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이스라엘, 다시 하나님 앞에 서다 (사무엘하 7:1~9)

새벽지기1 2018. 8. 9. 06:55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으로 인해 큰 곤경에 빠졌습니다.
헤어 나올 방도도 없이 신음한 지 무려 이십 년.
지도자도 없습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신세입니다.

그때 사무엘이 백성들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사무엘이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이방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 제하라. 그리고 오직 여호와만 섬기라.
그리하면 블레셋의 손에서 구출되리라.”
아스다롯은 바알 신의 아내로 알려진 여신입니다.

그리고는 모든 백성들을 미스바로 불러 모았습니다.
사무엘의 지시에 따라
이들은 여호와 앞에 물을 길어 붓고 금식하며 회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였다는 소식을 들은 블레셋이 쳐들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두려워 떨며 사무엘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쉬지 말고 부르짖어 우리를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도록 기도해주세요.”
이에 사무엘은 어린 양을 취하여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고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늘에서 번개가 내려 블레셋 군대의 진용을 무너뜨렸고,
용기백배한 이스라엘 군대가 나가 싸워 블레셋 군대를 궤멸시켜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미스바 성회”와 “에벤에셀의 하나님”으로 기억하며,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을
깨워 난국을 타개하는 프로그램으로 여러 교회에서 시행하고 있습니다.

그 구체적인 방법들은, ‘우상을 제하라’ ‘금식하라’ ‘회개하라’
어린 양을 잡아 번제로 드렸듯이 ‘헌금을 드리라’ ‘부르짖어 기도하라’ 등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무엘이 모든 백성을 대표하여 부르짖어 기도했고 그 결과가 기적으로
나타났듯이, 목사의 지시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교인들은 목사의 지시에 따라 이 방법들을 열심히 행합니다.
여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성경 본문에 그 방법이 정확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난국에 빠졌을 때는 이 매뉴얼대로 행하지 않으면 큰 죄를 범한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뉴얼대로 열심히 행하며, 하나라도 생략하면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런데 결과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간혹 난국이 타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그 매뉴얼은 절대적인 것이 됩니다.

광야에서의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멀고 험한 길, 조악한 음식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원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불뱀으로 징계하셨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탄원하자, 하나님께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 물린 자가 그 뱀을 보면 살리라.”(민21:8)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였습니다.
정말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훗날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예루살렘에 하나님의 성전을 세운 후,
이 놋뱀을 하나님의 성전 한 쪽에 세워놓고 숭배하였습니다.(왕하18:4)
광야의 놋뱀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가톨릭에는 많은 성자들이 있습니다.
성자가 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반드시 그 사람에 의해서 기적이 일어나야 합니다.
성자들은 예수님보다는 급은 낮지만 숭배의 대상이 됩니다.
일종의 우상입니다.
사제가 주관하지 아니하면 그 성례가 효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주일을 제외한 성일(聖日)이나 성물(聖物), 성인(聖人), 성지(聖地)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특정 사람이나 물건, 특정 장소나 날짜, 특정 방법이 기적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그 은혜로 인하여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유일한 예루살렘 성전도, 예수님의 무덤도 없애셨고, 모세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바울이나 베드로가 로마 교회를 세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도구로 사용된 그 어떤 것도 높여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라면, 자신을 도구로 사용해 주신 하나님에 대한 무한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 미스바 성회가 그리스도인들의 단순한 관습으로 고착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를 새롭게 하는 하나님 사건이 되어야 합니다.

유월절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권능으로 구원받은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관습으로 행하라고 유월절을 제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출애굽 사건을 오늘의 삶에서도 새롭게 경험하라는 것입니다.
부활절, 오순절, 크리스마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부활로 새로 제정된 주일이 오늘의 나를 새롭게 만드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잘못된 생각, 고착된 사고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이로운 날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의 법의 그 놀라운 일을 보게 하소서.”(시119:18)
이 시편 기자의 소망이 우리 모두의 소망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사건을 어떻게 새롭게 인식해야 할까요?

본문에서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하는 말씀은 2절 말씀입니다.
“궤가 기럇여아림에 들어간 날부터 이십 년 동안을 오래 있은지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

블레셋의 손에 넘겨졌던 하나님의 법궤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이스라엘로 되돌아 왔고, 기럇여아림에 안치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삼만 사천 명의 전사자를 내었고, 지도자였던 엘리 가문이 파멸해 버렸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수십만의 백성들이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은 난세가 아닙니다.
이 상황에서 이십 년 동안이나 별 탈 없이 지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그 답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 여호와를 사모하니라.”입니다.

‘사모하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는 ‘나하’, “슬퍼하다” “크게 울다”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며 부모 잃은 고아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애타게 찾았습니다.

여호와를 애타게 찾는 마음, 이 마음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를 ‘나하’하는 사람의 심령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42:1)라고 시편 기자는 말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과 성경 이야기를 하면
마른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흡수합니다.
그야말로 ‘폭풍흡입’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살아납니다.

성경은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를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고 합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겪고 있는 문제를 사람들은 애써 외면합니다.
직시하기엔 너무나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나를 둘러쌀 때가
바로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실 절호의 찬스입니다.

