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26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7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28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30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예수님께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시는 중에 그 의를 분명하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이 긴 말씀을 이어오고 계십니다. 오늘 본 본문 바로 앞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의는 그 특징상 하나님과 재물로 이렇게 대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는 것과 재물로 대표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 가장 중요한 차이는 오늘 본문식으로 얘기하자면, 목숨을 보존하는데 급급한 의와 생명을 주시고 충만케하시는 통치자 하나님의 의와의 대조가 되는 셈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기독교 신앙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한다할지라도 결국은 재물이 되고 말것이며, 그것은 먹고 마시는 일에 쓰이는 수단에 불과해질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 본문에 있듯이, '공중의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을 입히시는 하나님을 보라' 라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이 등장을 하게 됩니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옳은,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진정한 의를 만들어 내기에는 우리는 한계가 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우리가 만들지 않았고 우리가 조작하는 게 하니라, 하나님의 은총속에 놓아야 된다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의의 싸움이 되느냐 할 때, 하나님이 우리라는 존재를 만들어서, 우리라는 존재가 존재하고 연명하는 존재로써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목적하시는 영광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목숨을 유지하기에 급급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와 인생이 영광으로 채워지는 그런 하나님의 통치를 의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등장하는 공중의 새를 보라, 백합화를 보라, 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 풀을 입히시는 하나님을 보라, 라고 할 때, 이것은 크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허락된 하나님의 자녀로의 부름, 기독교 신앙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가장 중요한 내용의 의미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고 우리를 복주시려는 분이다, 그것을 자연계에서 봐라, 그렇게 얘기하는 거죠. 이 문제가 왜 중요한 문제가 되느냐하면, 기독교 신앙이 예수를 믿고 그 믿음에 요구되는 신앙 실천을 하는 것이 다가 아니라, 기독교신앙의 믿음과 실천에는 꼭 세계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세계관이 필요하다는 것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라는 우리 인간 활동 영역에서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망라한 인간의 경험과 사고의 모든 영역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뜻합니다. 만일 우리 기독교 신앙이 이런 세계와 역사, 인간의 존재와 의미 운명이라는 더 큰 조건과 틀에서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지않다면, 우리의 신앙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세상과 역사와 인생속에서 종교라는 한 수단을 가지는 것에 불과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야하는 이 삶의 조건들과 또 세상에 흘러가는 역사의 운명이나 우리 각 개인의 운명이라는 것이, 그저 오늘 하루의 고통, 또는 미래의 불확실함을 해소하는데 쓰이는 한 종교적 마술에 불과해질 것입니다. 공중나는 새를 보라, 이렇게 오늘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의를 이런 식으로 소개하는 것은, 그것이 다만 도덕성이나 종교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유일한 통치자, 온 우주와 역사와 인간과 인생의 통치자인 하나님께서 그 모든 존재에 어떤 의미와 목적과 운명을 원하고 계시는가에 우리의 시선을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생각을 해봐야 됩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같이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하는 이 '보라'는 얘기들을 성경의 지적대로 추적해야 됩니다. '본다'는 말은 우리 한국말에서 의미가 여러 모양으로 쓰입니다. 외국인들이 한국말을 배울 때, 제일 어려운 단어 중에 하나로 꼽습니다. 쉬운 예로 영화를 본다, 경치를 본다, 이럴 땐 쉬운데, 생각해 본다 그러면 복잡해지기 시작해서 '두고 본다' 하면 우리 영어로 영역하면 'See you again' '두고 보자' ㅎㅎ 어려운 말이 됩니다.
오늘 우리 성경에도 잘 번역했듯이, 처음엔 '보라!' 그 다음엔 '생각해 보라!' 이렇게 되어 있죠? 영어번역본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보고 생각 하십시요, 다시 말하면 생각하도록 보여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문제는 욥기 42장 1절에 가면 이런 식으로 성경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간략하게 우리가 욥기의 내용을 개략적으로다루고 이 부분을 이해해야 됩니다. 욥은 신실한 사람이었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으로 그 신앙이 완전했던 사람이라고 소개되고 있습니다. 한번도 자신의 신앙생활에 실수가 없었던 사람인데, 어느 날 뜻밖의 재난을 당하여 하루 아침에 재산을 다 빼앗기고 자녀들이 다 죽고 본인은 병중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나 너무 놀래고 고통스러워서 하나님께 말하자면 불만을 토로합니다. 하나님 내가 왜 이런일을 당해야됩니까,,, 그런 때 마침 세 친구가 찾아와 욥을 위로하기 시작하는데, 그 위로의 핵심이 다 뭐냐하면, '너 빨리 회개해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욥이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회개할 만한 잘못을 범한 적이 없다', '너가 이 고통을 당하는 걸보면 네가 잘못한 것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 아니냐, 그러니 빨리 회개해라', 욥은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난이 닥쳤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께 이 문제를 묻고 싶다'
세 친구들의 답은 '네가 그 따위로 말하는 것만 봐도 너는 분명히 잘못이 있다' 이게 욥기의 주 핵심입니다. 나중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세 친구들이 틀렸다고 하고 욥이 맞았다고 합니다. 욥이 잘못한 것 없이 이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욥이 한 불만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재난을 당해야됩니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답을 주시냐하면, 창조세계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의 창조세계 곳곳에 욥을 데리고 가면서 말하자면 '우박 창고를 봐라, 그 동물들이 어떻게 새끼를 낳고 기르는지를 봐라' 하는 창조세계를 보여주십니다. 그러자 욥이 그걸 다 보고 오늘 본문에 있는데로 '제가 무지했습니다. 제가 무식해서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저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하신 분이 아니고 옳으신 분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니다' 라는 고백을 합니다.
