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라 하는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별로 어렵지 않게 이 성경 말씀을 이해하고 또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에서 얘기하기를 24절에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이 결론까지는 갈 길이 멀어 보입니다.
왜냐하면 재물에 또는 물질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하나님을 잘 섬겨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 다 주실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사실은 이 둘을 적대적이지 않게 하나로 묶을 수 있는데, 성경은 뜻밖에 재물을 전혀 타협할 수 없는 어떤 의미에서 동등한 일종의 권세같이 둘을 나누어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재물을 섬긴다는 게 무슨 뜻이냐! 하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오늘의 본문 내용은 우리를 오도할 수 있고 괴롭힐 수 있습니다.
디모데 전서 6장에 가면 이 부분에 대한 아주 탁월한 사도바울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
4 그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비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5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 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6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서 무슨 얘기 끝에 이 돈을 사랑하지 마라가 등장하느냐 하면,
3절에 다시 돌아가보시듯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않는 자' 로써 돈을 사랑하는 것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문제는 하나님을 쫓을 것이냐 세상의 물질을 쫓을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조금 더 내용으로 좁혀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부르심, 거룩함에 자신을 맡길 것이냐,
아니면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에 목을 맬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 때 돈은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수단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사랑한다는 것, 혹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태복음 6장에서 하나님과 재물의 이분법은,
하나님이 주인이냐 내가 주인이냐를 대조해 놓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선포되고 있는 하나님의 의와의 가장 큰 근본적인 차이가 뭐냐? 누가 주인이냐! 이거죠!
하나는 하나님의 의고 하나는 사람의 의다, 이렇게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 성경의 가르침은 굉장히 일관됩니다.
신명기 8장에 가 봅니다.
1 내가 오늘 명하는 모든 명령을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고 번성하고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하리라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 구원함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되어 이제 거룩한 율법을 받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 최초의 여행,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에 나왔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직면했던 현실은 먹을 문제였습니다.
이 문제를 하나님한테 호소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만나를 주십니다. 광야생활 40년 동안 하나님께서 저들을 먹이시고 입히셔서 그 뒤에 나오는 구절들이 있듯이 이 40년 동안에 너희가 굶주리지 않고 그 옷이 해어지지 않고 그 발이 부르트지 않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촛점이 신명기 8장 3절을 다시 보시면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럽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하자면 아우성은 이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그 뜻을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픕니다.
배가 고파서 하나님의 뜻을 못 따르오니 내가 배가 고프지 않으면 못 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이 싸움에 이제 하나님이 말하자면 내기를 건 셈이죠.
너희가 먹을 것만 있으면 정말 내 거룩한 뜻을 순종하는가, 내 거룩한 뜻을 순종하는데 문제가 배고픈 것을 면하면 되는 것인가 보자!
배고픈 것을 면한다는 것은 꼭 현실만의 문제는 아니죠? 의복이 해어지지 않고 그 발이 부르트지 않은 외적인 조건들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무슨 싸움을 했느냐,
인간의 본성이 거룩을 지향하는가, 생명을 사랑하느냐, 진리를 사모하는가, 보자!
진리와 거룩과 의를 지키고 못 지키는 근거가 외적 조건인가 내적 조건인가, 보자!
했을 때, 그것이 40년 광야생활 내내 하나님이 만나를 주셨고 그 의복이 해어지지 않고 발이 부르트지 않게 했지만, 전혀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아서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습니다.
그래서 무얼 확인하느냐 하면,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외적 조건이 아니라 내적 조건이다!
너희 부패한 마음을 고치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다!
이것이 만나 사건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그런 차원에서 오늘 우리의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마태복음 6장에서
이 하나님과 재물 두 주인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이 문제를 위하여 어디를 끌고 가느냐 하면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21절에
21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 마음이 무엇을 소원하는지, 너희 본성이 어떤 존재인지, 네가 보물로 삼는 것으로 보라! 이거죠!
