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두 귀가 울리리라 (사무엘상 3:1~11)

새벽지기1 2018. 3. 8. 07:57


오늘 본문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삼상 3;1)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타락상을 보고 속이 상하신 것일까요?
그래서 침묵하고 계신 것일까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수록 안타까우신 하나님께서는 계속 말씀을 하십니다.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이야기를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면, 그저 하는 이야기는
먹고 사는 문제, 돈을 버는 이야기, 건강 문제, 걱정과 근심거리 등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이나 교회 이야기를 하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존재하는 것이냐?”, “교회가 그래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냐?”,
“요즈음 우리 목사님 상태가 별로 인거 같아.” 등등의 이야기라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은 사람들 가운데 희귀한 것입니다.

이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하나님이 꿈이나 계시로 보여주시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 책임은 엘리 제사장에게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면, 그 책임의 상당 부분은 목사인 저에게 있습니다.

요즈음 밑줄을 그어가며 열심히 읽고 묵상하는 책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이 쓴 “목회자의 소명”이라는 책입니다.
자신의 목회 경험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성찰하며 목회자의 참 소명을 찾아가는 진솔한 책입니다.
이 책의 가치는 비단 목회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이 땅에서 제대로 사는 길을
구약의 요나 선지자의 이야기를 통해서 차근차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나는 원래부터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가 그의 직업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적대국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로 갑니다.
다시스는 ‘환상과 성공의 땅’입니다.
요나가 다시스로 갔다는 것은,
“하나님,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변화시켜 큰 교회를 세워
성공적인 목회를 할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목사라면 성공적인 목회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유진 피터슨도 그랬고, 저도 그랬습니다.
여러분들의 버전으로 말하자면,
사람이라면 누구나 화려하고 멋진 인생에 대한 환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인생, 성공적인 목회를 위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열심히 일합니다.
공부를 하고 스펙을 쌓고 미래가 유망해 보이는 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쉽게 되질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상대하는 사람들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이 들고 낙심합니다.
게다가 누구나 나락으로 추락하는 참담한 경험을 합니다.
깜깜합니다.
절망적입니다.
대책이 서질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나가 삼 일 밤낮 있었던 고래 뱃속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축축하고 컴컴한 고래 뱃속에서,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며 그냥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고래 뱃속에서 다시 하나님을 찾았고 목숨 걸고 기도했고,
하나님은 요나를 살려주셨습니다.
그렇게 살아난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적대국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요나에게는 결정적인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적대국 니느웨 사람들과 자신의 처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 상황이 싫었습니다.

사람들에 대한 애정도 없이, 목회에 대한 환상도 열정도 없이 그저 예언자로서의 직무를
수행했을 뿐입니다.
엘리 제사장이 그랬고, 많은 목사들이 그러고 있고, 유진 피터슨이, 또 제가 그랬습니다.
또한 사람들도 각자의 삶의 영역에서 그렇게 하고 있을 것입니다.
힘들면 투덜대고 풀리면 헤헤하며 오늘을 어제처럼 살아갑니다.
이때 흔히 하는 말, “목구멍이 포도청.”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은
무시하였고, 그러자 하나님의 말씀이 아담에게 희귀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단절되고 오히려 사탄의 조종을 받으며, 그 사람의 몸부림치는 노력의
결과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힘겹게 살아갑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유진 피터슨을 깨운 것은 웬델 베리(Wendell Berry)라는 작가입니다.
그의 원래 직업은 농부입니다.
농장에서 밭을 갈고 작물을 심고 가축들을 돌보는 것 외에 소설과 시와 에세이를 씁니다.
웬델 베리는 장소의 중요성에 대해서 자주 언급하였습니다.
베리에게 농장은, 사랑하고 이해하고 존중하면서 가꾸는 장소입니다.
그 장소에 대해서 분개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짓입니다.
장소가 없으면 일을 할 수 없습니다.
더 나은 장소를 찾아 떠나는 것은 환상의 도시 다시스로 가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곳은 없습니다.

농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땅과 흙입니다.
흙속에는 수많은 유기체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고,
죽음과 부활의 순환이 끝없이 이어집니다.
풍성한 수확을 걷기 위해서는
그 흙을 존중하고 올바로 이해하여 양분을 공급하고 보호해야 합니다.
흙을 사랑해야 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베리에게서 그것을 배웠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교인들을 사랑해야 하는구나. 그것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러자 유진 피터슨의 교인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고 올바로 이해하고 영양을 공급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러셨습니다.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 찾아와도, 귀신들린 사람, 한센병자, 귀머거리, 시각장애인, 세리와
창녀 등 누구를 만나도,
세상에는 예수님과 그 사람만이 존재하는 양 그 사람에게만 집중하셨고, 경청하셨고,
보살피셨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걱정이 있습니까?
예수님께 집중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셨듯이, 나도 예수님께 집중해 보십시오.
모든 근심과 걱정을 일단 뒤로 하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구속의 주님께 집중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고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입니다.

