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지체를 의의 병기로 (로마서 6:8-14)

새벽지기1 2017. 12. 20. 07:30


예배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코르반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과 친밀해지다, 가까워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통하여서 하나님과 가까워지시고 친밀해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광고에 가끔 적합지 못한 용어를 쓰더라도
그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기를 바래서입니다.
예배는 절대로 굿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오신다면”이라는 제목의 글이 우리 교회 홈피에 올려졌습니다.
그 글은 이런 것입니다.

“얼마 전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갔더니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구역을 갈라 쓰고 있었으며 위의 3개의 종교가 같은 조상을 모신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창세기에 기록된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으로서 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삼아서 메시아의 혈통으로 선택하셨다고 한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등의 유일신 종교들의 공통 조상이 되었다. 그런데 유대교는 전통 유대교, 보수주의 유대교, 개혁 유대교로 이슬람교는 수니파와  시아파로 기독교는 로마 가톨릭, 그리스교 종교의 개신교로 나뉘었으며 개신교는 장로, 침례, 감리, 성결, 루터 등등으로 나누어진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시 인간 세상에 오신다면 어떻게 하실까? 그 많은 가지 중의 하나를  혹은 누구를 남기실까? 갑자기 아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들이 또 종파로 나누어지죠.
여기에 부연하자면 한국 장로교회만 해도 대략 3백 개 이상입니다.
자기가 어떤 교단에 소속되어 있는지도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렇다고 장로교 간판만 보고 들어가서 안심할 수 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교는 아직도 하나님의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슬람교는 마호메트를 또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을 이미 오신 메시아로 섬기고 있습니다.
여기에 통일교, 모르몬교, 신천지 등등 이런 기독교 이단들.
이들의 교주들, 각 종파 통일교의 교주 신천지의 교주들이 예수는 실패한 메시아이고 자기가
진정한 하나님의 새로 보내신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들입니다.
이들의 모든 공통점은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과 가장 부합하며 가장 옳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과연 누가 옳은 것일까요?
그러면 우리들은 옳은 것일까요?
우리들은 옳은 것일까, 정말 무서울 만도 하죠.
결론짓고 말하자면 그 누구도 옳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옳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얼마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옳은 존재는 누구예요?
딱 하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 옳은 존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다, 이렇게 얘기하면,
타종교에서는 다른 종파에서는 예수님이 만약에 옳다면 마호메트도 문선명도 얼마든지 옳을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말할 수 있죠.
또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 내에서는 맞다, 예수 그리스도다. 오직 그분만이 옳다. 예수님이 기준이시니까

내가 더 예수님에 가깝다. 그러므로 내가 더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그럴 것입니다.
기성교회는 틀렸고 우리들이 더 옳다.

일단은 왜 예수님인가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은 일단 접기로 하고
우리들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사람으로서 얘기를 풀어가기로 합시다.
예수님은 가장 옳은 분인가.
왜 이렇게 수많은 종파들이 생기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각은 어떤 것이며 우리들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 것일까요?
세상을 가늠하는 기준 잣대들은 정말 많이 있습니다.
IQ, 미모, 능력, 올림픽, 부자, 권력 등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 여러 가지 기준들 중에 가장 강력한 기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강함과 옳음입니다.
누가 강하냐 누가 옳으냐.
예뻐지려고 하는 것도 강해지기 위해서입니다.
강함과 옳음.

