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 (18) / 박 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8. 5. 10:07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33절 말씀은 성도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모든 성도들이 소원하고 있고 또 따라야 할 복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이 산상설교 속에서 그리고 가장 중요한 주제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대조되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설명하는 문맥속에서 요구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한다는 것이 어떤 봉사이거나 종교적 임무보다 더 큰 것이다,

거기에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하나님의 의를 강조하는, 또 그것이 어떻게 요구되는가, 하는 면에서 이해를 요구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지난 시간에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님과 재물로 대조되고 대표되는 사람들의 의와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에서 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대표되는, 그러나 모든 인간이 가지는 의는 결국은 재물이라는 거죠?
이 재물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반대 자리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성경이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의는 재물과 어떻게 다르냐할 때, 우주와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광대하심으로,

또는 지난 시간에 확인했듯이 예수 그리스도로 증거한 것같이, 하나님의 의는 참되고 영광스럽습니다.


그 대조속에서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대조의 한 쪽을 대표하는 재물로 표현되는 의와, 하나님의 의는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가장 차이가 나는가,
재물로 대표되는 세상의 의는 그것이 하나의 권력이라는 사실입니다.
권력이라는 것은 내 삶과 내 존재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써 가지고 싶은 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의로우신 통치에 자신을 맡기는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하여 수단과 힘으로써 자기가 소유하는, 그래서 자기를 자기가 책임지는, 자신의 권력아래 두는,

그리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큰 권력의 수단으로써 재물로 대표되는 의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자신을 맡기는 신앙의 순종, 이렇게 둘을 대조하는 것입니다.  


재물로 대표된다는 것은 이런 뜻입니다.
34절에 나오는 바와같이 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은 오늘해야 하는 일로 소개되는데 즉,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라고 얘기함으로써, 말하자면 우리의 염려가 내일을 위한 염려요, 또 실력에 있어서는 자기 키를 소원대로 늘릴 수도 없는 한계를 가진 권력이라는 것을 지적함으로써, 세상이 추구하고 하나님 없는 각 개인 인간들이 추구하는 권력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 무력한 것인가, 그리고 내일을 확보하기 위하여 오늘을 오직 내일을 확보하는 일에 소진시킬 수 밖에 없는 헛된 삶을 사는가,

라고 지적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너무 설명이 길어졌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시죠.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라는 요구속에는 오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라, 라는 초대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기 때문에요?
내일일을 염려하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오늘을 살지 못하고 내일을 확보하려고 전전긍긍하면서 이 오늘을 보낸다는 거죠. 오늘은 뭔데? 언제나 지금이죠. 인간은 어제를 살지 못하며, 내일을 살지도 못하고, 인간은 언제나 오늘을 살 뿐입니다. 지금을 살 뿐인데, 지금을 뭘 하느라고 사느냐하면 염려하는 것으로만 산다는 거죠. 무슨 염려? 내일을 내가 안심할 수 있는 권력을 잡아 내일을 확보했다는 마음을 가질려는 일로 오늘을 보내고 있다는 거죠.
대표적으로 뭐죠? 이게 성경에서 말하는 재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만 돈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제가 쓰는 표현같이 권력입니다.


인간이 사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세상 권력입니다.
권력이라는 것은, 지금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지키고 보존하고 행복할 수 있고, 자존심을 지킬 수 있고, 남에게 굽신거리지 않아도 되고, 비참해지지 않아도 되는 어떤 보장책들입니다.
이게 세상에서는 지위고 권세고 학식이고 돈이고 건강이고 사회적인 인간관계이고 그런 것들 이겠죠.
그러나 알다시피 이런 일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 진정한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성경 표현대로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에서 보여지듯이 우리가 내일을 확보하느라고 가지는 어떤 권력들도 참된 인간성을 충족시키고 그의  영혼과 인격에 만족을 주는 것들은 없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하나님의 초대는 참으로 고통과 절망과 비극속에 처해있고

무력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허락하시는 복음인 것입니다.

너희는 내 통치, 내 사랑, 내 능력안에 살아라, 그 얘기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써, 아주 쉬운 흑백논리로  세상에서 이렇게 쓸데없는 일에, 먹고 사는 일에 매여있지말고 보다 쓸모있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자, 이렇게 쉽게 나누는 것보다 더 가는 것이죠.


