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19)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8. 9. 07:48


33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34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는 이 주님의 말씀과 신자들에게 요구되는 신앙 실천 순종의 내용은 34절에 보는 바와 같이 괴로움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우리는 기독교 신앙을 대표적으로 소개할 때, 기쁨이 있다, 감격이 있다, 평안이 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건 사실입니다. 기쁨이 있고 평안이 감격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괴로움이 많다는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우리가 깊은 차원에서의 답들을 얻기 때문에 예를 들면, 운명에 관하여, 인간의 가치에 대하여, 인생의 의미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심과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또 그 아들을 보내신 구원이라는 측면에서 영혼깊은 만족이 있지만 현실은 괴롭습니다. 이 문제를 우리가 잘 이해하지 않으면 우리는 오늘 살펴보려는 한날의 괴로움을 신앙으로 이기는 문제에서 모호해질 수 있습니다.


이 문제가 우리에게 오늘 확실해지기 바랍니다.
고린도후서 6장에 가시면 바로 이 문제를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다룹니다.

 

1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2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이걸 우리가 꼭 기억해야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승리하신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구원은 승리와 영광을 약속하고 있지만,

지금은 심판의 때는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를 믿어 이미 하나님의 통치 안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아래 약속속에 승리와 운명을 확보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고 은혜를 베푸사 심판을 유보하고 계시는 은혜의 기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직도 죄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함속에 갖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는 우리가 아는 믿음과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실간의 괴리감입니다.
여기에 갈등과 긴장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어 봅니다.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6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7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8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이 이중적인 평가를 이해하셔야 됩니다. 세상이 보자면, 우리가 세상적 눈으로 우리가 자기네들 보다 가진 것 없고 더 나을 것도 없는데, 그리고 현실로도 고달픈데, 우리는 가진 자이며 넉넉한 자이며 승리자이며 세상이 우리를 힘으로 누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가 용서하고 보아주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이것이 현실적으로 괴로움으로 나타날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 많이 기도하는 현실적인 내용이지요. 하나님 앞에 현실적인 필요를 우리가 기도하곤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들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이 세상이 우리에게 시험하고 도전하는 어떤 힘보다도 하나님이 더 크시다는 걸 우리에게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단계를 지나가보시면 그런 어려움들과 시험들은 우리가 감수하고 가야되는 것으로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려움과 고단함과 외로움과 무거운 짐을 지고가야 됩니다. 그 짐들은 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해답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약속들이 현실속에서 세상적인 것으로 증거되거나 확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신약성경에서 늘 순종과 인내라는 단어로 자주 묘사됩니다.


억울할 수 있죠. 이 문제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4장에 가면,

사도바울이 이 문제를 본인도 억울해서 이렇게 고린도교회와 교인들에게 목청을 높인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이걸 뚝 잘라서 읽으면 사실 의미가 정확치 않은데,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바울로 인하여 복음을 접하게 되고 구원을 얻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이 교회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사도바울의 사도권, 하나님의 사자가 맞냐?하는 사도권에 대한 도전을 한 교회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종 같지않다' 이 도전을 했죠.
그게 무슨 배경을 가지느냐하면, 이 초대교회시절, 예수님 공생애 시절에서부터 이어지는 그 때 일세기 정치상황을 우리가 아시다시피 로마가 서구유럽을 장악하고 있고, 내용적으로 그리스 사상과 문화와 종교가 로마 통치권 내에서 가장 크게 가치를 인정받을 때 입니다. 많은 신들이 있었죠. 우리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보는 바와같은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근데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만 유일한 신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신의 자녀가 될려면 예수를 믿어야된다는 거죠. 초대교회 그 일로 인해서 많은 핍박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그 속에서 예수를 믿고 돌아오는 사람들이 생긴 거죠. 이런 로마가 가지고 있었던 많은 신들을 섬기던 옛생활을 가졌던 이 초대교회 성도들 중에는, 어떤 신이 더 우월하고 더 위대하고 그리고 심지어 유일한 신이라면,  다른 신들보다 높은 증거가 있어야된다고 믿은 거죠. 더 복되게 하고, 더 능력이 있고, 더 즉각적인 증거가 나타나야 된다,