지난 선거 때 서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했습니다.
왜 옳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선택받아서 강자가 되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비리를 폭로합니다.
옳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 뽑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선거에서 이기고 강자가 되고 다수당이 되었습니다.
권력을 잡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이 강함과 옳음이 양립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강함이 언제나 옳음을 눌러버리기가 십상입니다.
그래서 강자의 정의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좀 우스운 것입니다.
또한 이 옳음이라고 하는 것, “나는 내가 옳아.”라고 하는 것은 그 강함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정치든 경제든 나라든 개인이든 대동소이합니다.
이런 현상은 종교에서도 나타나는데 나타날 뿐만 아니라 가장 두드러집니다.
종교에서 강함과 옳음, 그래서 종교 전쟁이 가장 무자비하고 치열합니다.
다른 종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격이라든가 선함이라든가 가치
이런 것들은 생각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가졌으므로 너는 죽어야 돼. 너는 틀렸어. 나는 옳아.
이렇게 돼버립니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무려 6백만 명이나 학살한 이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종교적인 이유입니다.
그래서 종교 전쟁이 가장 무자비하고 치열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는 종교계의 절대 강자였습니다.
로마는 세속 왕국의 절대 강자였습니다.
유대교의 종교적인 오만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정복자 로마마저도 개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이 경우에는 옳음이 강함을, 남이 인정하든 말든 하여간 자기로서는 내가 옳아 너희들이 아무리
강해도 개야 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와중에 우리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왜 오셨을까요?
왜 오셨을까요, 그 와중에.
그때처럼 유대교가 극성을 부린 때가 없었고
그때처럼 로마가 정치 군사적으로 전성기를 이룬 때가 없었습니다.
그 와중에 오셨습니다.
혹시 종교와 세속의 강자들을 물리치시고
예수님께서 절대 지존으로 군림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닐까요.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러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는 분이 맥없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누가 더 옳을까요?
하나님께서 오시면
아브라함에서 갈려나간 그 수많은 가지 중에 어떤 것을 옳다고 하실까요?
내가 속해 있는 가지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이러한 질문들과 두려움은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 그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수천 년 동안 내가 가장 옳다고 주장하면서 종교계의 강자가 되려는 몸부림 역시
예수님께서 왜 오셨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을 찾아 헤매던 끝에 드디어 예수님을 발견한 무리들이 외쳤습니다.
“랍비여 어느 때 여기 오셨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찾았는데요.”
그러나 예수님의 표정은 밝지 않으셨습니다.
자기를 찾아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헤매고 와 몰려와서 열광하는데 밝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6:26)
그러시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하셨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만약에 들을 귀가 없으면 못 들어도 된다는 뜻입니다.
십자가를 없애주시겠다고 하지 않으시고 아니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아와야 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설교를 들으면서 무리들이 어안이 벙벙해지면서 너무 너무 어렵다, 도대체 저게 무슨 소리야.

그러고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 얘기들은 떠나고 싶으면 그렇게 해라는 뜻입니다.
가도 돼 못 알아듣겠으면.

예수님은 추종자들을 별로 반기지 않으셨고
이러한 것은 예수님은 강자와 또 세력에 대해서 관심이 전혀 없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강자와 세력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면 그냥 당하셨습니다.
당연히 그런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여호와 하나님 역시 그 강자와 세력에 전혀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성경 곳곳에 나옵니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네가 다음 전쟁에서 이길 것이다.

그런데 그 적군의 말과 병거들을 노획하거들랑 말의 힘줄을 끊어야 된다.

그리고 병거는 불살라버려야 된다. 그 말씀만 하십니다.
그 당시 말과 병거는 오늘날의 핵무기와 탱크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그것만 많이 가지면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백성들은 막 굶어죽고 있는데도 로켓을 쏘고 우리는 그것에 와와 거리고, 또 안 된다고 악을
쓰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처음으로 승승장구하면서 강대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서는 백성들과 군사들의 숫자를 세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아예 초장부터 큰 징계를
내리시고 백성들은 전염병으로 7만 명이 죽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지금 내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려는
원래 뜻들을 너희들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이다.
물리적인 힘과 세력에 의존하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것에 대한 경고입니다.
강함, 그런 걸로 하나님 나라 세우는 게 아니야 그것이 절대 기준이 아니야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옳음에 대해서도 굉장히 엄격하셨습니다.

부자 청년이 찾아와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습니다.
이 청년은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십계명을 잘 지키고 신앙생활을 잘하는 신실하고 올곧은 또한 예수님을 찾아와서는
지혜를 구할 정도로 아주 진지한 청년이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올바름에 대해서도 옳음에 대해서도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건 오만이 아닙니다.
문맥을 잘 읽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켰사오니 아직 무엇이 부족하지요, 선생님?”이라고 묻는 것입니다.
“나 다했어요. 다음에 내가 할 일이 뭐예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정도면 굉장히 잘 한 것임에도 그의 올곧음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예수님을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과연 우리들의 옳음에 대한 절대적인 것을 요구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누구도 절대적으로 옳지 않습니다, 옳을 수가 없습니다.

