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내가 존중히 여기고 (사무엘상 2:27-36)

새벽지기1 2018. 2. 28. 12:19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마다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부와 인기를 한 몸에 누리는 화려한 사람일수도 있고, 전원생활을 여유롭게 사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저 사람을 닮고 싶다. 그의 성품과 지혜, 그의 깊이와 넓이를 나도 닮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닮고 싶은 롤 모델이 있는 사람은 소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 인품이나 지혜보다는,
인기와 명예, 부와 권력만을 정신없이 좇아가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부와 권력에다 지혜까지 누렸던 솔로몬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는 말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을 좇는다고 내 손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마저 내 성공과 안녕을 위해 섬기는 오늘날에
제대로 하나님 자녀답게, 사람답게 사는 것 자체가 모호해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진짜 인생을 사는 선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면,

전혀 예상치 못한 깊은 감동을 받습니다.

의사직을 그만두고 신부가 되어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헌신하다 암으로 돌아가신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나,
아프리카 오투암을 위하여 자신의 박봉을 쪼개어 우물을 파고 후원자들을 모아 어린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페기의 이야기를 들으면 감동을 받습니다.
그 감동은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아직도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고, 세상은 여전히 살만 한 곳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런 감동을 하찮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진지하게 생각해야 봐야 합니다.
그 감동은 삶의 방향을 바로 잡아주고
마땅히 가야 할 나의 길을 제시해주시는 하나님의 목소리입니다.

‘지박’이라는 작곡가를 아십니까?
고등학교 시절 이미 BMG 클래식 작곡 그랑프리를 수상했고,
23세 때 미국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BMI 제리골드스미스상을 수상하고,
이듬해 미국 저작권 협회가 선정하는 영화음악가상을 2년 연속 거머쥔 사람입니다.

그가 영화음악을 시작한 계기는 너무나 평범합니다.
대여섯 살 때부터 ‘주말의 명화’에 나오는 슬픈 음악을 듣고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꼬마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그 감동이 그가 가야 하는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아홉 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그 동네에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술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그 도서관 안에 있는 음악을 모조리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그 곳에 있는 CD를 매일
다섯 시간씩 3년 동안 모두 들었습니다.
세상이 오직 악보랑 피아노만 있다는 생각으로 음악에 몰두하였습니다.


35살의 그가 말합니다.
“헨델의 메시아처럼,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죽음과 성스러움을 깊이 있게 표현하는 오라토리오를 작곡하고 있습니다.”
그의 말은 그가 얼마나 깊고 넓은지 보여줍니다.
그가 받은 상들은 목표가 아니었습니다.
열심히 간 그의 길에 대한 사소한 보상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엘리 제사장에 대한 하나님의 무서운 경고입니다.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될 날이 이룰지라.”(삼상 2:31)
엘리의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된다는 것은 대를 끊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가문을 폐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무서운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당시는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이 지어지기 전이어서 실로에 성막이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실로의 성막에 와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성막을 관리하며 제사를 주도하는 제사장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인데, 이들은 이스라엘 전체가 다 아는 망나니였습니다.
그들의 망나니 짓거리가 성경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러 실로로 왔습니다.
제물은 주로 소나 양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제사를 드린 다음, 제사장의 몫으로 일정 부분의 고기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께 드리기 전에 고기를 요구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취하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그들이 청년이 되면서 그 악행은 더욱 커졌습니다.
“엘리가 매우 늙었으니 그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문에서 수종을
드는 여인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왜 이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하였는가?
성경은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립니다.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고 제사를 멸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렇게 된 데에는 아버지인 엘리 제사장에게 그 원인이 있었습니다.

29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보다 자기 자식을 더 중히 여겼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식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깁니다.
그런데 이 당연히 여기는 이것이, 엘리 아들들이 개망나니가 되고, 끝내는 가문까지 망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네 집에 생산하는 모든 자가 젊어서 죽으리라.
네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한날에 죽으리니 그 둘의 당할 그 일이 네게 표징이 되리라.”

홉니와 비느하스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훗날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습니다.
그 전투에서 이스라엘 군사가 사천 명이나 전사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를 실로에서 가져왔습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이기지 않을까 생각해서입니다.

그때 홉니와 비느하스가 법궤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홉니와 비느하스를 하나님께서 도우실 리가 없습니다.
전투가 다시 벌어지고 이스라엘 군대는 대패하여 삼만 명이나 전사하였고,
그때 홉니와 비느하스도 함께 죽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한날한시에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수모까지 당하였습니다.
아들도 전사하고 하나님의 법궤까지 빼앗겼다는 소식을 들은 엘리는 충격을 받고 죽었는데,
그 비참함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 지 사십 년이었더라.”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홉니와 비스하스는 망나니로 살다가 한날한시에 죽었고,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중히 여긴 엘리의 가문은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수모를 당하고 백성들이 곤경에 빠졌다는 것입니다.