참다운 인간성을 하나님께서 그의 형상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름에 걸맞는 인격, 성품, 영혼에 충만함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0절에 가시면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자주 우리가 묵상하는 외우는 중요한 성경구절이죠. '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쉽게 이 능력은 권력이 되곤 합니다. 배고픈 것을 면하는 것, 고통을 면하는 것, 당면한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것,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어떤 일도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가 종종 적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을 한 사도바울은 이 고백 당시에 로마 옥중에 있습니다.
그는 고통속에 있고, 그는 자유가 박탈된, 당시에 인권이라는 보호받지 못하던 시절에 참으로 어려운 지경에 있습니다.
거기서 한 고백이죠. 뭐라고 하면서요?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
배고픈 것과 배부른 것, 풍부와 궁핍에 아무 상관이 없다, 라고 얘기함으로 지금 그가 얘기하는 능력이 세상적인 권력에 관한 것이 아님을 충분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가 가진 능력은 그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이런 세상적인 권력과 다른 것이라는 것이죠.
어떤것?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 하나님의 어떠하심으로 부름받는 성도들만이 갖는 그 영적, 인격적, 신앙적 차원에서의 삶의 모든 자세와 내용에 관한 것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고 순종한다고 해서 세상적인 권력으로 해결되는 문제들에 관하여 해결해 준다는 약속은 하지 않습니다.
그게 무슨 얘기냐하면, 세상적인 위협과 시험과 고통을 면케 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결해 주는 일을  하나님은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우리가 해결하기에 급급한 가장 절박하고 우선적인 어떤 문제들 우리가 경험하는 오늘의 문제들,

배고픈 것, 치사한 것, 속상한 것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것,

그 아들을 보냈어야만 됐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인간의 참된 인간된 가치의 문제에 관하여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의 통치를 명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우리에게 어렵습니다.
우리가 사는 삶의 현실, 오늘이라는 날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어디로 끌어 들려야하느냐하면, 급박한 현실의 곤고함 속에서 먹고 마시는 것, 풍족한 것과 헐벗은 것, 큰 소리 치는 것과 비명을 질러야 되는 그런 문제들을 뛰어넘는, 하나님이 누구시고 우리의 필요가 무엇이냐를 증언하는 문제, 이런 세상이 힘으로 갖고 있는 것과 다른, 더 큰, 더 깊은, 본질적인 문제에 대하여 우리로 누리고 증언하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이 다만 세상 권력과 같은 맥락에서 주어지는 초월이 아니라는 것을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든지 곤고한 현실속에 놓아 두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재물로는 해결되는데, 신앙으로는 해결되지않는 현실속에 둠으로써, 우리가 해결하고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재물로 해결할 수있는 문제거나 그것으로 상관되는 영역의 것이 아니라고 증언하라고 하십니다.
불만이십니까?


이 오늘을 하나님앞에 바치는 일의 어려움은, 지금 사도바울이 얘기하는 것같이,

그러니까 오늘 세상적으로 풍족할 때도 그것이 답이 다 아니라고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 되고,

세상이 우리를 위협하고 시험하여 정말 살 소망까지 끊어진 자리에서도 우리는 소망이 넘치는 자라고 증언해야되는 삶을 살아야하기 때문에,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은,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다는 것과 연결시키지 않으면 불가능한 삶이요 신앙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기독교의 가장 본질적인 내용을 공격받고 있습니다. 다원주의사회에서 기독교를 너무 배타적이다, 너무 독선적이다, 라고 공격하고 있는데, 그들의 공격은 무식에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 없이 인간의 가장 깊은 영적 갈증을 해결할 방법은 없으며, 인간의 인격을 그의 인간성을 회복시키고 만족시킬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저들을 공격하자고 이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발언권과 기독교 신앙의 자랑이 어디 있느냐할 때, 정말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답을 예수 안에서 누리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유지되고,

세상적인 위협과 시험앞에 그리고 현실적 고통 속에서도 신앙이 유지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이것도 할 수 없다면 각자의 신앙을 점검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이 오늘의 싸움을 여러분이 지금 이런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의, 하나님이 다스리시며,

그 다스리시는 이가 의로우시며 자비로우시다는 사실을 그 통치자가 그 성품을 그 속성을 갖고 계실 뿐만 아니라,

통치의 원리일 뿐만 아니라, 통치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요구하고 채우시려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의 신앙은 언제나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예수 안에서 나타나는 것같이,

우리의 의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은 세상적인 눈으로는 답이 없다고 생각하는 환경과 무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만일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그 사람 참 행복할 만하다, 그 사람 하느님 믿을 만하다, 그만큼 보상받았는데, 라고 얘기한다면, 진정한 하나님의 통치는 가려질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도 욥을 잠시 인용했었습니다만, 욥기의 중요한 주제가 이겁니다.
어느 날 하늘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사단이 이리저리 다니다 찾아와서 이웃거리니까,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너 왜 그렇게 밤낮 시비거리나 찾아서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고 있느냐, 욥을 봐라, 넌 왜 저렇게 못하냐!"

