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구별되는 예수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 그 의를 분명하게 보여주시시기 위해서 세가지 예를 드는 장면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들어 예수안에서 허락되는 하나님의 의가 어떻게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가,
더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뭔가,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드러나는 기도에서도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 아버지께 그 촛점이 있고, 그 기초가 있고, 내용이 있지, 신앙행위자에게 촛점과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은 사람들 앞에 평가받는 즉,
이 기도가 기도의 대상에게 주의가 집중되지 않고 기도를 하는 자에게 주의가 집중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7절에 있는 바와같이 이것은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며,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중언부언한다는 것은 그것이 주문을 외우듯이 주술적 차원에서 그 결과를 초월자의 힘을 빌어서 얻을 지라, 얻어내는 기술이 주술을 하는 사람에게 소유되어 있는 것같이, 그가 그 기술을 발휘하는 것같이 여겨지는 것과 대비됩니다.
기도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으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 기독교 신앙의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 더 포괄적으로 얘기해서 하나님이 누구시냐! 하는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여기서 베푸십니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이 마태복음과 다른 문맥속에 등장을 하지만,
이 마태복음은 이것을 이 산상설교 속에 특별히 하나님의 의를 확인시키는 장면에 등장시킴으로써,
우리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이 문제와 이 주기도문의 중요한 성격이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지 가르치는 셈입니다.
그래서 이 주기도문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거룩하심, 뜻, 영광, 권세같은 것들이 이 주기도문의 가장 중요한 첫번째 촛점으로 그 성격을 구성합니다.
두번째는 이 엄위하신 하나님이 절대적인 권위자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되는 인간이 등장을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모든 것을 빌어 얻어야 되는, 그래서 일용할 양식, 용서, 시험과 악으로부터의 구원이 등장을 합니다.
그래서 이 기도문을 보면, 기도하는 대상이 누구고 기도하는 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선을 긋고 있죠.
하나님의 절대적 권위, 존재와 그 하나님 앞에 도움을 요청해야 되는 우리의 한계가 잘 분명하게 대조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도문은 이 대조를 위하여 제시되지 않습니다.
이 기도의 가장 중요한 촛점은 이 기도가 시작하는 맨 첫단에서 등장하듯이, 아버지입니다.
우리말 어순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됐습니다만 원문은 우리 아버지가 서두에 나옵니다.
영어 역본도 Our Father in Heaven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로 부터 이 기도가 시작하여 주기도문에 허락된 그 촛점들이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우리가 누구냐하는 것이
차이와 분리로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이 차이를 아버지와 자녀로 묶어놨다는 것에 큰 강조점이 있도록 이 기도문이 허락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오늘의 기도의 내용들을 보시면, 사람에게 보이는 기도와 구별되는 예수 안에서 허락되는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그 자녀가 가지는 마땅한 자세, 본질적 그 요소로써 제시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의는 그 신앙 행위자에 촛점을 모아 사람들 앞에 평가를 받으려고 하는 것에 비해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됨으로써 그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자녀들의 마땅함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근데 이 마땅함이라는 것은 신앙적인 명령 요구로써 그 근거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삼으시겠다는, 성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시는 기쁘신 뜻,
그것이 예수를 보내어 증거되는 기독론적인 기초속에서의 관계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못 쫓아오겠죠? 쉽게 아주 짧막하게 얘기하면 이겁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부르시는구나.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책임도 아니고, 기능적인 것도 아니고, 현실도 아니고 (현실적인 필요 때문에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기쁘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든지 하나님을 아버지로써 찾아갈 수 있는 존재가 되었구나,
라는 것이 기도에 주어진 복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 부분은 오늘 우리가 분문으로 택한 곳곳에 사실은 반복해서 나오는데, 우리가 자주 놓칩니다.
6절에 보듯이 사람에게 보이는 기도가 이렇게 다릅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아버지 거든요.
길거리에 나가서 떠들고 내가 옳다 저사람이 그러다라고 떠들 필요가 없어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성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났느냐 감추어졌느냐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있죠. 7절에 있는 기도할 때 이방인이 중언부언하듯이 하지 마라 그러고 뭐라고 말해요?
