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우인목사

파멸을 막지 못하는 헛된 몸부림 (사무엘상 4:1-11)

새벽지기1 2018. 8. 1. 06:45


여행객들을 가득 태운 점보 여객기가 뉴욕에서 플로리다 마이애미로 향했습니다.
마이애미 공항에 착륙하기 위해 다가가는데 착륙 기어 작동 여부를 알려주는 전광판에
불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착륙 기어가 펴지지 않은 것인지, 전광판 전구가 이상이 생긴 것인지를 점검하는
동안 항공기는 거대한 곡선을 그리며 에버 글레이드 늪지대 위를 선회하였습니다.
조종사는 전구에 이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전구를 갈아 끼우려고 하였습니다.
전구는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옆에 있던 조종사까지 전광판에 달라붙었습니다.
그렇게 전구와 씨름을 하는 동안 그 누구도 항공기가 고도를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고, 결국 늪지대에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수십 명의 인명피해를 냈고 수백억 원의 항공기도 파괴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종사들이 그토록 집착했던 전구의 값은 겨우 75센트였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하찮은 것에 집착하다가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 보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무엇을 얻으려 이토록 애를 쓰는가 점검하는 일입니다.
혹시 내가 하찮은 것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본문에서 주목해야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백성이 진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로 오늘
불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게 하였는고.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블레셋과의 첫 번째 전투에서 무려 사천 명이나 전사하고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수뇌부들은 실패의 원인을 찾았습니다.
“아하. 하나님의 언약궤가 없었구나. 그래서 졌구나.” 결론을 내렸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거할 때나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궤를 앞장 세웠습니다.
그때마다 승승장구하였습니다.
그렇게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세우고,

실로에 성막을 설치하고 하나님의 법궤를 그곳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그 이후 사사시대 200여 년 동안 여러 전쟁이 있었는데,
그때는 하나님의 법궤를 가지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그럭저럭 외세의 공격을 버텨냈으나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손실이 너무나 컸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하나님의 법궤를 가져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실로에 있던 하나님의 법궤를 전쟁터로 가지고 왔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도착하자, 이스라엘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함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 함성이 블레셋 진영까지 흔들었습니다.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삼상 4:8)

블레셋 군사들도,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강한 신인가, 당시 최대 강대국 이집트도 맥없이
무너진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기 충전한 이스라엘 군대가 겁먹은 블레셋 진영을 치고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두 번째 전투 결과는 더욱 참담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삼만 명이나 전사하고 더욱이 하나님의 궤까지도 빼앗겨 버렸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질문 앞에 섭니다.
하나님의 법궤는 곧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전투에 계셨는데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팔짱을 낀 채, 방관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예배에 참석하고 기도도 합니다.
“내가 예배에 참석했으니까, 기도를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겠지.”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사태는 풀리지 않고 점점 악화됩니다.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기나 한 것이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에는 신의 이름으로 전쟁에 임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졌다는 것은 곧 그 신이 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앞세웠는데도 졌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보다 블레셋의 신이 강하다는 뜻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유대교의 실패이고, 사람들의 실패입니다.

아브라함 헤셀은
그의 책 “사람을 찾는 하나님”에서 종교의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지적합니다.

첫째, 신앙이 신조로 대체될 때.
신앙은 하나님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규칙으로 대체됩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한 결박을 풀어주며”라는 구절을 들어 일이 막히면 금식기도하면
풀린다는 공식으로 만들어 지키게 합니다.

둘째, 예배가 의식으로 대체될 때.
셋째, 사랑이 습관으로 대체될 때.
넷째, 신앙이 살아 솟구치는 샘이 아닌 물려받은 유산이 될 때.
다섯째, 기독교가 사랑의 목소리대신 권위의 이름으로만 말할 때.

