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객과 고아와 과부를 배부르게 하라 (신명기 26:7-12)

새벽지기1 2018. 12. 16. 08:01


맹구가 울면서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봉구가 날 때렸어요.”
선생님이 봉구에게 때린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봉구가 씩씩거리며 말했습니다.
맹구가 1년 전에 자기를 하마라고 놀렸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아니 1년 전 얘긴데 왜 지금 친구를 때리는 거야?”
그러자 봉구 왈.
“어제 동물원에 갔다가 첨으로 하마를 봤거든요.”

뭐든지 뒤늦게 깨닫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장 늦게 깨닫는 것은 ‘사랑’과 ‘은혜’입니다.
때늦은 후회는 대부분 뒤늦게 깨달은 사랑과 은혜로 인함입니다.
부모에 대한 은혜만 깨달아도 철이 듭니다.
철이 든다는 말은 계절을 안다는 뜻으로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인생을 제대로 살게 됩니다.

한해를 되돌아봅시다.
당연히 힘든 일, 원치 않는 일이 훨씬 더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좋은 일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다만 나쁜 일은 아픔으로 남아 있고,
내가 원하는 일은 여전히 미해결로 남아 있어 내 마음이 불만족할 뿐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동영상을 보셨습니다.
물에게 사랑한다, 고맙다는 말을 하자 물의 구조가 아름다운 결정체, ‘육각수’로 바뀌고,
나쁜 말을 하자, 그 결정체가 깨져 흉악한 모습으로 바뀝니다.

눈이 내립니다.
그 눈 하나하나는 모두 아름다운 육면체입니다.
마치 그 작디작은 눈송이 하나하나가 누군가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누가 했을까요?

하나님께서 온 우주만물을 만드시고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고는 “심히 좋다.”고 가장 기뻐하셨습니다.
‘좋다’에 해당되는 히브리어 “토브”는 위대하다, 놀랍다, 완벽하다, 아름답다는 뜻으로,
그저 보기에만 좋은 것이 아니라, 속까지 만족스럽다는 뜻입니다.

만물들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좋다고 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하며
예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황홀한 단풍과 보석 같은 눈꽃송이를 만들어 냅니다.
다만 우리 사람들만이 예외입니다.

얼마 전 한 TV 프로그램에서 실험을 했습니다.
같은 병의 포도주를 각각 다른 잔에 따르고
한 잔은 험한 말을, 다른 잔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는 포도주 프로 감정사들에게 맛을
판단하게 하였습니다.
같은 병에서 따른 포도주지만 맛이 달랐습니다.

같은 솥에서 퍼낸 밥을 세 통에 각각 담아,
한 통에는 볼 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다른 한 통에는 “싫어한다.”는 말을,

나머지 한 통은 무관심으로 대하게 하였습니다.
한 달 후의 변화는 놀라웠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밥은 달콤한 술 향기를, 무관심으로 대했던 밥은 더러운 곰팡이를,
험한 말을 들은 밥에서는 시커먼 곰팡이가 피어오르며 가장 역겨운 악취가 났습니다.
정말 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몸은 70%가 물입니다.
비난과 핀잔과 냉대를 받은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당연히 병들고 아플 수밖에
없고, 사랑과 격려를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건강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는 기독교도, 회교도, 불교도에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종교를 초월한 창조주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의 구절을 들어
위협하거나, 하나님의 저주를 들먹이며 두려움을 조성하여 전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장 기본적인 뜻에 전혀 맞지 않는 것들입니다.
기독교의 기본적인 프레임은 사랑과 격려와 설득입니다.

지난주 호오포노포노 법으로 하와이정신병원을 3년 만에 정상화시킨
휴렌 박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나의 책임이며, 나를 정화하는 데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하며,
‘미안해요, 용서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의 네 마디를 마음에 담는 것이 그 출발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미안해요 용서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의 네 마디를 되뇔 때
물 70%의 내 몸은 건강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질서로 정렬되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은
물러나게 됩니다.

체스터튼이 말합니다.
“가장 끔찍한 상황은 진정으로 감사를 느끼는데, 정막 감사할 대상이 없는 순간이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무한 감사입니다.
감사와 기쁨은 참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가장 큰 비밀입니다.
자신을 감사의 대상으로 내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5:16-18)고 강조합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과 영혼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온전하게 보존된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고 강조합니다.
감사는 기쁨과 더 큰 감사를 낳습니다.

오프라 윈프리는
결혼하지 않은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 지독히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홉 살 때부터 사촌 오빠 등 많은 남자들에게 성폭행과 성적 학대를 당하고

14살에 미혼모가 됩니다.
그러나 그녀는 가난, 마약중독, 우울증 등 자살에 대한 온갖 필요충분조건을 갖췄지만
재기하여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여성이 되었습니다.
그 비결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감사 일기입니다.
매일 다섯 가지의 감사를 적었습니다.