8절에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이런 설명들은 다 우리가 어떤 특권속에 있는가, 어떤 지위속에 있는가를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기도라는 신앙행위는 그것이 하나의 수단일 수도 없고 강요되는 어떤 책임도 아닙니다.
신자에게만 허락되는 커다란 특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른다는 것은 무엇을 근거하고 있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을 근거하고 있습니다.
제가 조금 전에 얘기한대로 기독문 위에 기독교 신앙이 서 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주신다 라는 설명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수난 부활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만,
더 크게 그런 구원, 그런 영생은 모두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려하신다 라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관계성의 새로움, 창조주와 피조물인 인간사이의 관계를 행위로 관계를 성립시키지않고 부모와 자식의 관계같이 부성애로써,
부모와 자식의 혈연관계를 묶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구원에 근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에 가면 이 문제를 성경은 이런 식으로 확장합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 14장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된 사이의 긴밀하고도 영광스러운 관계를 14장 8절 이하에 이렇게 가르칩니다.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여기에는 조금 더 감추어진 저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메시아'라 말씀하시고 성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따라 보내심을 받은 성자 하나님이라 하십니다.
그러니까 빌립이 그렇다면 성부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땅에 보내셨다면 하나님이 당신을 보내신 표를,
또는 더 깊게 당신이 하나님이신 표를 보여주십시요. 뭘 보여달라는 거겠습니까. 그 초월성을 보여달라는 거겠죠.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았다면, 아니 하나님 자신이시라면 그 초월성을 보여주십시요.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답을 했다고요?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우리가 요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확증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은 초월성이 있는데,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는 하나님이 누구시냐가 속성에 있다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에 있다는 거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하나님은 우선시하고 더 강조하고,
우리는 뭘 우선시하고 강조하느냐하면 초월성을 강조합니다. 왜 그러죠?
초월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당장 하나님을 써먹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목적하거나 하나님에게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더 급하죠.
내 소원과 내 필요에 결과를 허락할 수단으로써,
능력으로써가 더 필요하지, 하나님이 누구시냐는 우리에게는 제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 대한 답입니다.
'그 보다 더 중요한 것 있다, 너희에 지금 필요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를 봐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10절에 이렇게 이어집니다.
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예수님께서 오셔서 한 일이 뭔가요?
당시 제자들이 기대했거나,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초월을 사용하셨지만, 그 초월을 정치적으로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사용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현실적으로 사용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은,
현실적인 요구들 궁극적인 요구는 뭐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찾아 오시면, 정치, 사회, 경제적인 차원에서 저들을 해방시켜 줄거라는 현실적인 요구와 무관한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죽은 자를 살리셨고 파도를 잠잠케 하셨고 문둥병을 고치셨고 장님을 고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초월적인 능력들을 정치사회적인 구조와 여론과 권력으로 사용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느냐하면 '내가 와서 하는 모든 일들이 한 인간의 존재와 현실과 생애와 필요에 깊이 개입하여, 그 모든 문제에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을 보여주고 있는지 봐라!' 라고 얘기하십니다.
'문제를 해결했는냐 못 해결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관심사가 어떻게 우리라는 이 피조물인 죄 지은 인간이 고통과 고난과 절망과 실패와 갈등과 긴장을 관심있어하사 개입하시는가 봐라!' 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 하나님이 우선 확인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신이 힘을 가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을 만해야 됩니다. 믿을 만해야 된다는 것은 인격에 관한 것이고, 성품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설명할 때, 하나님이 얼마나 초월자인가와 함께 하나님이 얼마나 믿을 만한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분이냐를 계속해서 반복해 강조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해결책이 보이는 현실을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깊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기로 하셔서 그 문제까지 간섭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진리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지금 눈앞에 닥친 먹을 것, 입을 것, 아픈 것에 급급하시지 않고 거기서 만족하시지 않으시겠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이런 말씀이 어어지죠.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내가 하는 일을 너희도 한다'는 무슨 뜻일까요?
성자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십니다. 무얼 위해 보내신다고요?