귀로 듣기만 하다가 눈으로 본다는 건 무슨 뜻이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내밀함과 긴밀함은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창조주와 섭리자로써, 얼마나 위대하시고 의로우시고 신실하신가가 자연속에 매일 반복해서 보여지고 있는데, 그것 미처 못보고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장면이 욥기 42장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공중의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을 보라'라고 얘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계 이전에 어떤 권세자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지금껏 창조한 세계를 주장하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는 온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십니다. 그 큰 틀속에, 우리가 그 틀속에 있습니다. 우리를 다스리기 위하여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내 소원과 내 필요에 응답하시는 정도가 아니라, 내가 몸담고 있고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을 의롭게 통치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공중의 새와 백합화와 들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허락된 생명을 지키기에 급급한 수단을 필요로 하는, 그래서 더 큰 것을 만들어낼 수 없는 한계에 있다면, 오늘 마태복음 6장식으로 얘기하면,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를 키울 수 있느냐' 라고 반문하시는 것같이,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넘어서서 우리라는 조건을 성립시키는 더 큰 틀에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자로써, 우리가 만들어내는 최선의 의도,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부족함을 느끼는 느낌이요 호소에 불과하지, '너희라는 존재를 만들어내고 채우고 담아내는 것을 만들 수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의를 대신하고 너희들의 의로 너희들을 만족시킬 수 있겠느냐' 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기독교의 신앙이 가지는 큰 힘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는 것 이것이 포함되지만 그것보다 훨씬 큰 것으로써 온 우주와 역사에 관한 것이요, 인간이라는 존재와 운명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가장 소중한 건 뭐냐하면, 이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죠. 우리가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를 대조할 때,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를 재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가지는 한계,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고 우리가 소원할 수 있는 것이 어떻게 그 차원에 있어서 제한적인가 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공중의 새와 백합화와 들풀로써 제시하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가 우리의 매일의 삶속에서 보다시피, 늘 우리앞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로 증거하며 존재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세상과 역사밖으로 나가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필요에 급급하여 그것을 보는 눈이 없죠. 세상은 많은 비극과 재앙이 있지만 그걸 하나님이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자연세계가 증언하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은 그것보다 근본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우주와 역사속에 증언되고 있습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반역과 그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참으시며 지금도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비와 햇볕을 주십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는 것이죠. 확인하는 것이죠. '보라'라고 얘기하시는 겁니다. 이 문제는 성경에서는 핑계할 수 없는 모든 인간들이 직면하는 하나님 계시라고 로마서 1장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우리는 사실 우리가 살면서 우리가 몸담고 사는 현실속에서 매일 직면하고 있고, 그기서 분리되어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핑계할 수 없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근데 지금 마태복음 6장에서 말하는 이 공중에 새를 기르시고 백합화를 영광스럽게 하시고 들풀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본문에 돌아와 보시면, 이렇게 자연속에서 당신을 계시하시며 당신의 의로우심을 날마다 신실하게 증언하고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은, 본문 26절에 보다시피 '너희 하늘 아버지' 입니다. 그는 이제 예수님의 지적대로 우리 아버지로써 서 계십니다. 우리 아버지되심을 어떻게 보이시느냐? 예수 그리스도로 보이십니다.
지금 이 산상설교에 첫 시작부터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무엇이었느냐하면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였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는 얼마나 놀라운 것이냐하면, 모든 사람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으로써 등장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복이 있고, 긍휼히 여기는 자 복이 있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복이 있고, 애통하는 자 복이 있었던 것은, 그것이 하나의 복을 받는 조건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때문이라고 증언했습니다.
