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 (사무엘상 5:1~12)

새벽지기1 2018. 8. 2. 07:55


일본의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우주로부터의 귀환”이라는 좋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우주비행사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책으로, 단순한 과학 서적이 아니라,
우주에서의 경험이 우주 비행사들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1971년에 아폴로 15호를 타고 달에 갔다 온 제임스 어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이 암흑 속에서 하늘 높이 보였습니다. 아름답고 온기를 가진 듯 살아있는 물체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섬세하고 연약하며 덧없는 듯, 부서지기 쉬워 보였습니다.
공기가 없는 탓인지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손을 뻗으면 바로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집으면 부서져 조각조각 파편이 되어 버리지나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연약했습니다.
감동했습니다. 우주의 암흑 속에서 빛나는 푸른 보석.
그것이 지구였습니다. 지구의 아름다움은 그곳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바로 그곳에서 살아왔습니다. 저 멀리 지구가 오도카니 존재하고 있습니다.
내 생명과 지구의 생명이 가느다란 한 가닥 실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은 언제 끊어져 버릴지
모릅니다. 둘 다 약하디 약한 존재입니다.
이처럼 무력하고 약한 존재가 우주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 사실을 아무런 설명 없이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우리들 존재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문의 여지없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사실이 절실히 느껴졌습니다.”

제임스 어윈은 훗날 목사가 됩니다.

우주 비행사 유진 서넌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주에서 지구를 볼 때 너무 아름다워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것이 우연히 탄생 되었을 리가 없습니다.
어느 날 어느 때 우연히 부딪친 소립자와 소립자가 결합하여 우연히 이런 것이 생겨났다는
사실을 절대로 믿을 수 없습니다. 지구는 그만큼 아름답습니다.
아무런 목적도 의지도 없이, 우연만으로 이만큼 아름다운 것이 형성될 리 없습니다.
그런 일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걸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며 확신했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지 못하고 나만 보고 있는 것이 정말 이기적인 행위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 자신의 변화된 삶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인생을 사는 태도가 바뀐 것입니다.
긴장을 풀고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보이겠다는 생각이 없어졌습니다.
나의 에너지를 밖으로 향하기보다는 안으로 향하여 쏟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매일 평화롭고 조용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 최초로 우주공간에 날아갔던 사람은 구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입니다.
우주공간에서 지구를 내려다 본 최초의 인간인 그의 첫 말은 “하늘에 하나님은 없었다.
주변을 열심히 둘러보았지만, 역시 하나님은 보이지 않았다.” 입니다.

같은 우주를 보고 전혀 다른 말을 한 유리 가가린이 한없이 가여워집니다.
그의 시야를 가리고 생각을 멈추게 한 것은 바로 공산주의 사상입니다.
단순히 공산주의를 비판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고 생각을 멈추게 하는 것은 공산주의뿐만이 아닙니다.
천박한 상업 자본주의, 성공 지상주의, 각종 이념들,
무엇보다도 종교소비자로 전락한 기독교가 공산주의 못지않게 우리의 생각을 멈추게 하고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아버립니다.

“나는 하나님께 결코 성공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경이로움을 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허락하셨습니다.”
두고두고 되씹어 봐야 할 아브라함 헤셀의 말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하나님의 권능에 관한 것입니다.

엘리와 엘리 가문의 죄로 인하여 그 가문은 몰락하고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하나님은 수치를 당하였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환호성을 지르며 보무도 당당하게 자신들의 성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의 전리품 중에는 하나님의 법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그들의 신인 다곤 신의 신전에 갖다 놓았습니다.
“다곤 신이여, 당신의 도움으로 우리가 승리하였고, 그들의 신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아
왔습니다. 이 법궤를 다곤 신께 바치나이다. 기뻐 받으소서.” 그렇게 갖다 놓은 것입니다.

승리의 흐드러진 축제를 한판 벌이고 난 다음날,

그들은 호기로운 발걸음으로 다곤 신전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절할 듯이 놀랐습니다.
거대한 다곤 신상이 하나님의 법궤 앞에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다곤 신상의 얼굴이 땅에 닿아있어서 마치 하나님의 법궤에 절을 하고 있는 형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가 볼세라 얼른 다곤 신상을 일으켜 세웠습니다.

불길한 생각이 들었지만 그날은 그냥 넘어갔습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다곤 신전으로 달려갔습니다.
문을 여는 순간 모두의 얼굴이 하얘졌습니다.
다곤 신상이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쓰러져 있는데,
이번에는 그 머리와 손목이 끊어져 문지방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5절에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당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말이 아닙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 이후로 신전 문지방을 밟지 않는 것이 그들의 금기사항(타부)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궤 앞에 다곤 신상이 머리와 손이 잘려 넘어진 것이 분명한 사실임을 드러냅니다.

머리와 손목이 잘렸다는 것은 힘을 전혀 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그 전지전능함을 보이셨고,
만왕의 왕이요, 만신 중의 하나님임을 증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6절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손이 아스돗 사람에게 엄중히 더하사,