그런데 이 바울은 외모가 보잘 것이 없었다, 이렇게 성경에 나와있죠. 보잘 것이 없었고, 이렇게 뭐 창세기에 나와 있듯이 적어도 선악과만 해도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데, 바울은 볼품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또 말도 시원치 않았다 그렇게 되어있죠? 거기다가 몸에 무슨 결정적인 질병을 갖고 있어서 모든 사람들을 시험할 만한 약점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고린도 교회에서 뭐라고 도전을 하느냐하면, 당신이 가장 위대한 신의 사자라면, 우리보다 나아야될 것 아니냐? 생긴 거로나 하는 짓으로나, 뭐 볼만한 데가 있어야되지 않냐? 그런데 뭐 아무것도 있지않냐? 우리는 당신이 신의 사자라고 믿을 수 없다, 이게 이제 이 얘기입니다.


이제 그 바울의 답이 서두에는, "나는 맡긴 일을 할 뿐이니까, 내가 얼마나 잘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나를 보낸 분이 누구인가를 증거하는게 내 책임의 전부다!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다!" 그래 놓고 이제 6절 이하에 이런 반박을 합니다. 이 반박을 여러분 오늘 주의깊게 들어셔야 됩니다.

 

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건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집중해라!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누군가를 아는 일에 집중해라!
다른 것으로 내용을 혼란시키지 마라,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너희가 받은 복음의 내용, 기독교의 신앙의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고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마치 너희가 만든 것같이 너희가 잣대를 만드느냐? 너희가 기준을 만드느냐?

너희가 마음대로 심판하느냐? 이렇게 이제 포문을 엽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이 고린도 교회는 두가지 큰 자랑거리가 있었는데, 하나는 저들이 매우 지적 수준이 높았다는 사실과 그 다음에 은사가 풍성했던 교회입니다. 성령의 나타남이 많았다, 그러니까 어찌 보자면, 어느 시대 어느 교회나 부러워할 만한 교회죠. 지적 수준도 높고, 초월적인 증거도 많고, 그래서 이들은 예수 믿는 것이 매우 자랑스럽고 어려울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는 서신서 중에서 가장 많은 교회를 갖고 있는 교회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는 정말 넉넉하구나! 잘 났구나, 신나는 구나, 이 비꼬는 거죠. 그리고 이렇게 얘기해요.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지금 바울이 하나님의 사자로 부름을 받아 고린도에 교회를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가르친 사람으로써, 세상적인 판단을 하면, 고린도 교회가 아무리 훌륭해도

바울 앞에는 아무래도 한 수 양보해야되는 처지인데, 고린도 교회가 꺼꾸로 바울을 비난하고 있죠.
당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면 왜 그토록 볼 품이 없습니까?
그러자 이제 바울이 하는 답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 세상에서는 어떤 꼴로 나타나느냐,

무엇이 하나님의 위대한 증거며,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현실적인 실체인가? 라고 얘기하면서,

그것은 세상에서, 세상에서 증거되는 승리주의적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승리주의라는 건 중요한 표현입니다.
승리주의적이지 않다, 너희는 지금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서 신앙에서 넉넉한 것보다 세상에서 대접받을 일에 다 넉넉하다.
너희는 지적으로 수준이 높고, 초월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모든 것이 풍족한 것으로 보이고 있다,

그리하여 너희는 왕노릇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아볼로로 일단 들고 있죠.) 나와 아볼로 같은 하나님의 종들은 이 시간까지 하나님이 죽이기로 작정된 자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이렇게 9절에 쓰고 있는데,
이것은 로마 시대에 로마가 계속 영토를 확장해 가면서, 그 어느 영토를, 어느 나라를 격파하고