결론적으로 알맹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없고 껍데기, 형식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이때 기독교의 메시지는 무의미한 소리로 전락해 버립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고 헌금하고 기도하였으니 이제는 복을 받겠지 생각하는 것은,
무당굿을 치렀으니까 이제는 액운을 면하고 복을 받겠지 생각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이름을 폄하하면서까지 하나님의 자녀들인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인들이
깨닫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의 성공 여부가 아닙니다.
내 자신의 변화와 성숙입니다.

아브라함 헤셀이 말합니다.
“현대인들은 ‘써먹기 위해’ 연구한다. 현대인들은 그 이용성을 따져 그 가치를 정당화한다.
그래서 하나님마저 이용하려 연구한다. 그 결과 하나님은 황금송아지가 된다.

기독교가 소원  충족의 수단이 될 때 하나님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무당은 점치러온 사람의 죄를 묻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으십니다.
우리들의 생각을.
우리들의 중심을 물으십니다.
그것도 준엄하게.
바로 이 점이 여호와 하나님과 기독교의 최고 가치 중의 하나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당시 사사로서 이스라엘 최고, 최대의 가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일시에 무너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엘리 제사장과 그 가문의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몇 년 전 캘리포니아 해변의 한 만에서
삼백 마리나 되는 고래가 갑자기 죽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원인은 고래들이 정어리 떼를 쫓다가 만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에 대하여 프레드릭 해리스는 이런 논평을 썼습니다.
“그 조그마한 고기들이 거인들을 죽음으로 인도하였다.”
고래들은 ‘먹이’라는 작은 목표를 추구하다가 떼로 참변을 당하였습니다.

의.식.주 문제가 어찌 작고 하찮은 문제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의.식.주 문제는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을 보지 못했고, 그것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고래의 파멸과 엘리 제사장 가문의 몰락의 원인은 동일합니다.
그저 눈앞의 먹이에 집착하다가 파멸을 당한 것입니다.
인생의 목표는 결코 먹이 사냥에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큰 먹이를 쫓고 있더라도, 그것은 하찮은 목표입니다.
하찮은 목표에 집착할 때,
거대한 힘도 일시에 무너져 버린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십계명 중 제1 계명은,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입니다.
흔히 이 제1 계명을 내 자신을 가장 강하게 옭아매는 계명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이고 오해입니다.
제1 계명은 우리들이 갇혀있는 혼돈과 흑암의 답답한 울타리를 걷어내고 우리의 삶을 확대하고
심화시켜줍니다.
양의 생명을 살리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케 하는 가장 중요한 계명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는 두려움과 불안이 있습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말합니다.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창 11:4)
그리고는 열심히 바벨탑을 쌓습니다.
흩어짐, 곧 불확실한 미래와 죽음입니다.
이를 면하기 위해 쌓아올리는 바벨탑이 곧 권력의 우상, 이데올로기의 우상,

명예와 권력과 부의  우상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에게 속삭입니다.
“더 높이 더 튼튼히 쌓지 못하면 흩어져 버려.”
“네 이름을 내지 못하면 흩어져 버려.”
끊임없이 불안과 두려움을 조장하며 바벨탑 쌓기에 몰두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이 우리들의 발목을 잡고 감옥에 가둬버립니다.

종교는 가장 무서운 족쇄와 감옥이 될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을 오해한 종교 엘리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율법화하고

교리와  규칙으로 만들어 지키게 하고 스스로는 예수님의 대리자로 무리들 가운데 군림합니다.
그 결과 평신도들은 교리와 규칙에, 자신들은 제도 가운데 갇혀 버립니다.

김기석 목사는 그의 책, “오래된 새 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마음의 심지에 하늘의 뜻이라는 불꽃이 점화되자 그는 직립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자기의 정체를 보냄을 받은 자로 여겼다.