우리는 다 재물로 가 있는 거죠?
그러니까 신명기식으로 얘기하면 떡을 주시면 되죠.
그러나 떡을 먹자, 우린 무슨 핑계를 댈 수 없게 됐냐 하면, 외적 조건이 만족됐다고 해서 우리의 내적 조건이 거룩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하더라는 걸 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라는 우리 일반적인 이해가 가는 어떤 권유, 내용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간섭, 인격적인 개입 이라는 더 큰 개념을 가집니다.
우리가 사실 우리의 기독교 신앙을 조금만 교회사적으로 이렇게 살펴보면,
이것은 역사 속에서 언제든지 반복해서 확인됐던 문제입니다.
성경에서만 인간의 마음이 부패했다고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 증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큰 적으로 여기는 세속성이라는 걸 보시면 압니다.
우리가 세속성이라고 얘기를 하면 우리는 성 속의 분리라는 개념으로 거룩한 것과 세속적인 것을 구별하여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고, 그럴 때 속되다 하는 것은, 아주 원색적으로는 물질적인 것, 조금 더 가면 자기의 세상적인 기쁨을 찾는 것, 그 뭐 물질적이거나 쾌락주의거나 또는 조금 더 나아가서 쓸데없는 도덕성과 윤리성이 없는 허랑방탕한 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속주의라는 것은 그 출발에서부터 그 주된 관심사가 이것보다 큽니다.
세속성이라는 것은 어떤 윤리 도덕이나 종교같은 그런 명분들을 권위를 가지고 힘을 가지고 우리를 붙들어 매야하는 것에서 도망간, 집 나간 자식이나 학교에서 도망 간 것을 세속주의라 그러지 않고,
세속주의란 계몽주의적이고 물질번영적이며, 그런 무엇보다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 주장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다는 건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에 대한 이해를 성숙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인간 이해의 성숙이라는 것은, 인간이 무지몽매하게 어디 붙잡혀있기에는 훨씬 고급하고 가능성이 있는 존재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부에서는 맞습니다.
인간은 교육되어야 하고 훈련되어야 하는 존재인 것이 사실입니다.
무지에서 벗어나야 되고 양심을 따라 사는 윤리도덕적인 삶을 훈련해야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을 독립시키는 것을 인간 이해의 성숙이라고 이해하는 바람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길 것이냐, 우리 자신을 신으로 주장할 것이냐 라는 문제로 교회사 속에 교회를 늘 도전했던 사상입니다!
이것이 인간 이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자기자신이 이해하는 주체가 됐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경험하고 이해하는 범주로 이 세속주의를, 혹은 무슨 인간성에 대한 진보사상을 제한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과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초월의 영역으로 내쫓았습니다.
그 약간 미친 사람들끼리 하는 얘기쯤 됐습니다.
우리가 뭐 우리 한국사회에서 살면서도 무당이 있다, 누구 뭐 신접한 자가 있다는 걸 크게 인식하지 않고 살고, 크게 우리의 삶에 부딪힐 일이 없는 걸로 사는 것같이, 기독교가 이렇게 쑥- 현실과 일상에서 떠밀려나게 된 것입니다.
그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되자, 그 다음에는 힘을 쓸 수가 있는 것, 자기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세상의 힘이 되고 말았죠.
그 세상의 힘은 가장 대표적으로 재물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는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에 가시면 예수님께서 친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7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49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50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이건 분명히 그 배경에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하면 아까 읽은 신명기 8장을 배경에 갖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는다, 너희가 먹은 떡은 여기 지금 읽은 요한복음 49절에 나오듯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를 배경으로 갖고 있습니다.
그들이 먹은 떡은 뭐죠?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신의 소원과 의지와 선택을 이루기 위한 에너지에 불과했죠.
그러자 지금 예수님은 뭘로 오시느냐 하면 생명의 떡으로 오십니다.