“하나님, 오늘 날씨가 아주 좋습니다. 파란 하늘을 보여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하나님, 오늘 먹은 토스트는 참 맛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일기를 쓰는 동안 자신을 깊이 성찰하게 되고 자신은 결코 하찮은 존재가 아니며
모세와 같은 남다른 사명이 있다는 ‘신앙의 자각’과 ‘긍정적 자아의식’이 자라났습니다.

감사는 기쁨을 낳고, 더 큰 감사로 이어져 더 큰 기쁨을 생산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퍼져나갑니다.
그 힘으로 이 세상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 처음 수확한 곡식들을 하나님께 바치며 행한,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신26:5-10)

감사제물을 하나님께 드리며 가장 먼저 하는 것은 과거 선조들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회상입니다.
현재 내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내 개인 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신앙의 선조들의 고난과 물려주신 신앙으로 인한 것임을 명백히 하며,

그에 대해서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 신앙고백에서 ‘나’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다만 ‘감사하는 나’만 있을 뿐입니다.

이 신앙고백에 내가 없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항입니다.
감사의 기준이 내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살면 감사하고 내가 어려우면 감사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기준이 될 때, 모든 것이 헝클어져 버립니다.

체코의 전 대통령 구출라프 하벨이 말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잃으면 자신과 모든 사물의 위치를 정해주는 절대적인 좌표를
상실합니다. 상대적인 가치 밖에 없는 여러 좌표에 자신을 맞추다 보면 필연적으로
인간의 존재도 서서히 분열되고 그가 속한 세계도 괴멸할 것입니다.”
참으로 타당한 말입니다.

감사의 기준이 하나님이라면, 감사의 초점은 내 눈앞의 이익이나 현재의 나의 안녕을
떠나 하나님의 뜻과 그 실현에 맞춰집니다.

그래서 예언자 하박국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3:18)
이 고백은 모든 참 하나님의 자녀들의 공통된 고백입니다.
그래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합3:17)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한해를 보내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에 진보가 있었습니까?
이제는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어졌습니까?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없습니다.
그 믿음과 사랑 위에 때가 이르매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자, 이스라엘의 신앙고백과 감사제를 기쁘게 받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시는 당부의 말씀을 들어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 거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신26:11)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그 감사의 기쁨을 나누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장 오래된 신앙고백입니다.
참된 신앙은 곧 구제와 나눔으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430년간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주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구제와 나눔은 가장 오래된 하나님의 당부요, 명령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큰 계명 두 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몸과 마음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돌보라는 오늘 말씀의 본문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두 계명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곧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요,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첫 시작부터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위한 없어서는 안 되는
두 바퀴입니다.
내 삶에 진보가 없다면 그 원인은 이 두 바퀴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돕는 방법까지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셋째 해,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를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신26:12)

이 구절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한 해의 추수가 끝나면 모든 소출의 10%를 레위인들에게 가져옵니다.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일군으로 구별되어 토지를 분배받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레위인들은 그 중 10%를 제사장에게 보냅니다.
이렇게 받은 십일조는 성전 관리와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의 생활비로 사용합니다.
이것을 ‘첫째 십일조’라고 합니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에는 땅도 쉬라고 농사를 짓지 않습니다.
안식년 다음 해부터 다시 농사를 짓습니다.
2년이 지나 셋째 해가 되었습니다.
셋째 해에는
소출의 10%을 레위인에게 주지 않고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들에게 나눠줍니다.
여섯째 해의 십일조도 그렇게 합니다.
이 이웃 구제용 십일조를 ‘둘째 십일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요즈음으로 말하자면 헌금의 33%를 이웃 구제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웃 구제로 헌금의 33%보다 훨씬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맥추감사절과 추수감사절 헌금은 전액 장애우 가정 지원, 특히 겨울철 난방비
지원으로 사용될 것이며, 장애우 독립가정을 힘이 닿는 대로 세워나갈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 효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1998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의과대학에서 시행한 연구로서 테레사 수녀처럼 남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거나 선한 일을 보기만 해도 인체의 면역기능이 크게 향상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의 침에는 면역항체 'Ig A'가 들어 있는데,

근심이나 긴장상태가 지속되면 이 항체가 현저하게 줄어듭니다.
면역항체가 줄어들므로 당연히 병에 취약하고,

면역항체가 없으므로 자가 면역 결핍증에 걸립니다.
학생들에게 마더 테레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보여주고 'Ig A' 수치의 변화를 비교
분석한 결과, 'Ig A' 수치가 실험 전보다 일제히 높게 나타났습니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랬는데, 직접 도울 때는 얼마나 그 수치가 높아지겠습니까?

남을 도울 때 느끼는 기분을 '헬퍼스 하이(Helper's High)라고 합니다.
남을 도울 때의 심리적 포만감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되어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돌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치게 됩니다.
생색을 내지 말아야 하고 비장해지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른 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남을 위한 사랑의 일을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라는 철저한 감사가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4:29)

이 말씀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온전히 이뤄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