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여호와의 궤를 어찌할꼬 (사무엘상 6:1-9)

새벽지기1 2018. 8. 7. 06:45


해마다 인터넷에서 “다윈상”이 수여되는데,
열심히 머리는 썼으나 결과는 오히려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에게 줍니다.
이 상을 받은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번지점프를 잘못한 사람.
번지점프대에서 바닥까지 높이를 정확하게 계산하고 줄 길이를 맞추고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그 줄은 고무줄이었습니다.

세 명의 팔레스타인 테러범.
시한폭탄을 몸에 지닌 채 이스라엘 번화가로 갔습니다.
그런데 거리에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폭탄은 시간에 맞추어 폭발하였고 자신들만 죽었습니다.
그 이유는 섬머타임이 끝났음을 계산에 넣지 않고 시계를 맞추었기 때문이며,
그때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아침 기도 시간이라 사람들이 아직 거리로 나오기 전이었습니다.

어떤 목사는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목욕실에서 연습하다가 비누에 미끄러져 뇌진탕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다윈상 수상은 죽은 다음에야 받는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 군대를 대파하고 하나님의 법궤까지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에 큰 재앙을 가져왔습니다.
뜨거운 감자처럼 되어 버린 하나님의 법궤가 블레셋 도시들을 전전한 지 벌써 일곱 달이
되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나?
그래서 블레셋 정치 지도자들은 머리를 맞대고 논의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정치적으로 풀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섬기는 신의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느냐? 그 방법을 강구하라.”
그러자 그들의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이 말합니다.
“이스라엘 신의 궤를 이스라엘로 돌려보내되, 그냥 보내지 말고 속건제를 드려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병도 낫고 재앙도 피할 수 있습니다.”

속건제란 손해 배상의 제사로,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손해배상을 하는 제사입니다.
속건제물로는 금독종 다섯과 금쥐 다섯이 합당하다고 건의하였습니다.
금독종은 부스럼 모양을 금으로 만든 것인데 블레셋에 내린 병을 나타내는 것이고,

금쥐는 그 병을 옮기는 것은 쥐라 생각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 수가 다섯인 이유는, 다섯 개의 도시 국가로 이뤄진 블레셋의 각 나라가 공평하게 하나씩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이어서 말합니다.
“애굽인과 바로가 그 마음을 강퍅케 한 것같이 어찌하여 너희가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겠느냐?
그가 그들 중에서 기이하게 행한 후에 그들이 백성을 가게 하므로 백성이 떠나지 아니하였느냐?”

이집트의 파라오가 계속 하나님께 대적하다가 끝내는 온갖 재앙을 당하고
노예 이스라엘 백성들도 놓아주었음을 상기시키고, 여호와께 인색하게 굴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들도 하나님의 권능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이 이어서 말합니다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메어보지 못한 암소 둘로 끌게 하세요. 그리고 송아지는 집으로 돌려
보내고 잘 지켜보세요. 만약 그 암소들이 곧장 이스라엘로 가면, 하나님이 재앙을 내린 것이고,
만약 암소들이 송아지에게 가면 이 재앙은 우연히 생긴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블레셋 왕들은 그들의 처방대로 열심히 준비하였습니다.
다섯 도시들은 각각 금을 모아다가 금독종과 금쥐를 만들고, 또 공동으로 추렴하여 새 수레를
정말 열심히 만들었습니다.
그 자리에는 제사장들이 입회하여 열심히 감독하였고, 문제가 생기면 또 열심히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결정하였습니다.
수레를 끌 암소 선발 대회도 열었습니다.
이제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블레셋의 다섯 왕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모든 백성들도 다 모였습니다.
처음 보는 아름다운 새 수레에 모두들 감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궤가 나오자 사람들은 무서워서 고개를 숙였고,

금 덩어리들 담은 보물 상자에는 침을 꿀떡 삼켰습니다.
그리고 암소 두 마리에 수레를 달았습니다.
송아지들은 우리로 끌려가며 어미를 찾느라 ‘메메’하고 울었습니다.
이제 암소들의 엉덩이를 때려 출발을 시키고 모두 다 숨을 죽이며 바라보았습니다.
과연 이 암소가 어디로 갈 것인가?
자기 새끼에게 갈 것인가, 이스라엘로 갈 것인가?

그런데 소들이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향하여 가는 것이었습니다.
송아지의 애처러운 울음소리를 들으면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곧장 가는 것이었습니다.
블레셋의 다섯 왕과 백성들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그렇게 따라간 거리가 삼십 리 길.
서너 시간을 그렇게 따라간 것입니다.

이 일은 이렇게 끝나고 있습니다.
“블레셋 다섯 방백이 이것을 보고 그 날에 에그론으로 돌아갔더라.”(삼상6:16)

다섯 왕들은 분명 국가적 재난을 지혜롭게 해결하였다고 서로를 추켜세웠을 것이고,

오랜만에 편안한 잠을 잤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다윈상이 있었다면, 그들에게 그 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왜 그 상을 받는지 몰랐을 것입니다.

어리석음 중에 큰 어리석음은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더 큰 어리석음은 하나님의 권능을 확인하였음에도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이집트의 파라오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어리석음은 따로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과 그 권능이 얼마나 큰지 온 몸으로 체험하고도,
열심히, 열심히 하나님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현재 블레셋의 다섯 왕이 그랬습니다.

