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너무나 사랑하시기에 (로마서 3:20~27)

새벽지기1 2017. 12. 7. 07:24


나이 드신 분들은 김대두란 사람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연쇄 살인범입니다.
1975년 십수 명의 무고한 생명을 없앤 흉악범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기독교인이 되어 과거를 깊히 뉘우치고,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의 바람에 따라 그의 장기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식되어 여러 생명을 구했습니다.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회개하면 천국에 간다는 기독교의 교리를 말도 안 되는 것이라며
비판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믿을 수 없으며, 기독교인들의 오만함이 그 황당한 교리로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그 교리에서 가장 결정적인 것 하나를 잃어버림으로써 그런 비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잃어버린 그 하나를 찾아 갈 것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젊은 비젠탈은 폴란드 출생 유대인으로 죽음의 수용소에 갇혔습니다.
그가 당한 고초는 필설로는 다 할 수 없는 참담한 것입니다.
부모를 포함한 89명의 가족과 친척들이 나치에 의해 죽어가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습니다.
수용소에서 모진 목숨을 부지하며 살아가던 그에게 어느 날 독일 간호사가 다가와 머뭇거리며
“유대인이세요?”라고 묻더니 손짓으로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따라 간 곳은 병실이었고, 거기에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신음하며 죽어가는 한 남자가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악명 높은 나치 친위대 장교였습니다.

홀로 남겨진 비젠탈에게 그 장교는, “제 이름은 칼입니다.”
고통을 씹으며 간신히 자신을 소개한 후 어렵게, 어렵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당신한테 끔찍한 일을 털어놓겠습니다. 당신이 유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저질렀던 잔인한 만행들을 자세히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젠탈은 참고 들어줄 수가 없었습니다.
세 번이나 뿌리치고 나오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그 장교는 떨리는 핏기 없는 손으로 그의 옷을
붙잡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길고 긴 이야기 끝에 장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가 얼마나 끔찍한 일인 줄 나도 잘 압니다.

죽음을 기다리면서 유대인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다 털어놓고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당신에게 너무 심한 부탁이 되리란 걸 잘 압니다. 그러나 당신의 용서 없이는 편히 죽을 수 없습니다.”

그의 말을 침묵으로 듣는 동안,
왜 자신이 이 이야기를 들어줘야 하는가 하는 깊은 회의에서부터 자기 민족의 고통과 나치에
대한 적개심, 복수심 등, 형언할 수 없는 생각들이 어지럽게 교차하였습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윽고 그는 마음을 정했습니다.
그리고는 조용히 일어나 말없이 그 방을 나와 버렸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비젠탈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병실에서의 그 장면은 유령처럼 그를 좇아다녔습니다.
그 기억을 떨쳐버리기 위해, 그 친위대 장교의 어머니까지 만났습니다.
그러나 들려주는 아들의 어린 시절 착하고 신앙심 깊은 추억들로 인하여 그 장교의 인간적인
모습만 더 부각되었고, 차마 그 아들의 마지막 순간을 들려줄 수 없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20년도 더 지난 후에, 그는 윤리 분야의 최고의 지성들에게 사연을 보내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당신이 나였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 이야기는 필립 얀시의 책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중에 기록된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니까?

사도바울은 3장에서,
모든 사람들은 죄인들이며 자신의 죄조차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고,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롬 3:13-15) 악인들이라고,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고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인정합니다.
그러나 언제나 나쁜 생각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일도 꽤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측은한 마음으로 도와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독사의 독과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피 흘리는 데 빠르다는 사도 바울의 비판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이 듭니다.

사도바울은 1장에서 많은 죄악의 내용들을 열거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 1:29-32)

누구나 부모님을 거역해 보았습니다.
뒤에서 쑥덕거려보지 않은 사람도 없습니다.
자기 자랑이 전공인 사람들도 흔합니다.
우리들이 일상에서 행하는 크고 작은 이 모든 일들은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을 들어보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된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이라.”(롬 1:32)
무조건 사형이라는 것입니다.
우매해도 사형, 멍청해도 사형입니다.
무자비는 당연히 사형이고 무정해도 역시 사형입니다.
이렇게 정하신 분은 누구도 아닌 하나님이십니다.

정리해 보면 이런 것입니다.

온갖 소소한 잘못까지 다 죄로 규정하고는, 죄의 경중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에 대한 벌을, 히틀러와 연쇄살인범이나 동일하게, 모두 사형이라는 선고하십니다.
그런데 사형을 면하고 천국까지 직행할 수 있는 길이 딱 하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이번에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천국행입니다.

이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런데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절대 교리입니다.
이 교리의 실례를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하실 때, 예수님 좌우편에서 강도 두 사람도 십자가 처형을 함께 받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가장 흉악한 범죄자에게 내리는 가장 무서운 벌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흉악범으로 동일한 십자가 처형을 받은 두 사람의 태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한 강도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9)
그러자 다른 편에 있던 강도가 그를 꾸짖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은 것이라.”
이어서 예수님께 말합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그리하여 그 흉악한 강도는 예수님의 약속에 의해서 천국에 들어간 최초의 사람이 됩니다.
이는 베드로나 사도 바울보다 빠른 것입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이 논리대로라면, 아무리 선행을 많이 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가고,
무고한 시민을 17명이나 죽였더라도 예수를 믿었기에 천국에 간다는 것인데,
이런 하나님이라면 너무나 편파적이어서 조폭 두목만도 못합니다.