그 나라에 항복을 받고 영토를 자기네 것으로 빼앗아 올 때는, 나가서 이긴 군대가  승리의 노획물들을 가지고 개선행진을 합니다. 로마성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준비된 날, 로마시민들이 다 나와 환영을 하고, 시저도 나오고 승리한 군대가 이렇게 멋지게 차려 입고 시내를 들어오죠. 그 때 전리품이 뒤에 따라오는 겁니다. 이긴 군대의 대장과 군대가 앞장을 서고 뒤에 전리품이 따라오는 그 맨 끝에 전리품은 적국의 왕이나 왕족들 노예들인 겁니다. 끄트머리에 뒀다는 건 그런 시대적 배경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 바울이 하는 얘기는, 우리가 하는 일의 중요함과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일을, 우리를 이렇게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죽이기로 작정된 자같이 끄트머리 전리품속에 넣어놓고 있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수 믿는 것, 현실적으로 이런 길을 걷습니다.
예수 믿고 사는 게 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렇게 쉽게 생각하시면 안되는 것입니다.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우리가 다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시고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하나님은 이렇게 시키십니다.
아까 얘기한 승리주의에 관한 성경의 분명한 경고입니다.
우리는 본성적으로 우리가 무엇에나 우월한 것이 하나님과 복음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뭐 아주 쉽게 이거죠. "하나님 나를 축복하셔서 성공하게 해 주시면 제가 주를 위하여 다 내놓겠습니다!" 
아, 이거 할 수 있는 기도고, 그 진심을 이해합니다. 하나님도 이해하고 저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일 안하십니다.
그렇게 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수에게 요구하는 일반적인 신앙의 길이 아닙니다.
아, 우리가 지금 이렇게 신앙생활 하면서 확인하는 것은,

어느 시대나 그랬지만 교회에 나와서 간증을 하거나 또는 심지어 설교를 하는 일에서

우리가 하는 일들은 그런 영적인 승리를 세상적인 것과 자주 혼돈해서 나타나는 격려들 입니다.
하면 된다, 승리할 수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아, 그것은 이따가 결론에 보시겠지만, 그렇게 간단하게 하시지않습니다.

사실 교회사를 보면, 승리주의라는 것은 끝임없이 교회를 흔듭니다.


첫번째 이 승리주의라는 것을 교회의 그 시험들게 했다, 그러면 너무 미안하지만, 하여튼 그렇게 한 사람이 '콘스탄틴' 입니다. 콘스탄틴이 교회를 인정함으로써 대제가 됐는데, 국교로 선언을 하고 교회가 세상보다 큰 권려을 가지게 되죠.
이제 그 권력으로 가기 시작을 합니다.
신앙이 영향력으로 가지않고 권력으로 갑니다.

영향력이라는 것은 인격과 영혼에 감격을 주는 것이요, 권력이라는 것은 강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키워보시면 자녀를 강제할 수 없다는 걸 아시죠.
그 마음을 돌이켜야 하는데 그걸 성공하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께 맡기게 되죠. 하나님 저는 두손 들었습니다.
저 아이의 인생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하나님은 뭐라고 그러세요?
'너도 그랬다' 이러잖아요. 우리가 걱정하는 것보다 괜찮아져요. 하나님이 지키신다고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우월한 것으로, 자랑할 수 있는 것으로,