그래서 사단이 뭐라고 반문을 하느냐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까 저가 잘 믿죠, 그러지 않는데도 져가 잘 믿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사단에게 "그래? 그러면 보상을 받지않고도 잘 믿나 안믿나 우리 내기해 볼까?"
그래서 어찌보면 우리로서는 억울하지만 하나님이 정말 세상적인 보상을 주시지않는데도 그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실 수 있는가 없는가를 위하여 사단에게 그에게 손을 댈 수 있도록  허락을 내리십니다.
그래서 자녀들을 잃고 재산을 다 빼앗기는 사태가 벌어지죠.
그래서 다시 만나죠.
"봐라 그래도 욥이 신앙을 지키지 않느냐?"
"그 정도 갖고는 안됩니다. 그 몸을 치는 자리까지가야 극한의 자리까지 가봐야 진정성을 알 수 있습니다"
"좋다"
그래서 드디어 몸을 치죠. 어느 날 병에 들고 괴로워하는, 정말 기왓장으로 헌데를 긁는 자리까지 갑니다.
그래서 욥이 아우성을 치죠. 도대체 하나님 이게 뭡니까? 이 아우성을 칩니다.
그래서 이 시험은 정말 욥이 진정한 하나님 믿는 신앙을 갖고 있는가 없는가 보자로 출발을 했는데,
결론은 뭐로 났느냐하면, 이 시험을 통해서 욥이 원래 확인하려고 했던 결과에 인도함을 받았다로 끝이 납니다.
욥기 잘 안 보시는 이유를 저도 압니다.

ㅎㅎ 그렇게 될까봐 괜히 자주 보면 자기도 그렇게 될까봐 겁이나서 안보는 줄 알지만,
실제로 우리의 신앙의 현실 즉 요구받고 있는 책임은 욥같이 살라는 겁니다.

'욥같이'라는 것은, 욥이 인내했다, 믿음을 지켰다 라는 영웅다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되심이 이 세상의 권력과 어떻게 차원이 다른 것인가를 확인하는 그 속에서 커지는 일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순종하며, 승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어려움은 오늘을 바쳐야 된다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오늘은 뭔데요?
우리가 기도하고 소원하지 않는 현실이 언제나 오늘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기도합니다. 오늘 기도할 때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오늘같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죠.

오늘같이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데, 오늘은 그 전에 오늘같이 않기를 기도한 오늘입니다.
신자의 오늘은 다 본인의 기도와 다르습니다.

가끔 몇가지 일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을 안 믿을 수 없는 증거를 주십니다.

뭐 기적이 있습니다. 당연히 기도의 응답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도 오늘이 만족스러운 오늘이 거의 없습니다.
기도한 오늘인데 그리고 기도하는 내일인데 그 내일도 오늘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은 뭐냐하면 내가 원한 오늘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신 오늘입니다.

오늘을 부정하시면 안됩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이 원하신 오늘이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너는 이런 오늘을 살아라 라고 신적 능력과 지혜와 자비와 긍휼과 의로우심과 선하심으로 준 오늘입니다!
그 고통스러운 오늘이 말이죠.
이렇지만 않으면 무엇이라도 좋을 그날이 하나님이 준 오늘입니다.
오늘 아까 본문 34절에서 비교한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가 가지는 현재성,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가 오늘을 살아야되는, 내일로 미루어서는 안되는 오늘, 언제나 오늘밖에 없는 오늘, 그걸 바치십시요.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한 오늘입니다.
'이 환경, 이 조건, 이 처지속에서 내 백성으로 살아라' 입니다.


어찌 살아야합니까?
믿음으로 살고 감수하며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빌립보서 4장 10절에서 13절 얘기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무슨 뜻이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무슨 꼴이라도 감수할 수 있다,죠.
그 감수가 행복할 수만은 없읍니다.
믿음으로 걸어야하는 길이라서 우리는 한 숨쉴 수 있고 울 수 있고 고통스러워 비명을 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외면하고 아니라고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이 오늘 속에서 무얼 나에게 만들고 세상앞에 증언하려 하시는가에 있어서 도망가는 것입니다. 