예수가 오셨기 때문에, 그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께서 심령이 보잘 것없고 늘 절망과 자조속에 사는 사람에게라도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내가 왔잖느냐! 이렇게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온천하 만물에 창조주되시는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을 보는 것위에 더 매일 우리의 인생에 어느 날도 이 증거에서 도망갈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과 의로우심과 신실하심에서 도망갈 수 없는 세상속으로 우리가 들어와서 살고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써 이제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믿는다라는 뜻을 다시 한번 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8절로 가 보십시다.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여기도 보는 문제죠?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에 대해서 다 항복하지 못한 구석이 있다는 뜻이죠.
'하나님은 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욥이 했던 질문이죠. 하나님 한번 만나 봅시다. 우리 말에도 있죠? ' 너 나 한번 보자' 그 어려운 말이죠. 욥이 그랬고 빌립이 지금 그러는 겁니다. '주여 아버지를 보여주옵소서!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답했죠?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나를 보면 아버지가 누구인지 당연히 알아야된다. 왜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우리를 사랑하사 자신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 모두를 당신의 아들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은혜!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구체화되고 역사속에 인간의 모습으로 우리의 모습으로 우리의 형편에 우리의 자리에 실제로 찾아오신 분이 예수죠! 하늘에서 선포하고 만 것이 아니요, 약속하고 만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사 우리를 붙들기 위하여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자리에 까지 찾아와 우리를 껴안으신거죠. 당신을 우리를 위하여 내어주신 사건이 예수님의 성육신이죠. 그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나를 보아라' 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예수를 보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예수를 본다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거죠. 우리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함으로 기독교인이 되는 것과 기독교 신앙이 된 것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다는 게 무슨 말이냐?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죠. 예수가 누군지를 압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셔서 나를 당신의 아들로 부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공중의 새를 봅니다 하면 그게 무슨 뜻이냐,
성경적으로 공중의 새를 보니, 하나님의 통치의 의로우심과 넉넉하심고 신실하심을 봅니다,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에게 예수를 소개하고 있죠.
그래서 예수님이 지금 빌립앞에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아라 이겁니다.
만일 지금 이 시대의 교인들에게 예수를 믿는다는 말이 가지는 이 의미를 놓치면
우리는 하나님의 통치의 권세와 우리를 향한 특별한 열심,
우리로 그 자녀로 대접하신다는 이 개인적인 열정, 이 두개를 다 놓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꺼이 우주와 역사를 동원하십니다.
우리가 우주와 역사를 위하여 있기전에 온 세상과 역사가 우리를 위하여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골로새서 1장 14절에 가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예수는 누구냐?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와 화목하게 하시고 예수안에서 충만케하시기 위하여 보내신 그의 아들이십니다.
'메시아' 입니다. 이것은 예수 믿는 각 신앙인 개인과만 맺는 개인적인 관계를 넘어서서, 그 가지는 바, 하나님과의 화목과 하나님과의 연합이, 결국은 온 세상과의 역사에 운명을 하나님의 뜻대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크신 역사라는 차원속에서 일어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의만이 우리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요, 우리가 그의 통치에 속하는 것은 우리 각 개인의 행복과 필요를 채우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이 전 우주와 역사에서 이루시는 구원역사에 큰, 큰 내용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인의 신앙고백,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는 고백은, 말하자면 이런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그 속에 속한 한 고독하고 처량한 존재로써 종교라는 이름으로 비밀스러운 하나의 힘을 소유하는 비상한 한 방책을 소유하고 있는 존재에 불과하지 않고, 그가 만드신 모든 세계를 하나님의 첫 창조의 기쁘심과 뜻대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과 신실하신 뜻이 충만케되기 위하여, 그 창조의 가장 중심이었던 인간들을 회복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다시 모든 창조세계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원대하고 놀라우신 뜻의 중심 내용이신 것입니다.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대조하듯이 오늘 대조해보면, 나 하나의 옳음 나 하나의 만족에 급급한 정도로 부름받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 온 세계와 우주와 역사의 주인이신 통치자. 그의 거룩하심과 영광으로의 부름에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우리 개인과 우리가 속한 시대와 우리가 사는 세상앞에 비로소 빛과 소금으로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의 자리는 한 개인의 행복보다 큽니다.
한 개인의 승리보다 더 큰 책임과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대조되는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가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우리들의 신자된 삶은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에 자신을 복종시키며, 하나님의 의를 나의 의로 삼는 창조주 하나님의 어떠하심에 일하심과 충만케 하심과 새롭게 하심과 베푸시는 자비와 사랑에 참여하는 존재요 인생인 것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절대 절대 낮추지 마십시요. 한 개인의 행복과 만족으로 여러분의 신앙고백을 축소시키지 마십시요. 여러분 한 개인을 통한 하나님의 역사와 영광을 드러내는 그 감격과 기적을 사는 여러분 인생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예수 안에서 허락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요.
우리의 부족함과 미천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영광을 나누시겠다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그 자녀로 사는 믿음과 순종과 헌신과 그리고 충성을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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