀’ 곧 “예언(預言)”입니다.
이 예언은, 소위 기도하는 사람들이나 점쟁이들이 행하는 예언(豫言),
앞날을 점쳐주는 예언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우리들에게 맡기셨을까요?

은행에 돈을 맡깁니다. 예금을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맡깁니까?
가장 먼저 내 자신을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불신앙과 궤변을 버립니다.
말씀을 사모하여 배우고 익히며, 행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요 1:1)
천지만물 온 우주와 우리들을 지으신 하나님이 말씀을 아멘으로 받을 때 들어오십니다.
당연히 살아납니다.
생명의 원천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이 사라집니다.
어두움의 세력이 맥을 못 추고 물러납니다.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부모나 목회자나 교인들의 불의로 인하여, 겉과 속이 다른 것으로 인하여,
교회를 떠난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에 대한 실망을 넘어 무서운 적개심까지 보입니다.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외에는 정말 답이 없다는 것을,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절감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잘못된 믿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외면당하고 복음은 설득력을 잃고,
교회는 강도의 굴혈로 변했습니다.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하셨습니다.(사 55:1)
포도주와 젖은 우리 생명에 필수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능력과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데 돈 없이 사라 하셨습니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살 수 있습니까?
사라는 것은 곧 ‘청종하라’는 것입니다.
청종한다는 것은 ‘듣고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사들은 이 생명의 복음을 복 받는 비결로 상품화하고 비싼 값으로 팔았습니다.
그 비싼 값이란, 밤과 낮이 없는 종교행위와 넘치는 헌금입니다.
‘행한다’는 것은 종교행위를 행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로서 우리들이 정말 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여 잘되는 모습을 자녀들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랄프 왈도 에머슨이 말합니다.
“무엇이 성공인가?
그것은 한 뙈기의 땅을 가꾸든, 나라를 통치하든, 자기가 태어나기 전보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 놓고 떠나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은행에 맡긴 돈은 남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쓰여집니다.
그러므로 두 번째, 다른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가르쳐야 할 일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예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위대한 사명(The Great Commandment)입니다.

덴마크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비옥한 땅을 빼앗기고 불모의 땅만 남았습니다.
절망에 빠진 덴마크를 일으킨 사람은 그룬트비입니다.
그는 덴마크 중흥의 아버지로 불리며, 89세 나이로 임종을 맞았을 때, 온 국민이 슬퍼했습니다.

그는 원래 목사였습니다.
신학교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수석으로 졸업하여 교만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교회 지도자들이 그런 그를 조그만 섬의 교회로 파견하였습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며 우울증에 시달리며 목회를 하다가 42살에 성령체험을 합니다.
자신의 교만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황폐한 조국과 희망을 잃은 백성들을 살리는 일에 매진하기로 결심하고,
그 작은 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나갔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가 평생 동안 외친 세 가지 구호가 있습니다.
“덴마크 국민들이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덴마크 국민들이여 조국을 사랑하라.
덴마크 국민들이여 이웃을 사랑하라.”

황폐한 조국을 중흥시키기 위해
65세의 늦은 나이에 코펜하겐 시의원으로 출마했을 때의 일입니다.
무소속으로 출마한 그는 56표의 근소한 차로 낙선합니다.
시민들이 너무 아쉬워하였습니다.
그러자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룬트비를 제치고 당선된 의원이 자진 사임을 한 것입니다.
보궐선거를 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입후보자들이 전원 사퇴해버렸습니다.
그렇게 무투표로 당선된 그는 국가와 국민들을 위해 전심을 다해 일했고,

오늘날의 최고 복지 국가 덴마크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존경받는 리더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사로운 이익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자신의 삶을 통하여 세상에 보여주기로 합시다.

그래서 복음만이 유일한 대안이며 생명의 길임을 증명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존경과 신뢰를 회복하는 주역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