예수님이 생명의 떡으로 오시는데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뭐냐 하면,
유한한 피조물이,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 피조물의 한계 속에서 죽어가던 자리로부터,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성의 영원함과 진리됨으로 우리를 불러, 하나님의 통치가 주는,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창조주요, 아버지로써 보호자가 됨으로써 가지게 되는 영생으로 부르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영생은 어떤 영생이냐 하면,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의 어떠하심의 그 영생과 진리와 이런 속성과 복됨에의 참여입니다!
그 참여라는 것이 가장 잘 나타나는 것이 성만찬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에서 주의 몸을 기념하고 흘린 피를 기념하는 떡을 떼고 잔을 받는 이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 영혼의 양식이, 우리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신성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이라는 뜻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 하면 아주 미묘한 문제입니다만, 그러나 분명하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을 열어주러 오시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권면하러 오시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러 오는 정도가 아니라,
성경의 선언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만이! 예수가!
예수님의 가르침은 언제나 예수님이 도를 깨우친 이로써 후학들을 가르치는, 도를 전하고 깨우침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먹이고, 당신의 진리와 영광을 우리에게 채우는 당신이 주인이신 겁니다!
그래서 당신은 생명의 떡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이런 선언들을 얼마든지 보는데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랍니다
그러니까 이 일의 중요성은 이겁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얘기할 때, 믿음이 예수와 분리되어서는 안되며, 헌신이 예수와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은 우리가 오늘 보는 바와 같이 왜 하나님과 재물로 나뉘느냐 할 때, 하나님이 주인이냐 아니냐로 나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든가 아니든가 인데, 아니면 각각 자기가 자기의 주인일 수 밖에 없고,
우리 각자가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아는 감각하는 또는 영향을 받고 베푸는 세상 속에서 그 세계 속에서 최고의 힘을 추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재물입니다. 다른 말로 권력이라 그래도 좋습니다. 그것과 대비되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2장에 가보십시다.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 참 재미있는 표현은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 뿌리를 박아라 입니다, 그의 세움을 받아라 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놀라운! 놀라운 점이 이겁니다.
우린 이런 표현을 얼마든지 씁니다. 그러나 오늘을 위해서 이 표현을 써서 그 미묘한 차이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예수를 위하여 산다, 예수를 위하여 헌신한다 이런 것 다 맞는 말입니다.
본인이 어떻게 이해했느냐와, 그 이해를 어떻게 했느냐에 굉장히 중요한 차이가 생깁니다.
우리는 예수를 닮고 예수같이 되도록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명과 예수의 인격을 낚는 자로 되어있지,
예수라는 이름을 걸어서 명분을 삼아 그를 위하여 헌신하는 나의 성의나 진심을 만들어내는 종교가 아닙니다.
아! 이거 어렵습니다. 여러분의 노력을 중단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할 때는 언제나 내가 얼마나 잘 믿고 있는가, 내가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를,
주를 닮고 있는가, 주를 닮고 있는가고 늘 점검하셔야 됩니다.
주를 닮고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내가 어느 수준에 있든지 내가 행한 노력, 성취라는 것으로 제 3자에게 자기를 증명받지 않습니다.
주를 닮아 가는 건, 저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가는 일 외에는 다른데 관심을 가질 틈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지금 마태복음 6장에서 보듯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는 뭐냐하면,
누구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옆에 있는 사람앞에 확인되는 자신의 종교성이요, 도덕성에 불과해지는 겁니다.
이 어려움을 아시겠습니까? 그리고 이것이 어려우면서 동시에 너무나 다행인 것입니다.