이 절대 교리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일단 복잡한 속을 잊어버리시고 잘 들어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온 우주와 생명들을 덮고도 남습니다.
그 중에 모든 인간들을 자녀로서 가장 사랑하십니다.

연쇄살인범 김대두를 세상 모든 사람들은 버렸지만 딱 두 사람만은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당시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의 부인입니다.
그 부인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어머니와 그 부인은 김대두를 열심히 찾아갔습니다.

먼저 어머니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아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너집니다.
어머니로서의 마지막 소원은, 죄는 죄라고 할지라도 또 사형을 당할 때 당하더라도,

그 아들이 외롭지 않기를, 또한 증오를 버리고 평안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입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늘 작은 거짓말을 한다고 합시다.
그 거짓말로 감옥에 가거나 손해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부모는 그런 자녀에게 화를 내거나 크게 상심합니다.
고쳐지지 않는다면 절망합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배우자를 속입니다.
그 일로 세상이 무너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마음이 완전히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자, 어떤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합시다.

“당신 아들은, 수군수군 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그 부모는 기절할 듯 놀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당신의 자녀는 모든 불의와 추악과 탐욕과 악의가 가득하며,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입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내가 이룩한 업적이 아무리 대단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한꺼번에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왜요?
이런 마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끝내는 망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망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일상에서 행하는 소소한 것까지 죄로 규정하시고,

그 결과는 사형이라고 하시는 그 깊고 깊은 뜻을 아셔야 합니다.

20절 말씀입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기 전에는 누구나 시기하고 분쟁하며 사는 줄 알았고,

손해를 보면 앙갚음을 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런 것들이 죄인 줄 알게 되었습니다.

‘죄’는 헬라어로 ‘하마르티아’, 그 뜻은 ‘과녁에서 빗나가다.’입니다.
과녁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내가 어디로 행하고 있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정죄’가 아니라 죄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합니다.
그리고는 나쁜 생각과 나쁜 마음을 버릴 생각을 하지 않고, 언제나 갖고 있습니다.
끝내는 파멸입니다.
그것이 ‘사형’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너 죄를 범했지. 당장 죽어!”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쁜 생각과 불의를 도모하는 가운데 서서히 파멸로 빠져 듭니다.
설사 육신은 호의호식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 영혼은 죽었고 마음은 지옥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지옥과 같은 마음에 너무 익숙해져 자신이 이미 지옥을 사는 줄도 모릅니다.

스캇 펙의 소설 “저 하늘에서도 이 땅에서처럼”에서,
지옥을 죽어서도 재벌 놀음을 하는 수억만의 영혼들이 모여 있는 쓰레기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의 세계에서는 물질도 돈도 전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들의 갈 길을 갑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 자녀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다 준다고 하여도, 돈독 올라 불의한 일을 서슴지 않는다면,
자녀에게 간청할 것입니다.
“가난해도 좋으니 제발 올바로 살라고.”

제가 아는 권사님의 아들이 죄를 짓고 감옥에 갔습니다.
그 권사님은 추운 겨울에도 냉방에서 주무셨고, 맛있는 음식도 거절하셨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고통은, 아들을 잘못 키웠다는 자책감이었습니다.
아들이 제대로 살 수만 있다면 아들 대신 감옥에도 기꺼이 갈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너무나 중요한 말을 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롬 3:25)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대속제물로 내어 주셨다는 것은,

죄 지은 아들대신 어머니가 감옥에 가서 죗값을 치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책을 씁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구절은 “화목제물”입니다.
죄로 막힌 구원과 생명의 길,
하나님과 우리들이 화목하게 되는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 자유의지로 온갖 죄를 짓고 삽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찢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끓는 마음을 추스르시며, 자유의지를 박탈하거나 세상을 폐쇄해버리는 대신,

제3의 길을 택하셔서, 하나님께서 대신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고 그 길을 우리가 가도록 기다리십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셨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길은, 원망과 절망이 전공인 우리 사람들은 생각지도 못하는,

오직 전지전능하신 사랑의 하나님만이 열 수 있는 길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그 길을 우리들이 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묻습니다.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그리고 답합니다.
“있을 수가 없느니라.”(롬 3:27)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셨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해주셨고, 하나님께서 가게 하셨는데, 누가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그 사랑에 감격하며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 변호사 부인이 열심히 김대두를 찾아간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구원의 길, 생명의 길을 가게 하신 하나님이 너무나 감사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두는 그 부인이 정신적 사치를 부리는 정신이 나간 여자라며 화를 냈습니다.
그러나 면회를 갔습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김대두가 처음으로 그 부인에게 한 말은 “왜 이러십니까?”였습니다.
김대두가 마음의 문을 아주 조금 연 것입니다.
그 좁은 틈을 통해 열심히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고 마침내 흉악범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을 하고 떠났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증오대신 하나님의 평강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이러면 어떨까요?

누구처럼 인생의 끝에 깨닫지 마시고,
지금 이 시간 어떤 실수와 허물을 용서하시며 다시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아들여,
원망하지도 자책하지도 마시고, 과거의 모든 아픔을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예수님의 생각과 방법과 자세로 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약속하십니다.
“오직 여호와가 네게 영원한 빛이 되며 네 하나님이 영광이 되리니,
네 슬픔의 날이 끝날 것임이라.”(사 60:19-20)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너 작은 자가 천 명을 이루겠고, 너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2)

우리가 웃는 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보다 더 기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