자, 근본적인 문제로 들어가 봅시다.
왜 하나님께서는 블레셋에게 재앙을 내리시는 것일까요?
흔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단세포적인, 틀린 생각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만 보호하신다면,

이스라엘이 패할 이유도 없고, 우리들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이스라엘을 대패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블레셋에게 재앙을 내리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은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올바로 깨달아야 제대로 살 수 있습니다.

블레셋 왕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은, 하나님의 목적을 몰랐으며 처한 곤경을 자신들의
종교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달래려고 했다는 점입니다.

이런 잘못은 오늘날 기독교에서도 자행되고 있습니다.
난치병에 걸렸습니다.
기도해서 생명이 15년간 연장된 히스기야 왕의 예를 들어,

‘부르짖어 기도’하라는 종교적인 처방을 내립니다.
사업이 부진합니다.
십일조와 새벽기도의 처방을 내립니다.

이 종교적인 처방들이 모든 난치병자들과 파산자들에게 통해야만 기독교가 진리가 됩니다.
그러나 이 종교적인 처방들이 극히 일부 사람에게만 통했습니다.
기독교가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다.
잘못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나 십일조, 새벽기도나 금식기도가 필요 없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 해결의 처방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부적이 아닙니다.
예배는 굿이 아닙니다.
기도는 주문이 아닙니다.
헌금은 복채가 아닙니다.

십자가는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예배는 그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께 가까이 가서 누구보다도 친밀해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독대하며 아픔을 토로하고 지혜와 능력을 구하여
무엇보다도 그 깊으신 뜻을 깨닫고 어떤 경우에도 그 뜻을 따르겠노라 다짐합니다.
마침내 죽음 너머의 하나님을 만나 죽음도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게 되고,
탐욕과 무지와 어리석음 때문에 무너진 나의 일을 미련 없이 버리고
하나님의 평강 가운데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이집트에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면서 하나님께서 반복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지라.” (출6;7)
“애굽 사람이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출7:5)
“왕으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이가 없는 줄 알게 하리라.”(출8:10)
“나는 세상 중의 여호와인 줄을 네가 알게 될 것이라.”(출8:22)

가장 먼저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다음으로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그 백성들, 나아가서는 온 세상에 여호와를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서로 도우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선하신 뜻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그 뜻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여 아브라함을 택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선하신 뜻을 가르치셨고,
아브라함은 우여와 곡절 끝에 100세 때 얻은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고,
마침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을 택하여 제사장 나라로 삼아 온 세상에 그분의 존재와
선하신 뜻을 가르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먼저는 지도자들의 잘못입니다.

이들의 잘못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선택을 이기적인 선민사상으로 왜곡하였습니다.
자신들이 잘해서 선택 받았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 선하신 뜻을 가르치는 대신,
하나님을 잘 섬겨 복을 받으라는 기복 신앙으로 변질시킨 것입니다.

참다못해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왜곡된 선민의식에 의해 개 취급당하던 소외된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셨고,
율법 준수로 하나님의 복을 받겠다는 기복신앙을 뒤엎어 버리셨습니다.
분노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렇게 하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 직전, 새 이스라엘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분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28:19-20)

예수님께서 가르치라는 것은, 율법이나 전도하는 방법이나 금식기도, 사람을 동원하는 방법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더 근본적인 것, 더 본질적인 것,
예수님처럼 생각하고 예수님처럼 사는 법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동행을 가르치고,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과의 긴밀한 소통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깊고 넓은 그 사랑을 가르쳐서,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으로 철들어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땅에서 당당한 리더로서의 행복과 보람이 가득한 삶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참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마음에 분명히 새겨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조정하거나 조작하는 방법은 절대로 없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왕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조정하기 위해 별짓을 다하고 있습니다.
다 부질없는 짓들입니다.
많은 목사들이 성경의 내용을 들어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발원하는 규칙들로 만들어 가르칩니다.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러한 부질없는 짓에 몰두하는 것을 멈추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창1:28)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계21:2)요, ‘가장 친한 친구들’(요15:15)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가장 친밀한 관계를 들어 삼위일체 하나님과 나와의 사이를 유비합니다.
친밀할수록 규칙이나 법도는 사라지고, 깊어지는 것은 사랑입니다.
진짜 사랑은 결코 무례하지 않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그의 책 “부활”에서, “사탄의 가장 성공적인 임무는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를
평신도, 비전문가라고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절대로 잊지 말고 늘 마음에 새겨야 하는 말입니다.

사랑에는 전문가, 비전문가가 따로 없습니다.
사랑 전문가라면 ‘바람둥이’일 뿐입니다.
‘아기 전문가’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엄마와 아기 사이에는 오직 사랑만이 있습니다.
그저 엄마가 공급하는 그 사랑을 먹으며 아기는 성장합니다.
사랑의 엄마 앞에서는 어떤 아기도 전문가가 될 필요가 없습니다.
기독교에도 전문가가 따로 없습니다.
사랑에 전문가가 따로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 전문가로 자처한다면 그는 무당과 같은 ‘종교기술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하나님을 조종하여 복 받는 종교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사랑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대신 예수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을 따라가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착각이나 오류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시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사람은 정신이 나간 사람입니다.

그 엄청나신 하나님 자신을
먼지만도 못한 우리들에게 사랑의 대상으로 내어주신 것 자체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그 하나님을 마음껏 사랑하며
공급하시는 은혜와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신나는 인생을, 열심히 베풀며 사십시오.

시편 기자가 노래합니다.
“노래하는 자와 춤추는 자는 말하기를 나의 모든 근원은 네게(하나님께) 있다 하리라.”(시8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