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아니로소이다' (사무엘상 8:18-22)

새벽지기1 2018. 8. 31. 08:44


“어이, 요즈음 무슨 책 읽고 있어?”

전라도 땅 영광, 산속에 살면서 환경운동을 하고 있는 친구와 전화 통화하면서 물었습니다.
그 친구가 추천해 준 책이 “호오포노포노의 비밀”이라는 책입니다.

하와이 원주민의 말인 ‘호오포노포노’는 ‘바르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호오’는 ‘원인’, ‘포노포노’는 ‘완벽’이란 뜻입니다.
호오포노포노는 하와이 원주민들의 문제해결 방법입니다.

이하레아카라 휴렌 박사는
하와이 주립병원 내 정신 요양시설에서 임상심리학자로 일했습니다.
1984년 처음 통제구역 병동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격리 병실은 너무나 거칠어 통제 불능 환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환자들 사이에서의 빈번한 폭행을 방지하기 위해 금속 팔찌와 족쇄가 채워졌고,
심지어는 직원들까지 폭행하는 일은 다반사였습니다.
갱생 프로그램을 시행할 엄두도 못 내었고,

환자들을 그대로 수용 방치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일이 없었습니다.
병원 환경은 침체 그 자체였고, 직원들의 스트레스도 극심하여 결근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고자 휴렌 박사는 ‘호오포노포노’법을 적극 시행하였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3년 후 휴렌 박사가 병원을 떠날 때, 격리실과 팔찌와 족쇄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폭력도 현저히 감소했습니다.
가족들의 면회가 잦아지고 다양한 갱생 프로그램이 시행되어 환자들의 상태가 호전되었으며
퇴원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물론 직원들도 생기를 찾고 열심히 환자 돌보기에 매진하였습니다.

‘호오포노포노’법이 무엇이길래, 이런 놀라운 결과를 얻은 것일까요?

‘호오포노포노’법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이 내 자신이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나를 정화시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나를 어떻게 정화할까요?
휴렌 박사의 제안은 단 네 마디를 조용히 내 마음에 속삭이는 것입니다.

“미안해요.”
“용서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정말일까요?
이 네 마디가 나를 정화할 수 있을까요?
내가 정화된다고 그 실타래처럼 꼬인 문제들이 바로 잡힐까요?
휴렌 박사의 대답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휴렌 박사는 “뉴에이지 운동가”입니다.
뉴에이지 운동이라면 기독교는 펄쩍펄쩍 뜁니다.
그런데 뉴에이지 운동이 왜 일어났을까요?
서양에서 시작된 뉴에이지 운동은, 서양의 중심 종교인 기독교가 복음을 왜곡 오용하고,
목회자들은 번영을 파는 종교 장사꾼으로 전락하고 교인들이 오직 자신만 챙기는
이기주의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책을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곤고한가, 사람들이 진정한 멘토와 구원을 얼마나 갈망하는가,

오죽 했으면 한 치 앞을 모르는 내 안에서 절대를 찾고,

내가 절대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의 책을 받히고 있는 빈약한 논조와 예화를 읽으면서 성경의 풍성한 자료와
깊이와 넓이를 새삼 절감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본 논조와 태도는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인간이신 예수님을 추구하고
닮아가고 동행한다는 점입니다.
그 자체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요즈음 서구 기독교에서 SBNR이라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Spiritual but not religious’, 즉 “영적인, 그러나 종교적이지 않은”이라는 뜻입니다.
교회에서의 종교행위 강조와 그에 대한 맹종에 지친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삶을 추구하는
기독교 운동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과 용서’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외에는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로마 식민지인 이스라엘의 상황은
요즈음과 비교조차도 할 수 없는 부조리하고, 절망적이었습니다.
하지만 200년이 지나면서 예수님께서 심어주신 사랑과 용서의 능력은 온 로마를 뒤덮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들은 늘 실수하고 죄를 짓는 연약한 인간이기에

예수님의 감사와 사랑과 용서에 ‘사과’가 덧붙여집니다.

미안해요, 용서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정말 이 네 마디를 열심히 말하며 또한 마음에 담고 사람을 대한다면 내 자신은 분명 정화,
힐링 되며, 내 가정과 내 직장과 이 교회만큼은 살만한 곳이 되며, 그 작은 것들이 모여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현재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제도에서 군주제로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무지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이는 민주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바꾸자는 요구보다 훨씬 더 큰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사무엘은 군주제로 인한 폐해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합니다.

“그가 너희 아들들을 취하여 그 병거와 말을 어거케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딸들을 취하여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를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의 제일 좋은 것을 취하여 자기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의 소산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너희 양 떼의 십분의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한 마디로 말해서, 이스라엘 온 백성이 왕의 종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리 높여 외칩니다.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열방과 같이 되어 우리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사무엘상8:19-20)

백성들은 사무엘의 말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사무엘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사무엘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백성을 향한 진정한 사과입니다.
“미안해요, 용서해요.”라는 말을 먼저 했어야 합니다.
아들들의 불의에 대해서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인간은 죄와 실수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죄와 허물에 대해 하나님께 행하는 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사람들에게 행하는 것은 ‘사과’입니다.