오늘을 사십시요.
모르는 세상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네가 믿는 하나님은 왜 오늘을 너에게 주셨는가, 라고 우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오늘은 욥기에서 본 바와 같은 그런 오늘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적인 조건과 능력과 권력에 속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가 누구이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만들어 가시는 분인가를 위하여 준비한 오늘입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런 질문에 이 답을 내릴 수 있습니다. 이런 질문들 많이 하십니다. 결혼적령기에 접어드신 분이 남녀를 불문하고 결혼을 위하여 배우자를 위하여 어떻게 기도를 해야합니까?
여러분 부모로써 자녀들을 위하여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 오늘할 수 있는 기도를 하십시요.
오늘 할 수 있는 기도가 뭐죠?
믿음좋은 사람 만나게 해 주십시요. 우리 아이를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 속에 늘 지켜 주시옵소서.

이게 오늘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가느냐하면 확보하고 싶죠. 그러니까 애를 잡는 겁니다.
오늘 2등 안에 들어라, 하나님 내일 시험보는데 전체 5등 안에 들어야만 되겠습니다. 십계명에도 있습니다.ㅎㅎ
이게 우리가 기도를 동원하여 내일을 권력으로 확보하고 싶어서 오늘을 바치지 못합니다.
오늘 떨어지지않는, 오늘 확보할 수 없는 결과, 오늘 확인할 수 없는 권력을 놓고,
하나님과 의로우심과 선하심 안에,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통치 아래 우리를 순종시켜,
여러분의 기도에, 뒤에 이마를 갖다 붙일 수만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를 붙일 수만 있다면,
오늘 나를 다스리시고 내 기도를 들어시는 하나님이, 내일도 주인이시고, 하나님이시고, 내 인생을 지키신 하나님이,
내 자녀를 지키시고 복주실 것이며,  나로 배우자를 위하여 기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어디선가 배우자를 위하여 기도하는 내 짝을 준비하고 계실 것이다,를 믿는 것이죠.
그 믿음을 바울이 그랬듯이 어디서 고백하나요? 감옥에서 고백하죠.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 교인들이요, 기가 막혀서 말도 못하고 돌아왔데요. 위문품갖고 찾아 갔더니 정신이 나가가지고 고맙다는 소리는 안하고 '뭐 이딴 것 갖고 왔냐, 나는 궁핍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 나는 늠름하다, 마음대로 해라', 그리고 왔데요. 설마요? 그러나 우리가 읽으면 그렇게 보입니다.  믿음이 동원되야죠.


이 믿음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지요.
공중나는 새를 보라! 라고 예를 드신 예수님이 사실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가요.
'나를 보라, 빌립아,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이 문제에 관한 여러분의 신앙고백은 분명합니다. 
그 신앙고백을 오늘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죠? 믿음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발버둥치고 세상의 권력을 가져봤자 아무 문제도 해결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권력을 잡아서,

어떻게? 당사자에게 아무 해결이 되지 않는데도 우리를 시험하고 있는 것을 7장 넘어가면 볼 것입니다.
그 전에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보내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증거하여 우리에게 이 초대를 합니다.
이 통치와 이 복과 이 의로움으로 살아라, 이것을 즐겨라, 이것이 너의 하나님의 자녀된 복된 인생이니라, 빼앗기지 말아라, 라고 권하십니다.
여러분 모두의 신자된 삶이 무엇인지 아시는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하고 예수를 근거로 하여,

그래서 곤고한 오늘 속에서 그것으로 영향줄 수 없는, 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어떠한 형편에서던지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나는 고통스러우나,

그러나 그것이 나의 하나님의 자녀된 복을 진정한 영혼의 답에게 영향줄 수 없노라 라는 고백으로 여러분을 승리케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다는 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도전과 위협과 시험과 유혹앞에 넉넉합니다.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것은 저들이 진정한 답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넉넉하심으로

그 의와 진리와 소망과 사랑과 생명과 부활과 거룩과 영광으로 하나님의 자녀된 인생을 살게 하옵소서.
오늘을 살게 하옵소서. 지금을 살게 하옵소서.

우리의 모든 형편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지키게하사 우리의 고통과 비명과 눈물과 한숨을 인내하고 순종하는 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남들이 우리를 보고 왜 그 눈물과 비명속에 믿음을 지키는가 묻거든,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아들 예수 안에서 보이신 사랑 때문이라 답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ttp://lamp.kr/lamp-sermon/?p=4586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예배설교 

녹취록 이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