하나님앞에 범죄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십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다만 우리 죄를 위하여 값을 지불하시고 우리를 천국가게 하는 일을 만들어 놓고 가시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삶에 참여하십니다.
모든 인간의 실존을 체휼하십니다.
우리의 고통에, 우리의 고민에 참여하셔서 우리와 동일한 인생을 경험하시고 겪으십니다.
우리편이 되시고 우리를 이해하십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껴안으십니다.
이것이 성육신입니다.
하나님이 너희들이 어떤 고통, 어떤 고난, 어떤 한계에도 내가 외면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이 성육신입니다.
여러분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부끄러워하고 절망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이 외면하시는 것은 없습니다.
그 어떤 식으로 해결하느냐는 하나님의 뜻에 맡겨야 됩니다.
우리가 소원하는 것보다 더 깊고 큰 차원에서 해결하실 것입니다.
여기있는 예수님의 약속같이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라는 말같이 위로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이 뭘 했길래요.
고난받으셨죠, 오해받으셨죠, 비난받으셨죠, 고통당하셨죠.
빌립보서 2장에 선언하는대로 하자면, 그는 죽기까지 순종합니다.
죽음을 각오하는 것이 아니라, 죽습니다.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에 죽는다는 건 가장 큰 고통으로 죽는 것이요, 가장 큰 수치로 죽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된 인생 속에서 우리가 확인해야되는 기도의 큰 특권은 무엇이냐,
우리가 어떤 경우 어떤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입니다.
우리의 인생속에서 우리가 신앙을 가장 깊게 확인하는 것은 형통할 때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갖고있는 아마 다 누구나 가지는 본능적인 소원은, 내가 하나님 앞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내가 잘 돼서 반드시 기독교 신앙을 증언하고 싶은 소원이 누구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잘 안해주십니다. 제 경우를 보면 그렇습니다.
제 경우 신앙생활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소원하는 걸 이루어주시지 않을 뿐만아니라, 원치않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인생에 계속해서 계속해서 닥쳐옵니다.
물론 자신의 못남과 한계로 인해서 그렇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하고 무능함을 확인하게 하고 소원은 있으나 이루어내지 못하는 자신을 보게 합니다.
그때 우리는 무슨 질문을 하게 되느냐하면 하나님은 왜 내 진심을 안받아 주시는가 라고 처음에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한걸음 더 진전을 하시면 그 고난과 부끄러움속에서도 하나님은 내 아버지이심을 중단하시지 않는다,
부끄러워하시지 않는다는 걸 발견하시게 됩니다.
그것이 오늘 기도에서 발견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입니다.
여러분들은 다 누구나 그렇듯이 현실속에서 신자로써 사는 일에 버거운 짐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말못 할,,,
누구에게도 핑계를 댈 수 없는 여러분의 책임이고 설명할 수 없고 극복할 수 없는 고통들을 경험하게 마련입니다.
그 속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그런 자리에는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않고 여러분을 외면한다고 생각하시면 여러분은 성육신을 모르며, 하나님이 예수로 말미암아 부르신 그의 자녀들을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모르는 겁니다.
신자들이 증언해야 할 가장 중요한 증언 중에 하나는,
예수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느 만큼 잘날 수 있는가가, 형통과 승리로 성공으로 잘 나는 보다
더 크게, 못나고 절망하고 막다른 골목에 가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더 많이 증언할 수 있어야합니다.
이 세상이 위협하고 도전하는 시험하는 어떤것도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시고 증언하셔야 됩니다.
그것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한답니다.
큰 일이란 뭘까요? 우리는 성자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된다는 것을, 무한이 유한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큽니다. 그 은혜는 이렇게 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기로 한 그 작정과 그 뜻은 이렇게 놀랍습니다. 이건 뭐 정말 경이롭습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이해가 안 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의 증언은 성육신보다 더한 것도 한답니다. 그게 뭘까요?
하나님의 사랑은 은혜는 능력은 한계가 없다! 라고 가르칩니다.