회개와 사과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요?
회개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
예배보다도 용서와 화해가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교우 중 한 분이 성서학당의 강의를 듣고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옳은 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리고 큰 용기를 내어 잘못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용서를 구했습니다.
그러자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죄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하실까요?
용서를 구하라 하실까요?
왜 회개하면 그 어떤 죄도 용서하시는 것일까요?
죄 짐을 지고 괴로워하며,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제대로 살지 못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가 너무나 불쌍하신 것입니다.
죄 짐은 하나님께 맡기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사무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로소이다!”
백성들이 엇나가 버렸습니다.

자녀들이 엇나갑니다.
사실 이 문제는 경제 정치보다 더 심각합니다.
이에 대한 가장 큰 책임은 부모들입니다.

독일에서 성장한 한 유대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대교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었고 온 가족을 신앙으로 잘 인도하였습니다.
그 소년은 누구보다 아버지를 존경하였고,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역시 신앙생활을 잘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소년이 십대 때, 다른 도시로 이사를 가야 했습니다.
그 도시에는 유대교 회당이 없었고, 루터교회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지역 주민들은 모두 이 교회를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었고, 당연히 유력 인사들도 모두
이 교회 소속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유대교를 버리고 루터교로 전향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놀란 가족들이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업상 유리하기 때문이다.”
소년은 당황했고 너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일순간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이 사라져 버리고,

그 자리에는 아버지에 대한 깊은 실망감이 자리 잡았습니다.
어떻게 사업을 이유로 유대교를 버릴 수 있단 말인가?
곧이어 아버지에 대한 실망감은 분노로, 비탄으로 바뀌었습니다.

훗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대영 도서관에서 한 권의 책을 씁니다.
그 책은
기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고 사람들을 하나님 없이 살도록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 소년은 바로 공산주의 이론의 창시자 “카르 마르크스”이며, 그 책은 “자본론”입니다.
한 소년의 가치관을 왜곡시킨 한 아버지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전쟁과 불행과 도탄에 빠져버렸습니다.

가족을 위하여, 사업을 위하여 그 정도의 변절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사람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유대교를 버리고 루터교를 택한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카르 마르크스의 아버지의 잘못은
눈앞에 보이는 이득을 위하여 신앙의 지조를 버렸다는 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귀담아들을 말을 하였습니다.
“인간의 가장 중요한 적은 가난도 전쟁도 아닙니다.
‘거룩에 대한 포기’입니다.”
“거룩에 대한 포기”란 하나님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는 말입니다.

부모나 리더가 거룩을 포기할 때,
따르는 사람들은 엇나간다는 사실을 마음에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내가 깨달았을 때, 그 기회를 놓쳐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반드시 사과해야 합니다.
진심어린 사과는 아무리 오래된 원망이라도 녹여 버립니다.
먼저 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서 있어야 하고, 사람들을 하나님을 향해 서게 해야 합니다.

자,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왕을 원하는지 알아봅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왕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왕이 자신들을 지켜 주리라 믿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사람 의존증”(someone sickness)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일종의 정신병입니다.
특정한 사람을 만나야
자신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으며 그 사람을 찾아 헤매는 사람들입니다.
이 병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은 없습니다.
의존하는 사람에 의해 일희일비합니다.
사정없이 휘둘리다가 끝내 파멸해 버립니다.

왜 사람에게 의존하는가?
스캇 펙 박사가 그의 책 ‘거짓의 사람들’에서 예리하게 이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바로 ‘무지’와 ‘게으름’ 때문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무지에서 벗어나려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가 싫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내 영혼의 문제까지 맡겨버리고 그 사람을 맹종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너희가 너희 택한 왕을 인하여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삼상8:18)

‘왕’ 대신에 내가 의존하는 사람을 집어넣어도 이 말은 통합니다.

성경에는 수없이 사람들을 의지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시편146:3-4)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나,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시편118:8-9)

‘사람 의존증’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은 도와주고 사랑을 베풀 존재이지, 절대 신뢰의 존재가 아닙니다.
누구나 자체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깁니다.
사람이 실망시키거든 그러려니 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왕을 세우라”

하나님께서는 잘못인 줄 아시면서도 허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적 허용”이라고 합니다.

“심판적 허용”
대단히 심각한 말입니다.
허락 받았다고 좋아하지만, 그 끝은 심판이라는 말입니다.
성도들의 삶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입니다.
열심히 기도하여 구하지만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줄 알고 신나게 살다가 큰 어려움에 봉착하여 고통을 당합니다.
보증을 서지 말라하셨는데, 보증을 서서 낭패를 당하는 경우도 한둘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당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생략)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5:16-22)

그리하여 평강의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셔서 우리 영과 혼과 몸이
주께서 오실 때까지 흠 없이 보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