그 어떤 문제든 그에 대한 해답이 성경에 명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와 우리를 만드셨기에, 당연히 그에 대한 해결책과 답을 가지고 계십니다.
성경을 통하여 그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조종하여 내 뜻을 관철시키려는 마음을 버리십시오.
단답형의 답을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문제해결의 종교 매뉴얼을 버리십시오.
지시에 따라 생각 없이 순종한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욥은 다복한 당대의 최고 부자였습니다.
자녀들과 재산을 하루아침에 다 잃고 온갖 병까지 얻었습니다.
아내는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욥은 최고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 속에 던져졌습니다.
그의 경건한 친구들이 찾아와 그 재난에 대한 종교적인 다양한 해석과 답들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욥은 수긍할 수가 없었습니다.
욥은 한사코 하나님만을 찾았습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욥38:2)

이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는 질문을 필두로
수많은 질문들을 욥에게 하셨습니다.
욥의 고난에 대한 아무런 답도 해주지 않으신 채로, 질문만 하셨습니다.
욥은 어느 것 하나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욥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42:5)

어떤 답도 얻지 못한 욥이 왜 그런 말을 하였을까요?
우리 하나님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 너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신비조차도 침묵합니다.
욥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어떻게 만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습니다.
그렇다면 내 자신을 그 말씀에 맡기고 삶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눈으로 뵐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나하’하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사람을 보내십니다.
바로 사무엘입니다.
백성들 앞에 선 사무엘이 드디어 입을 엽니다.

“너희가 진심으로 여호와께 돌아오려거든 이방 신들과 아스다롯을 너희 중에서 제하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여 그만 섬기라. 너희를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건져내시리라.”

사무엘은 국방을 튼튼히 하고 경제부흥을 일으켜 블레셋을 제압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무엘은 백성들에게 요구를 합니다.
그 요구는 단 하나,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지도자가 나라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하신다는 것을 사무엘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바알과 아스다롯을 제하라는 것은 단순히 우상을 파괴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아스다롯은 바알신의 아내로서,
로마 시대에는 아프로디테라고 불렀는데, 곧 미의 여신 비너스를 말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날은, 머리는 텅텅 비고 마음은 황량하고 영혼은 죽었어도

그저 돈 있고 외모만 되면 행세하는 시대입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바로 바알과 비너스가 지배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나 오늘만큼 외롭고 무섭고 비정한 시대도 없습니다.

나를 이 상태 이 모습으로 그저 그런 집안에서 태어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보내셨을 때는
내 안에 이 땅을 신나게 살아갈 수 있는 충분한 복이 이미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풍요와 미모를 좇는 발을 멈추고 하나님을 향하여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독대하며 내 안에서 그 복을 찾아보십시오.
그래야 삽니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오른 사무엘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는 왕이나 대통령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존재입니다.
백성들을 통치하라고, 더군다나 백성들 위에 군림하라고 세우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라고 세워진 존재입니다.
누구보다도 사무엘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기적은 태초부터 존재합니다.
은혜의 편재성(遍在性)입니다.
우주와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은혜이고 기적입니다.
기도 안 한다고 안 나타나고 기도한다고 나타나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특정한 사람이 주도한다고 나타나고 그 사람이 없다고 안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일이 터졌습니다.
이 일이 우연인가, 귀신의 조화인가, 사람들이 일으켰는가, 그 원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소리를 내며 우왕좌왕합니다.
여기에 교인들도 입을 보탭니다.
난무하는 아우성 가운데,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시각에서 이 일을 해석해 주며,
그 일을 하나님 사건으로 전환시켜주는 사람입니다.
사무엘이 현재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의 말은 사무엘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가르치신 내용들입니다.
다만 사무엘은 이미 그 삶을 살고 있으며,
우왕좌왕 탄식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살라고 당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뿐입니다.

사무엘은 그 곳에서 물을 길어 여호와 앞에 부었습니다.
그동안의 죄를 씻어내는 의식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입으로 외쳤습니다.
“우리가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이제 여호와께 돌아오겠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은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온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킨 사람입니다.
누구나 사무엘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사무엘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죽음의 자리에서도 하나님께 향해 있는 사람은 사무엘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8)

갈릴리는 억압과 고통과 슬픔의 도시, 탄식과 실패의 마을입니다.
이제나 하나님의 기적이 임할까 탄식하던 어느 날 문득, 내가 갈릴리임을 깨닫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미 그곳에 먼저 와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목사로 예배를 인도합니다.
결혼식과 장례식을 집례 합니다.
아픈 사람을 찾아갑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낙담한 청년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잘난 척하는 사람들도 만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벌써 그곳에 먼저 와 계십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당한 일을 하나님 사건으로 바꾸고 계십니다.
저는 다만 옆에서 거들 뿐입니다.

사람들은 모릅니다.
이미 와 계신 예수님을.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압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일에 기꺼이 동참합니다.
회개란 하나님의 일에 나도 함께 하겠다는 뜻입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일은 언제나 그분의 사랑과 은혜와 기적으로 가득합니다.
그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을 통해 기적이 일어난 것뿐입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기에 그 기적은 별로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동시에 차별이 없기에 세상에 둘도 없는 감사한 것입니다.

탄식과 고통 속에서 풍요와 외모를 좇는 삶에서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 그 곳을 “에벤에설”이라 명명하였습니다.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도우셨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