어떤 일에 종사하십니까?
그 일이 무엇이든, 만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하여 그 일을 가꾸고 정성을 다해 수행하기로 합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물론 힘이 듭니다.
그러나 그때부터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땀을 흘려야만 해결된다고 생각했던 고단한 삶이 풀리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공급하시는 은혜와 힘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해지고 하나님의 이상이 사라진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소년 사무엘은 성막 안에서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잠이 깬 사무엘은 얼른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리고는 속히 일어나 엘리 제사장의 처소로 달려갔습니다.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엘리 제사장에게 아뢰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잠결에 말합니다.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사무엘은 다시 자기 자리로 가서 누웠습니다.
그러자 또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무엘은 지체 없이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말을 합니다.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러자 엘리 제사장이 말합니다.
“내 아들아, 내가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사무엘은 다시 자기 자리로 가서 누웠습니다.
그러자 또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사무엘은 지체 없이 엘리 제사장에게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금방 짜증의 노예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이 아이 때부터 얼마나 신실한가를 잘 보여줍니다.
얼마든지 모른 척할 수도 있습니다.
혼자 있으므로 얼마든지 투덜거릴 수도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무능은 온 이스라엘이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무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자신의 이름을 듣는 즉시 달려갔습니다.

기억하십니까?
‘자신의 장소에 대해서 분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는 웬델 베리의 가르침.
일을 할 때 거기에 무엇이 없다고 경멸하거나 다른 곳을 탐하는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 장소와 상황에 있는 그대로 극진히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투덜대며 살고 있는지.
내가 처한 상황에서 없는 것을 나열하면 수십 가지도 넘습니다.
떠나야 할 이유를 대자면 수백 가지도 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깨닫는 것은, 가장 문제아는 내 자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무엘이 아직 여호와를 알지 못하고 여호와의 말씀도 아직 그에게 나타나지 아니한 때라”
(삼상 3:7)

퀴즈를 하나 내겠습니다.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 형통하겠습니까?
열심히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형통하겠습니까?

종교생활을 열심히 함에도 불구하고 형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함에도 성실과 정직으로 순조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또한 많이 봅니다.
물론 술수와 권모로 출세하고 부자가 되는 사람들도 많지만 그들의 형통은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큰 사랑과 공의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오늘도 운행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뜻에는 한 점의 거짓과 사악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배와 기도가 그저 만사형통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이기적인 수단이 된다면
그의 삶이 일시적으로 반짝할 수는 있으나, 길이 형통할 수가 없습니다.

요즈음처럼 풍요로운 시대는 더욱 그렇습니다.
기업조차도 겉으로는 인간애와 공익과 자연보호와 같은 가치들을 들고 나옵니다.
사람을 뽑을 때도 실력보다는 성실과 정직을 높이 삽니다.
불의한 세상일수록 정직한 사람들이 살기 편해집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으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특별한 술수를 부리지 않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형통하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은 들어보지 못한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성실하고
거짓이 없는 순전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들은 공의의 하나님 앞에 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당연히 무엇보다도 성실과 정직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교회와 교인들이 세상의 신뢰를 잃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목사의 신뢰도는 최하위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유로 거짓을 버리지 못한 교인들을 형통케 하신다면,

하나님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부하를 높이는 조폭두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사무엘과 같은 순전한 마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필수 조건입니다.
누가 부르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불러도, 무능한 제사장이 불러도, 성실과 정직으로 답하는 순전한 마음 위에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사무엘이 세 번에 걸쳐서 찾아오자
엘리 제사장은 그제야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에게 이릅니다.
“가서 누웠다가 그가 너를 부르시거든,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라.”
이에 사무엘은 가서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아, 사무엘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네 번째로 들었습니다.
아이 사무엘은 즉시 일어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르셨습니다.
“보라. 내가 이스라엘 중에 한 일을 행하리니 그것을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삼상 3:11)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태초부터 존재하였습니다.
그 말씀으로 천지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셨고, 그 말씀으로 운행하고 계시고, 세상 끝날을
넘어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이를 “말씀의 선재성(先在性),”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모든 것을 앞섭니다.
이를 “은혜의 우선성(優先性)”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는 어떤 방해도 어떤 난관도 돌파하여 이루어집니다.
다만 그 말씀과 함께하는 인간이 있거나 없거나 할 따름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함께 계셔서 그 말로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
단에서부터 브엘세바까지의 온 이스라엘이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 세우심을 입은 줄
알았더라.”(삼상 3:19-20)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언제나 응답하였고, 그 말씀을 경청하였고, 그 말씀을 언제나 따랐습니다.
그런 그의 삶을 통하여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셨고,
그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였고, 그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이상과 능력이 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더러 새롭고 획기적인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더러 더 큰 일, 더 많은 일, 더 많은 무리들을 돌보라는 것이 아닙니다.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일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내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살리셨습니다.
그 어떤 방해도 위협도 하나님의 일을 막지 못함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미 시작하신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눈앞에 있는 작은 사람, 눈앞에 있는 하찮은 일이라도 예수님처럼 행하기로 합시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 인생을 복음의 이야기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