보냄을 받은 자로 산다는 것은 보내신 분의 뜻대로 산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직립의 사람”입니다.
스스로 걷는 사람을 말합니다.
종교 지도자의 지시가 아니라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며, 예수님의 길을 자신의 길로 삼고

자진하여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 길이 어디를 향하는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나 좀 봐.”라는 자기 자랑이나 자기 과시도,

“아, 이 길을 가고 있는  나는 얼마나 거룩한가!”,

“정상에 기어코 오르리라.”는 비장함도 있을 수 없습니다.
강요된 것도 일방적으로 부과된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올레길을 걷듯, 오대산 단풍 길을 걷듯, 고개가 있으면 넘고, 계곡이 있으면 건넙니다.
힘들면 쉬었다 가면 됩니다.
한 줄기 시원한 바람과 이름 모를 들꽃이면 충분한 보상입니다.
어떤 위협도 죽음조차도 막을 수 없는 자유의 길, 게다가 영원한 생명과 잇대어 있는 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무한 감사만 있을 뿐 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여 하나님의 제사장 나라로 세우셨습니다.
엘리를 택하여 그 나라의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택하여 제사장으로 삼으셨습니다.
제사장이란 하나님을 대리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피조물들을 돌보고 다스리며,
동시에 피조물들을 대표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잊는다면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향한 치성도 밤낮 없는 내 노력도 나의 파멸을 막을 수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너무나 중요한 존재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나 자신의 성패가 공동체의 성패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영업회의에서 팀장이 매우 저조한 판매실적으로 팀원들을 나무라면서, 과거 프로 축구선수였던
신입사원에게 물었습니다.
“팀 성적이 좋지 않을 때 선수를 교체하지 않습니까? 그렇죠?”
그러자 그가 말했습니다.
“팀 전체에 문제가 있을 경우, 감독을 갈아치웁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이스라엘의 감독을 교체하는 중입니다.

난제가 산더미 같고, 먹고 살기 어려운 이때에 우리들은 어떤 감독이 되어야 할까요?

도스토예프스키 당시 러시아는 엉망진창이었습니다.
상류 사회는 향락과 타락의 극치를 보였고, 하층민들은 가난의 극치를 달렸습니다.
영적 빈곤과 도덕적 불결과 물질적 혼란의 시대에 대대적인 변혁이 절실했습니다.
누군가가 무엇을 해야 했지만 어디에서 시작하는지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백치’를 통해 한 인물을 그려냈습니다.
백치 미슈킨 공작입니다.

미슈킨 공작은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얼마나 복잡한 사회인지 전혀 관심이 없는 백치 같은 사람입니다.

돈이 얼마나 있으며, 어떤 가문 출신인지, 누구랑 인맥이 있는지에만 관심이 있는,

온통 가식과 허영 덩어리인 상류사회 사람들이 미슈킨에게 접근합니다.
단지 공작이라는 지위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슈킨 공작은 돈과 지위와 권력에 관심이 전혀 없습니다.
어떤 영향력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이용할 줄도, 간섭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당황했습니다.
미슈킨 공작을 어떻게 이용할지, 어떻게 조종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기존 삶의 방식이 전혀 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냥 거기에 존재할 뿐이었는데도, 사람들은 그 주위에 모여 자신들의 그동안 숨겨왔던
아픔과 고통과 고뇌를 털어놓기 시작했고, 그 사회의 중심인물이 되었습니다.
미슈킨 공작의 특징은 사심은 전혀 없고 그저 선하다는 것입니다.

리더 중의 리더는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목수의 아들입니다.
천민 출신입니다.
교육이라고는 당시 유대 어린이들이 모두 그랬듯이 회당에서의 유대교 종교교육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셨습니다.
이 사실이 가장 중요합니다.
예수님만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다른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사셨고 우리들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 구약 성경의 내용들입니다.
다만 다른 것은, 당시 사람들은 종교지도자들의 가르침을 추종하며 율법에 매인 반면,
예수님은 구약 성경의 내용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받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고 깨닫고 그 말씀을 실제로 사셨다고, 그 말씀을 가르쳤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마음과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 생각과 유명해지거나 강해지려는 생각과 자신이 가장 옳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야망이나 걱정이나 두려움 없이
어떤 난관과 방해가 예수님을 막아서도 그저 하나님의 길을 가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같은 길을 걷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