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왕이 된 남자 (사무엘상 9:15-22)

새벽지기1 2018. 12. 20. 07:55


지난주의 ‘작은 음악회’는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특히 남성 중창단의 노래는 어떤 프로 중창단보다 훨씬 좋았습니다.
아마추어들이 모여서 화음을 맞추고, 게다가 마음까지 맞추며 잘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출연자들은 모두 다 빛나는 주인공들이었습니다.
내년에는 아예 합창대회로 하면 어떨까요.
그러면 우리 교회에는 노래로 가득할 것입니다.

100년 전, 영국의 기독교 저술가 체스터턴은 식탁에서 식구들이 둘러 앉아 찬송하면 자연스레
화음을 맞추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웃을 수 있다는 이유로, 한 사람만이 웃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개그맨들이 우리를 웃겨줍니다.
가수들이 우리 대신 노래를 불러줍니다.
그들은 왕이고, 우리들은 그저 들러리요 졸병들입니다.

이런 현상들은 오늘날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며칠 전 50대 남자가 단일화를 촉구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구국열사인 양 자못 비장한 것 같으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대선을 앞두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들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목청을 돋우며 목숨을 건 싸움을 합니다.
지지자가 다르면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 의존증’(Someone sickness)의 전형적 사례입니다.

이런 현상이 가장 심각한 곳은 교회입니다.
‘왕 같은 제사장들’이라는 교인들이, 정반대로 종교 전문가들을 철저히 의존하고 추종합니다.
그럴수록 좋은 교인이라고 합니다.
깊은 숙고로 대처해야 할 인생의 난제에는 단답형의 뻔한 답들이 주어지고,
종교에 의해 상품화되고 프로그램으로 변형된 성경 구절은 사람들의 얕은 생각마저 박제로 만듭니다.
그렇게 종교 소비자로 전락한 교인들에게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과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영예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자존감과 영예를 상실하면 누군가를 더욱 추종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사람들에게 휘둘리고, 세파에 찌들게 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왕이 된 남자”입니다.
영화제목입니다.

영화 “왕이 된 남자”는, 광해군과 닮은 광대가 15일 동안 왕 노릇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박근혜 여사는 여자라 보지 않았는지 몰라도,
안철수 씨와 문재인 씨는 그 영화를 보고 백성들을 위하는 것에 감동 받았노라고 말했습니다.

왕이 백성들을 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왕의 직무입니다.
그런데 그런 지도자들이 너무나 희귀해져서 당연한 그것이 감동까지 주는 가련한 세상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얼마나 기가 막혀 하실까, 그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 봐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을 달라는 아우성에 하나님께서 왕이 될 만한 사람을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레이더에 사울이라는 청년이 잡혔습니다.
사울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드셨을까요?

첫째, 사울은 준수한 청년이었습니다.

“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청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 하더라.”(삼상9:2)
사울은 집안도 좋고, ‘얼짱’에 ‘몸짱’이어서 군계일학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잘생겨야 하나님의 택함을 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하나님의 고육지책입니다.
하나님의 속 타는 마음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집안과 외모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위해서였습니다.
사무엘상 10장 23절 이하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가 백성 중에 서니 다른 사람보다 어깨 위나 더 크더라. 사무엘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보느냐? 모든 백성 중에 짝할 자가 없느니라 하니 모든 백성이
왕의 만세를 외쳐 부르니라.”
사울의 출중한 외모에 백성들은 쉽게 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외모에 현혹되어 놀아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 아버지처럼 그 사람의 중심을 봅니다.

물론 이왕이면 다홍치마입니다.
좋은 외모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람을 살리는 좋은 일을 많이 하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꼴 값’입니다.
겉만 번지르르 포장하여 자신을 팔 생각은 멈춰야 합니다.
요즈음 불행의 많은 부분이 외모 때문입니다.
좋은 자질과 재능을 받았음에도
외모로 인해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골치 아픈 나라 이스라엘의 역대 총리 중 가장 칭송받는 사람은 15년 동안
이스라엘을 이끈 골다 메이어 여사입니다.
그녀는 두 가지를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첫째는 못생긴 외모입니다.
학생 때 어떤 남학생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아 열심히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는 골수암입니다.
총리가 된 후 불치병에 걸리자 국민들에게 비밀에 부쳤습니다.
걱정을 끼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는 철저히 하나님만 의지하며

하루하루 연장되는 생명을 오직 조국과 국민들을 위해서 사용하였습니다.
일체의 사리사욕과 편파를 버렸습니다.

둘째, 사울은 순종하는 성품을 가졌습니다.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오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각처를 두루 찾아다녔습니다.