독종의 재앙으로 아스돗과 그 지경을 쳐서 망하게 하니.”
아스돗에 재앙이 임하였습니다.
그러자 아스돗 사람들이 아우성을 칩니다.
“이스라엘 신의 궤를 우리와 함께 있지 못할지라. 그 손이 우리와 우리 신 다곤을 친다.”
그래서 블레셋의 지도자들이 모여 회의를 하였고,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로 옮기기로 하였습니다.
가드로 옮기자 가드에 재앙이 덮쳤습니다.
그래서 에그론으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에그론에도 재앙이 몰려왔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나?
블레셋의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법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는 수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권능 앞에서 당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도무지 대책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알고 있습니다.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권능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일, 하나님께 항복하는 일입니다.
그 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 여호와는 아무도 소유할 수도, 관리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으신다.”는 이 사실이 하나님의 권능에 이미 무릎을 꿇은
우리들이 새롭게 깊게 인식해야 할 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니까,
나는 누구보다도 옳다 생각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대표적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면
건강해지고, 부자가 되고 출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은 하나님을 자신의 의사로, 금고지기로, 재산관리인으로 세웁니다.
그래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당황합니다.
새벽기도, 일천번제 등등 자신이 당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애를 써보지만 해결되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나 한 거야?”며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의심하고, 하나님 믿기를 그만 둡니다.
이것은 재산 관리인을 갈아치우고, 담당 의사를 바꾸는 것과 똑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일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또한 원치 않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내 뜻대로 움직여야 제대로 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뜻의 헬라어 ‘크리스티아누스’는
‘그리스도의 것’, 즉 그리스도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이 명칭은 바울과 바나바가 세운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얻은 것입니다.

바울은 원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의 종교적인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을 가장 잘 믿으므로 가장 옳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인들 말살의 첨병이 되어 맹활약을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권능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 자처하던 바울은 스스로를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고전 15:8)라고 부릅니다.
그리고는 예수님과 예수님의 복음 외에는 다른 것은 가르치지 않겠노라 선언합니다.
그렇게 180도 달라진 그는 어떤 고난도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소유한 자에서 부활의 예수님의 소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딱 한 번 당황하신 적이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 오르며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하십니다.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마 26:38)
그때의 예수님을 ‘고민하고 슬퍼하셨다’(마 26:37)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고민하고 슬퍼하셨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여호와 하나님께 속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에서의 땀이 피같이 흘렀던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 아버지께 관철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자신에게
관철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수고한 나를 왜 죽으라 하시는가?’가 아니라,
‘나는 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죽기를 두려워하는가?’를 고민하고 슬퍼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참혹하게 돌아가시자,
놀라고 절망한 제자들이 살길을 찾아 황망히 흩어졌습니다.
두 제자가 엠마오로 가면서 며칠 동안 일어났던 그 당혹스런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발길을
재촉합니다.
한 남자가 끼어들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너무나 혼란스러워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이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을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예수님의 설명을 들으며 제자들의 마음은 뜨거워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온전히 드러냅니다.
성경은 권능의 책입니다.
우리들이 겪고 있는 당혹스런 혼란과 연결점을 알 수 없는 수많은 단편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수를 놓습니다.
뒷면을 보면 실들이 이리저리 복잡하게 교차하여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앞면에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퍼즐을 생각해 보십시오.
조각 그림 하나하나로는 무슨 그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을 하나하나 맞춰나가다 보면 마침내 아름다운 전체 그림을 보게 됩니다.

부모가 자녀들을 향한 아름다운 꿈들이 있듯이,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을 향한 아름다운 청사진을 가지고 계십니다.
인간 부모의 그림은 불명확하고 또한 욕심에 의해 왜곡되어 있지만, 하나님의 그림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체질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들을 향한 둘도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그림(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성공 여부가 아닙니다.
나의 성공에 초점을 맞추는 한, 나는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나의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한, 나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맞춰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를 맡겨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입니다.

찰스 콜슨은
미국 닉슨 대통령 시절에 대통령 보좌관으로 최고의 정치적 권력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머리가 비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독할 정도로 냉철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기획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여 닉슨 대통령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미국의 최대 정치 스캔들인 워터게이트 사건의 주역으로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때 상원의원 세 사람이 그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헤트릴드, 휴스, 퀘에라는 의원들입니다.
찰스 콜슨이 투옥되자, 그들은 그를 위하여 날마다 기도 시간을 정해 놓고 함께 기도하였고,
그를 찾아가 위로하며 책을 주었습니다.

평상시처럼 기도하고 있는 중에 퀴에의 마음에 그를 위하여 대신 옥살이를 해야겠다는 감동이
생겼습니다.
변호사였던 퀴에는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형기를 치를 수 있다는 특수 법조문을 들어 법원에
제안을 하였지만 거절당하고 맙니다.
그러나 퀴에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차갑기 그지없던 콜슨의 마음이 녹기 시작한 것입니다.
값없이 베푼 사랑 앞에 하늘을 찌르던 교만과 자아가 무너져 내렸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의 성공에 초점을 맞춘 삶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예수님처럼 누군가에게 사랑을 베풀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동료 죄수들 밖에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떻게 하면 저들을 사랑할 수 있을까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죄수들이 가장 싫어하는 빨래를 자청하였습니다.
죄수들은 그런 그의 태도를 믿지 못하고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봉사하는 그의 모습을 보고 하나둘씩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과 더불어 기도 모임과 사랑의 교제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평생 동안 집안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던 나는 저들을 사랑하면서 인생의 진정한
행복을 발견하였습니다.”

형기를 마치고 나와서 그는 정계로 돌아가지 않고
“교도소 선교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그 후에 그는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한 잡지는 템플턴상을 수상한 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현재 미국의 가장 건강한 사상적 영향을 끼치는 저술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전도자,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가장 따뜻한 이웃인 그가 새로운 이웃이 되어 우리 곁에 돌아왔다.”

하나님의 권능 앞에 블레셋은 당황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권능의 구경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당황하지 않습니다.
그 하나님의 권능에 순응합니다.
하나님 권능의 참여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처사에 겸손히 복종합니다.
병이 들게 하시면 그 병을 통하여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가고, 고난을 주시면 그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한계와 죄과를 인식하고 더욱 성결해집니다.
거룩한 성숙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을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그리스도의 신부”
“예수님의 친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을 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이루십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드디어 그 사람들에게서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눅 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