우리 본성상 종교라는 것은 어쨋든 세상이 가지는 도덕과 그 다음에 능력에서도 우월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맞죠.
그러나 기독교가 가지는 윤리와 능력의 우월함은 성육신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성육신으로 이해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관계 없으면 그것은 결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에서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서 얻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은혜 위에 섭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 위에 섭니다.
그것이 필요없이 신앙이 논의되고 신앙이 비교될 수 있으면, 그것은 사람에게 평가받는 것에 불과해 집니다.
오늘날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기독교는 이 세속성 앞에 섭니다.
세속성이란 모든 사람이 합의하는 기준과 자격 위에 서라는 것이죠.
그건 틀린 말이 아니고 틀린 요구가 아니지만,
사실은 예수 없이 합의볼 수 있는 신앙의 기준을 ?그어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거부하는 것입니다.
몰상식하게 가겠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혼란과 그저 주관으로 자기 신념으로 빠지겠다는 게 아니라,
변명과 무책임으로 가겠다는 게 아니라, 예수 없이는 하나님이 누구시냐,
우리 인생이 일어나는 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를 다른 데서는 답을 찾을 수 없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이렇게 이어집니다.
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거죠.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은 예수 이름으로써만 성립합니다.
예수 없이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지 못합니다.
성자 하나님의 아버지, 성부 하나님이 그 성자 하나님을 이 땅에 인간으로 보내어 성육신하여 인생을 걷게 하심으로
우리 모두를 예수 안에서 이제 그의 자녀로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때는, 예수 없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선언해야 됩니다.
그리고 이 일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신답니다.
빌립보서 2장에 가보십시다. 이 문제를 조금 더 분명하게 확인해서 오늘의 말씀을 결론지읍시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1)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2)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또는 형체 또는 보류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3)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성육신, 수난, 이 모든 것, 말하자면 그의 순종을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신답니다.
9절에 있는 바와같이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왜 이걸 가장 좋아하시느냐,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이 누구냐가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누구시냐가,,,!
우리가 전하고 싶은 하나님은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내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이라,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려는 하나님이라를 증거하시고,
그 일로 우리를 쓰는 것, 그리고 그 일에 쓰임을 받는 것을 가장 높이신답니다.
여러분이 지금 고난속에 계십니까?
해결되지 않는 신앙의 갈등속에 계십니까?
그 속에서 여러분이 그 문제를 짊어져야하는 성경적인 근거는 이겁니다.
여러분이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요!
하나님은 모든 한계와 못난 것과 부끄러움과 실패와 절망에도 찾아오시는 분입니다.
그런 처지에 있다고해서 우리를 외면하지 않는 분!
능력과 쓸모로 찾아오시지 않는 분! 이라는 것을 우리와 우리를 통하여 증언하시는 일을 가장 기뻐하신다,
이게 성육신으로 인한 성경의 평가입니다.
그래서 11절에 이렇게 결론이 납니다.
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냐,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를 가장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이 오늘의 이 말씀을 듣고 무책임해도 좋다라고 이해하셨다면, 그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설교말씀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나의 못난 어떤 것도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없다,
나의 못난 것과 실패를 하나님 앞에 바친다,
나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처지와 못난 것도 외면하시지 않는 하나님이 저들에게 증거되기를 바란다,
나는 십자가에 죽어도 좋다! 라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지금 안고 있는 현실적인 고통과 신앙적인 갈등과 절망에서 벗어 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기꺼이 여러분의 십자가를 달게 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예수 안에서 우리 아버지로써 이렇게 놀랍게 증언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끄러움과 못남을 개의치 아니하시고 그 아들을 보내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
우리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자로 부름을 받았은 즉, 우리의 삶을 주 앞에 바칩니다.
우리의 못난 것과 한계와 부끄러운 것과 연약한 것을 주께 맡깁니다.
우리의 십자가를 집니다. 주의 부르심같이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쫓습니다.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우리의 하나님이 누구신가, 영광 나타내 주옵소서!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을 예수 안에서 발견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된 존재요 인생이니 두려울 것 없노라,
감사하며 돌아가는 심령들위에 영원토록 함계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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