셋째, 사울은 겸손하였습니다.
종의 제안을 귀담아 들었고, 사무엘의 왕으로 택함을 받았다는 말에 “이스라엘 자파 중 자기
지파와 가족과 자신을 가장 미약하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낮추었습니다.
그의 겸손은 가식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그의 숙부가 물었으나
자신이 왕으로 택함을 받은 사실을 떠벌이지 아니하였고(삼상10:16),
왕으로 세워진 후에도 소수의 반대파들의 비아냥에도 잠잠하였습니다.(삼상10:27)
겸손은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최고의 덕목이며 성품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택함을 받은 사울에게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확증을 해주셨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나귀를 찾았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삼상10:2)
둘째는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떡을 받게 됩니다.(삼상10:3)

나귀를 찾았다는 것과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떡을 받은 것이 무슨 큰 증거냐 할 수도 있지만
굉장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맡겨진 일을 주께 하듯 하겠노라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사사로운 일들을 친히 해결해 주십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라.”(사61:6)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라.”
(사61:5)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리라 결단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보내셔서 내 생업을 대신 하게 하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일이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전도, 봉사, 헌금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
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사61:3)

슬픔과 상처와 소외 가운데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찬송과 사랑을 나눠주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 일은 가정과 직장과 사회 어디에서도, 내가 있는 어떤 곳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은 백성들의 슬픔과 상처와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과 사랑과 찬송으로 인도하라고 왕으로 세워졌고,
그 일을 하는 한 하나님께서 그의 개인적인 걱정과 근심과 의식주를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사울에게 성령을 받게 하셨습니다.
“네게는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너도 그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변하여 새사람이 되리라.”(삼상10:6)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하는 진리의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 되게 하시는 영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살리는 영, 생명의 영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에게 왕으로서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셨습니다.
이제 사울에게 남은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과 지혜로

백성들을 보호하고 살리는 일에 전념하는 것입니다.

예일대학 총장을 지낸 펠프 박사가 귀담아 들어야 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대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교육이 없는 대학 교육보다 대학 교육이 없는 성경 교육이 사람을 더 위대하게 만듭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리라 결단하는 것입니다.
주님으로부터 열심히 배우고, 설교를 귀담아 듣고 실천하며, 자기 개발에 힘써야 합니다.
이 일은 죽어서 주님 앞에 갈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들 모두에게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들”(벧전2:9)이라고 천명합니다.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배경, 출신, 능력에 상관이 없이 모두 왕 같은 제사장들입니다.

이 말씀은 갑자기 생겨난 말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 27절 이하의 말씀의 반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창1:28)

그런데 이 말씀을 잘못 번역하였습니다.
‘땅을 정복하라’와 ‘다스리라’는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먼저 ‘정복하라’는 히브리어로 ‘카바쉬’라고 하는데, ‘발로 지그시 누르다’는 뜻입니다.
땅은 히브리어로 ‘아다마’라고 합니다.
‘아담’이 ‘아다마’에서 나왔습니다.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다.’라는 말은 곧 ‘아다마로 아담을 지으시다.’입니다.

“경작할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안개만이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 창세기 2장 5절, 6절 말씀입니다.

아다마로 아담을 지으셨는데, 아다마의 운명은 아담의 손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아도 사실은 굉장히 많습니다.
내 몸, 생각할 수 있는 머리, 재능,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내가 어떻게 사용하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땅을 정복하라.’는 말, 즉 ‘아다마를 카바쉬하라.’는 것은
칭기즈칸이나 나폴레옹처럼 영토를 확장하라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내 안에 있는 탐욕과 이기심과 욕망을 누르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끝없이 올라오는 죄성을 지그시 누르라는 것입니다.

동생 아벨을 죽인 가인에게 하나님께서는 “죄를 다스릴지니라.”고 하시면서 그렇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문을 드나들 때마다 그 사람을 넘어지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가인은 자신 안에서 꿈틀대는 죄를 다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아다마를 카바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워진 사울 역시 훗날 초심을 버리고 자신의 죄를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아다마를 카바쉬하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많은 것들은 잡초가 되고 엉겅퀴와
가시나무로 뒤덮인 황폐한 곳이 되어버립니다.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에서 ‘다스리다.’는 히브리어 ‘라다’로,

군림하고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살게 하다.’는 뜻입니다.

내 자신이
엉겅퀴와 가시덤불로 뒤덮인 황량한 들인데 절대로 다른 생물들을 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의 지도자들을 보십시오.
대부분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기를 쓰고 잡은 권력으로 군림하고 통치할 생각만 합니다.
그럴진대 누가 돼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흥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실을 아파하며 탄식하며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그 외로운 마음을 한번 헤아려 보십시오.
간신히 선발한 사울은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언제든지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나섭니다.
그리고 결단과 초심이 변치 않을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먼저 ‘나를 다스리리라.’

‘내게 맡긴 사람들을 살리리라.’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 뛰시며 내 복잡한 일상을 정리해 주십니다.
그 일 열심히 하라고 베풀고도 남는 의식주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리고 어떤 난제도 해결할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를 주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십니다.”(대하1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