그래서 속상하지 않은 것으로의 욕심이 있어요,그죠?.
아마 제일 큰 시험은 자존심일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요모양 요꼴이라는 것이 나도 속상하고 하나님도 속상해 보이는 거죠. 그렇게 안하십니다.
그래서 이 콘스탄틴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이후에 중세교회가 힘으로 가집니다.
그래서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교회사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중세를 이끈 것은 교회가 아니라, 수도원이었습니다.
가장 세상 권력으로부터 먼 제도를 만들어 버렸죠. 중세를 이끈 건 수도원입니다.
그리고 아시는대로 근대가 등장을 하죠.
근대라는 것은 이성으로 또 하나의 권력을 만듭니다.
합리성이라는 것으로 뭐 교육도 하고 계몽도 하고 희망을 갖게 되고 기대를 갖게 되지만, 결국 무너졌죠.
사람은 그것으로 묶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합리성이 사람을 다 항복시키고 변화시키지 못한다, 이게 지금 우리가 겪고있는 포스트모덤입니다. 근대 이후죠.
지금은 문화가 하나의 권력이 되려하고 있습니다.
모두의 마음에 들게하자! 모두의 마음에 드는 것은, 가장 낮은 가장 원초적인 본능으로 내려와야 됩니다.
훈련되지 않는 것, 절제하고 연습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내려와야 됩니다.
그런데 이게 맹위를 떨치고 있습니다. 이게 다 권력입니다.
기독교는 권력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영향입니다.
진리의 생명의 영향이요, 하나님의 은혜와 약속과 신실하심의 무서움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에 가면, 우리에게 성경은 승리주의로 가지말고 이런 길로 갈 것을 요구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에 있는, 한 날 괴로움을 이해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그러면서 15절에 보는 바와 같이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고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린 세상속에 있습니다.어두움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할 것은 어두움을 거둬내는 것이 아니라, 빛이 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져 상대방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내 짐을 지고 가는 것입니다.
이게 무엇에 이어 나오는 12절의 그러므로냐 하면 앞에 있는 2장 5절 이하에 이어 나오는 말씀입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기 위하여 강제력을 동원하시지 않고, 당신이 자신을 낮추어 우리를 찾아와 우리의 자리에 들어와 우리를 끌어내는 하나님의 희생과 진실함으로 일을 이루셨다는 것을 기억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권력으로 해하시지 않았다는 것, 기억하고 너희 인생을 살아라,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속성이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정치적 사회적 권력을 갖는 것보다  이것이 더 큰 힘이다, 그러니 네 고단한 인생을 살아라,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그 길로 보내셨다, 그렇게 승리하셨다,

그러니 너는 꾀를 부릴 생각일랑 하지도 마라! 이런 뜻입니다.

이 부분에 우리는 다 의아해 하죠.
좀 위로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이 빗속에도 찾아오셨는데, 혹 떼러 왔다가 혹 붙이고 가게 됐죠.
그러나 복된 혹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사십시요.
여러분의 인생은 옆에서 볼 때는 아까 고린도후서 6장이나 고린도전서 4장에서 본 바와같이

옆에서는 그 길이 무슨 길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무명한 자같고 속이는 자같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같습니다.
우리는 참으로 중요한 사람이고 우리의 인생은 놀라운 하나님의 손길이며 우리가 나누어 주는 자입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신음이 이 패배와 절마의 부르짖음이 아니고,

그 주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저들이 자기가 하는 일을 알 지못하나이다' 이며,

'내가 다 이루었다' 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여 여러분의 인생과 여러분의 현실을 하나님의 뜻안에 붙들어 맬 줄 아셔야됩니다.
그렇게 살면, 여러분들은 기적을 경험하시게 됩니다.
매일의 삶이 기적이요, 여러분이 하는 일이 어떤 일인지 아시게 됩니다.
주께서 그의 짧은 생애를 사시는 동안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통치를  나누고 증거하고 허락하신 것처럼, 여러분의 생애와 존재가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 신자의 생활을 사는 복된 여러분의 신앙과 현실과 인생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름으로써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인생과 우리의 형편속에 더이상 필요한 다른 조건은 없습니다.
우리는 어느 곳 어느 형편에서나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고, 우리 하나님은 그 아들을 십자가에 매다신 분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의 걷는 길의 어려움은 하나님이 우리를 가장 낮은 곳으로, 그 비참함 속에 있는 영혼들에게 우리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생과 환경을 걸머질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 길을 순종할 믿음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와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이 어떻게 함께하사 일하시는지 보는 기적과 기쁨을 허락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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