또 하나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셨을까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다 옳아.’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이 부자 청년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어떤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묻자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만 오직 선하시다. 그 아들이니까 나는 당연히 선해.”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자신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에 대해서 그 옳으신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얼마나 신실하게 반응하는가에만 관심이 있으셨습니다.
한번 읽어보십시오.
깊이 읽어보십시오.

예수님은
내가 하나님께 열심히 반응해서 그러므로 내가 옳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기 때문에 옳다라고 생각하신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제3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입니다.
‘일컫다’라고 하는 히브리어는 ‘나사(nasa)’라고 하는데 ‘가지고 다니다’는 뜻입니다.
가지고 다니다. 일컫다.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들먹이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하나님을 믿으니까 내 말이 옳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몽땅 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자동적으로 일컫고 있는 중입니다.
그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니라 오직 너희 말을 옳다 옳다 아니다 아니다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나느니라.”(마5:34~37)
우리들 흔히 하는 말입니다.
내 말이 옳아 틀리면 내 성을 갈아.
정말 옳습니다,
내가 그 사안에 대해서는 정말 옳고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아서 내가 답답합니다.
그래도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악에서 난 것이니라 그럽니다.
사탄이 시킨 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얼마만큼 더 옳고 얼마만큼 더 선한가.
예수님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더 옳고 더 선한가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아무런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가장 옳은 바리새인들을 상대 안 하시고 정말로 죄로 뒤범벅이 되어 있는 그런 사람들과 기꺼이 어울리셨습니다.
왜요?
더 옳고 더 그름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로마서를 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만나기 전에는
유대교가 가장 옳으며 그 유대교인 중에 자기 자신이 최고 강자라고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습니다.
나는 절대 옳아.
어느 정도로 옳으냐 하면 자타가 공인했습니다.
사울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잡아들일 수 있는 살인면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막강하죠.
왜요? 제일 잘하기 때문에 가장 옳기 때문에.
그러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예수님을 만나고 180도로 달라집니다.
180도로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그의 얘기를 읽어보면 자신의 특권과 재능과 지위를 배설물로 여겨버렸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강함과 옳음을 앞세웠고 뽐냈던 그는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부터는 자신의
나약함과 연약함을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악함을 토로했습니다.
겸손한 척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진짜로 그랬습니다.
이것은 강함과 약함의 허구성과 그것의 무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내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편지를 씁니다.
과거시제로 되어 있지 않습니다.
디모데를 만난 것은 사도 바울의 후반기입니다.
과거에 예수님을 몰랐을 때 죄인의 괴수였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누구보다도 자신이 열과 성과
목숨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으로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허락하심이니라.
최고로 옳다며 기세 등등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휘둘렀던 과거의 자신을 예수님께서 얼마나
오래 참고 계셨는지 깨닫고는 사도 바울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자신을 만나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긍휼인지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신 것이 다른 사람들의 본이 되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조치, 사랑의 조치임을 알았습니다.

복음을 쉽사리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
끝없이 질문하고 논쟁하는 이유는, 알고 보면 내가 너무 옳기 때문입니다.
이 먼지만도 못한 벌레만도 못한 내가 옳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도 100% 완전히 옳을 수가 없습니다.
옳음 비슷한 것은 옳음이 아닙니다.
90% 옳음은 없습니다.
10%의 그 사악함 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게 됩니다.
또한 그 옳음이 삶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진정 옳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설사 내가 100% 옳다고 할지라도 내 몸을 불살라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것처럼 설사 내가 100% 옳아서 내 목숨을 내놓는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그 선하심과
예수님의 그 완전한 정의와는 비교조차도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강함과 옳음에 대해서 제가 길게 논박하는 이유는

강하고자 하는 욕망과 내가 옳다는 주장을 버릴 때만이 비로소 제정신이 들고 진짜 예수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로 하여금 이제는 강해지려고 하는 또한 내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보이고 그분의 가르침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동의할 수 있고 제대로
진리의 길을 스스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이 말씀은 예수님의 더 그레이트 커멘드먼트(The great commandment)라고 하는 대 사명입니다.