엘리 가문의 몰락을 보면서 어떤 결론이 내려집니까?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해서는 안 되겠구나.
예배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구나 하는 결론일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20대 초반인 조혜연 양은 프로 바둑기사입니다.
세계 최강 중국의 루이나이웨이를 꺾고
여자 타이틀 2관왕에 오른 여자 바둑 최고의 기대주입니다.
2005년에 뜻밖의 일이 생겼습니다.
조혜연 양이 2005 바둑 마스터즈 대회 결승전에 올랐는데 돌연 기권해 버렸습니다.
우승 상금 수천만 원을 코앞에 두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주최 측과 선배 기사, 부모님까지 설득했지만 조 양은 요지부동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기권한 이유는, 결승전이 주일날 아침에 진행되는데 교회에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로서 대단히 어려운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조양의 마음자리를 깊이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어느 것보다 예배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고 목사마다 강조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래야 합니다.
그 다음에 따라오는 말이 좀 문제가 있습니다.
예배를 빠지고 하나님의 복을 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혹시 조 양이 예배 때문에 중요한 결승전을 포기한 이유가, 주일날 예배를 빠지고 두는
바둑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셔서 이기지 못하게 하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요즈음 교회 생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배가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예배에 빠지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예배를 소홀히 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고사하고 벌을 받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교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의 벌이 무서워 어쩔 수 없이 예배에 참석한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반가워하실까요?

예배의 원형은 구약의 제사입니다.
‘제사’를 히브리어로 ‘코르반’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가까이 가다’, ‘친밀해지다’입니다.
제사는 영어로 sacrifice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희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방신에서 제사를 드릴 때 동물을 제물로 바친 데서 유래한 의미입니다.

구약의 제사에서도 동물을 바쳤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그 제물은 내 죄를 속하기 위한 것으로,
그렇게 깨끗해진 내가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반면 이방인들의 제사는 그 신에게 바치는 뇌물입니다.
구약의 제사가 내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방인의 제사는 섬기는 신을 달래기 위한 것입니다.

예배를 빠지면 하나님의 복을 받지 못하며 오히려 벌을 받는다는 것은 이방신의 제사,
sacrifice에서 온 개념입니다.
예배를 하나님에 대한 알현으로, 헌금을 복채로 보니까,
빠지면 화를 입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가 친밀해지는 시간입니다.
예배는 억지로 져야 하는 의무가 아니라,
존귀한 하나님의 품으로 달려가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하나님을 누구보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은 당연합니다.
어쩔 수 없이 빠졌다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더욱 애틋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 회복의 본질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은혜와 지혜와 능력을 공급하십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교통하고 하나가 되는데 핵심이 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예배는 하나님의 군림과 사람들의 맹종만 남는 억압의 시간으로,
복을 받으려는 저급한 방편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한편 엘리는 제사장의 직분을 높은 신분과 좋은 수입이 보장되는 직업으로만 여겼습니다.
백성에 대한 사랑과 염려의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목회자의 소명”에서 요나 이야기를 통해 두 가지 실패를 고발합니다.
요나는, 패역과 원수의 도시 니느웨에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을 거역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당시 땅끝으로 여겼던 다시스로 도망갑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다시스로 도망가는 것이 첫 번째 실패입니다.

뱃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졌고, 고래는 그를 삼켰습니다.
고래 뱃속에서 삼 일 밤낮을 지내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명에 따라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이방인이자 이스라엘의 원수 니느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자 요나는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죽어 마땅한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요나의 두 번째 실패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수행하나 요나에게는 사랑이 없었습니다.

요나의 실패 원인은 제사장이나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실패하는 원인입니다.
어떤 일에 종사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내 이득만 챙기려 하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으나 이웃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없으면 서서히 몰락합니다.

자신의 몸으로 믿음으로 사는 삶의 차원을 탐험하고 개발하여 감동적인 좋은 소설을 쓰는
체임 포톡(Chaim Potok)은, 어머니로부터 “네가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것은 알겠지만
뇌 전문의가 되거라. 사람들도 많이 살리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체임은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어머니 전 작가가 되고 싶어요.

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보여주고 싶어요.”

엘리의 두 아들이 망나니짓으로 날을 지새는 동안 사무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2장 18절 말씀입니다.
“사무엘이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 섬겼더라.”
세마포 에봇이란 제사장과 옆에서 돕는 사람들이 입는 특별한 옷을 말합니다.
꼬마 사무엘은 에봇을 입고 하나님께 다가가 친밀해지는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특별한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됩니다.

26절 말씀입니다.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를 소중히 여기며 사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은총과 사람들의 사랑이 날로 더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와 그 아들들을 책망하십니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 중에 내가 너를 택하여 나의 제사장으로 삼아 내 앞에서 에봇을 입게 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 자손의 드리는 모든 화제를 내가 네 집에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나님의 특혜를 받은, 최고의 가문 엘리와 그 두 아들은
날로 높아지는 백성들의 원망을 들으며 서서히 몰락해 가고 있는 동안,
평범한 집안의 사무엘은 점점 더 존귀해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삼상 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