너무나 다행인 것, 우리는 주를 쫓는 자들입니다. 주를 닮기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주께서 당신의 신적 어떤 본질들을 우리와 공유하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공유하자고 하는 겁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신앙적인 가장 중요한 덕목이 뭐냐 하면 순종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기독교 종교적인 어떤 명분들과 실천들도 왜 하느냐 그러면 주께서 그리하라 하셨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리하라 하셨기 때문에! 그것이 물론 세상 속에서도 고급한 윤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요구하는 것들은 그 내용상 언제나 윤리적이나 도덕적 차원에서 고급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는 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하는 것과 순종으로 하는 것의 가장 큰 차이가 뭐냐? 어떻게 둘이 다르냐?
그기에 자랑이 있느냐 감사가 있느냐를 보시면 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진의를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 거기에 자랑이 있느냐!
우리가 로마서 3장에서 보는 '구원이 은혜로 말미암는다!' '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해놓고 덧붙히는 판별심,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뇨' 이겁니다.
자랑이란 뭐죠? '내가 만들었다' 이거든요. 만든 내가 주인인 재물이 주인인 사람입니다.
그의 도덕성과 그의 경건과 그의 헌신과 그의 봉사가 자기 증명이었다는 거죠.
예수를 쫓는 자는 예수를 우리 신앙에 내용으로 주시고, 우리라는 피조물의 인격을 신성으로 부르신 것을 인하여 그에 순종하고 쫓아가는 자에게 늘 감격이 있다는 거죠!
늘 감격이 있다는 거죠!
기뻐서 미치겠다 이런 뜻은 아닙니다.
영광됩니다!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느냐에 대해서 늘 고마운 것입니다.
'나 같은 것을' 이 얘기 보다 더 큽니다. 겸손을 떨고 늘 이렇게 결벽증을 확인해야 된다는 차원이 아니라,
기독교가 목표하고 부르신 신적 부르심의 그 영광을 이해하는 감격이 있습니다.
이리로 부르시는구나! 나를 그냥 도덕 군자나 쓸모있는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신성으로 부르시는 구나!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는구나!
이 감격이 있다 말이죠!
에베소서 4장에 가시죠! 성경이 이런 요구를 얼마나 자주 반복해서 하느냐를 기억해야 합니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2)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4)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여러분의 삶의 다양한 모습, 그리고 반복되는 보잘 것 없는 사소한 일상 속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보고 위대한 일을 하라 그러지 않습니다.
기적같은 일을 하라 그러지 않고 민족과 국가와 역사를 위하여 일하라 그러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큽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닮고, 그가 보내어 우리에게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하심을 따라가 그 아들 예수에게 나타난 신성으로, 우리의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나는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그의 형상을 닮은 영광된 피조물의 완성의 자리로 와라! 라는 부름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붙들고 있는 소원이요, 약속이요, 믿음이 아니라면, 여러분은 세속성앞에 늘 흔들립니다.
지금 여기 에베소서 4장에서 얘기하는 바와같이 14절에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얼마나 대단한 말씀인지 아시겠습니까?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처음에 가졌을 만한 기대들, 예수 믿음으로 가지는 어떤 심리적 보상, 혹은 외적 보상, 쓸모있음, 자존감, 이런 것들과 다른 것입니다. 이런 것들과 다른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들을 확인하는데 있어서, 세상이 요구하는 잣대로 여러분을 만들어 갈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부족함, 남보다 나쁜 조건들,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여러분 모두가 예수를 믿는 일과 예수를 닮아가는 일과 예수 안에 허락된 얼마든지 주셔서 눌리고 눌러도 넘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혜와 기적의 손길아래 있다는 것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 믿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존재와 삶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치시고 순종하시고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라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고백입니까
그것은 얼마나 영광된 부름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이 큰 영광을 떼어놓고 보잘것 없는 것에 목을 매고 있습니까.
하나님 이 시간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보호받고 약력받고 채워지고 인도되고 있다는 것 기억하여 우리 존재와 우리의 삶이 얼마나 귀한지 아는 믿음 주사, 우리 평생을 예수 안에 있게 하소서.
세상의 권세 쫓지않고 나를 증명하지 않고 오직 주 안에서 자라며 주를 닮으며 주와 같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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