이 명령을 수행한다 하면서 행한 기독교의 행태들을 깊이 성찰해보십시오.
세력 확장을 위한 전쟁을 수도 없이 저질렀고
마녀사냥이라는 명분으로 반대파들을 수백만 명이나 학살했고 나만 가장 옳다는 종교적인 오만으로

다른 사람들을 능멸했고 오늘날에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전도라는 미명으로 무례를 서슴지 않고 성당에 불을 지르고 불상을 훼손하고 종교 지도자들을
맹신하고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교인들을 자신의 하수처럼 대하고 교회 성장과 건물 세우기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모두다 왜 이렇게 합니까?
강하고자 하는 욕망과 나는 옳다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보고, 그런 사람들을 보고 뭐라고 하셨을까요?
뭐라고 하실까요?
잘한다고 하실까요?
그것이 내가 원하는 바다라고 말씀하실까요?
이것이 4대 종교가 예루살렘을 분할 점령하는 이유이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파와 교파와 교단으로 갈가리 찢긴 이유이며

누가 더 옳을까 하는 질문이 예수님께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한테 질문이 올라옵니다.
목사님, 이렇게 이렇게 하는 것이 옳지 않지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 아무 얘기를 안 합니다.
그래, 옳지 않은데 너는 옳으냐? 그리고 그 답을 하는 나는 옳으냐?

사도 바울이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린도전서 1장 22절입니다.
표적이 무엇입니까?
모든 세력을 물리치는 강함을 의미합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모든 논리를 잠재워버리는 옳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강함과 옳음을 초월하고 포용하는 제3의 길을 제시합니다.
로마서 6장에서 “예수님과 합하여,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과 연합하여”라는 구절이 8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어떤 예수님을 믿고 계십니까? 어떤 예수님을?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길은 열심히 예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열심을 다하는 종교행위로 예수님을 그렇게 섬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강해지기 위해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입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기로 신신당부하고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섬기는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아서 강해지기를 원하는 마음을 버리지 않는 한 내가
열심히 종교행위를 하는 와중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불의의 병기로 드리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최고의 열성으로 종교행위를 다한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들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들도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 있구나."(마7:23, 12:34, 23:13)
왜요?
그 마음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기도와 전도와 헌금과 봉사를
우리 한국 교회가 했음에도 피 흘려 세우신 교회가 세상보다도 소란하고 쫀쫀하고 이기적이 되어버렸습니다.
깊이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과 연합이라고 하는 것은 그분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가르침을 깨닫고 따라가고 닮아가는 일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무런 그 마음을 읽지 못하고 그냥 섬기고 그래서 길 열어달라고 얘기하고
그냥 잘 섬겨서 너는 10분 동안 기도했지 나는 한 시간 동안 기도했어. 그러니까 내가 더 옳아.
내가 잘 될 거야.
그분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분은 이런 분입니다.
그분은 오래 참으시고 온유하시며 투기하지 아니하시고 자랑하지 아니하시고

교만하지 아니하시고 무례히 행치 않으십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시고 악한 것을 생각지도 않고 불의를 절대로 기뻐하지 아니하십니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십니다.

우리가 희망이 있는 것은 여전히 강함과 옳음에 대한 강박관념 속에서도 집착을 버리지 않는
우리를 참고 바라고 기다리시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처럼 생각하시기를, 행동하시기를, 애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것이 바로 내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저절로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고 투기하지 아니하리라.
어떤 상황에서도 견디고 참고 바라리라.
내 이익을 구치 아니하리라.
그때 일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게 하리라.
우리가 죄에서 이기려고 몸부림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절대로 죄가 너를 주관치 못하게 할 거야 걱정하지 마.
내가 이기려고 몸부림치지도 않았는데 죄는 나와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죽은 것마저도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를 통하여 저절로 나타나고
그토록 갖고 싶어 하던 강함과 옳음이 저절로 나한테서 드러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당하고 옳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인 것을 알고 나는 더욱 감사하며 나도 갈수록 겸손해집니다.

그 사람을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그 사람이 되기로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