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예수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의에 대한 구체적인 가르침을 생각하는 곳입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가지 경우를 가지고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의가 어떻게 다른지,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예수 안에서 허락받은 하나님의 통치의 옳바름이 무엇인지, 확인케하는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표현된 세상의 의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평가받는 것이라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평가하는 것이라, 그렇게 대조를 이루고 있죠.
세상의 의와 하나님의 의 가운데 지금 이 마태복음 6장에서 설명하는 세가지 경우를 보면,
공통되게 그것은 세상적인 보상원리는 아니다 하는 것이죠. 보이려고 한다, 보이는 보상을 받는다,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이렇게 나오죠.
그러면 예수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의는 보이는 보상이 아니라면, 하나님께 보이는 보상이되 은밀한 것이라면,
우리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이 일의 어려움, 세상적인 의와 무엇을 특별히 분명하게 구별해야 할까요?
그것은 이것이 세상속에서 권력이 되지않는다 하는것 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한다는 것은 사람에게 보여서 사람들에게 그 결과를 인정하게 만드는 보상의 원리를 위한 힘으로 작용한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죠. 가난한 사람이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을 구제라고 합니다.
어려움을 돕는다는 것이 세상적인 의에 강조점이라면,
성경의 하나님의 의의 강조점은 어려움속에 있는 사람을 돕는다는 뜻입니다.
돕는다고 얘기를 하니까 어차피 어려움이라는데 더 촛점이 가게되겠지만,
성경적으로 얘기해서 섬긴다라고 얘기하면, 세상에 돕는다고 얘기하는 것과,
성경은 섬긴다고 얘기하는 것에 그 표현으로써 대조되는 둘 사이를 금방 여러분이 이해하실 것입니다.
세상적인 구제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촛점이 있다면,
신앙적인 하나님의 의는, 어려움속에 있는 한 인간의 존귀함을 인정하는 것에 촛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테레사 수녀의 그 일생동안의 봉사활동을 보면, 그들이 인도해서 어려움에 처한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들을 평생해 왔는데,
저들의 구제봉사의 특징은,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은 아니었다라고 분명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불가촉천민'이라고 일컬어지는 최하층계급의 빈민에 속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물론 보이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며, 집안을 청소해 주고 그사람을 씻기고 하는 일들을 합니다만,
촛점은 이것이라고 테레사 수녀가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력하고 혹은 무지하고 혹은 가난하고 병든 어려움에 처해 있더라도 한 영혼과 인격의 존중함을 확인시켜주는 행위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배고픈 걸 면하게 하고 병든 걸 낫게 하는게 아니라, 병속에 있어도 가난속에 있어도 남들의 멸시 속에 있어서도,
한 영혼과 한 인격은 대접을 받을 존귀한 존재다, 하는걸 강조하는데, 저들의 봉사활동이 있다고 그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제 삼자에게 보이는 행위와 전혀 다르습니다.
전체 목적과 관심이 대접해야하는 한 영혼에게 집중된다는걸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보시다시피 세상적인 의는 제 삼자에게 보이려고 이 일을 행함으로써,
구제를 받는 사람을 수단과 희생물로 쓸 수밖에 없습니다. 잘 생각해보면, 비겁한 일입니다.
자신의 우월함과 자신의 어떤 종교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어려움에 처한 자를 수단으로 쓰는 것은,
그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 아마 잊기 어려운 상처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현실속에서 구제를 해보면, 우리가 바로 이런 문제를 돕기위한 일에 치중하다가,
한 인격과 영혼을 그 상처주는 일에 늘 반복해서 나타나는 현실입니다.
우리는 그래서 이 싯점에서 무얼 물어봐야 하는냐하면 사람이 보상을 거절하고 선행을 할 수 있는가,
자신의 우월감을 확인하지않고 선행을 할 수 있는가,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수 있는가,
어떤 원리, 어떤 이유, 어떤 동기, 어떤 이해가 그런 일들을 가능하게 하는가, 이렇게 물어야합니다.
그것이 지금 산상설교속에서 예수 때문에 입니다.
예수 때문에 라는 말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갈라디아서 6장에 가서 이 문제의 실마리를 풀어 보겠습니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갈라디아 교회 믿음의 공동체에 복음을 시험하는 잘못된 교훈이 들어왔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라고 해서 구원의 조건중에 하나로 할례를 요구한 주장이 들어왔습니다.
바울의 반박과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예수와 십자가외에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조건이나 근거가 될 수 없다,
또 십자가 외에 무엇을 십자가에다 덧붙일 수 없다 이것입니다.
그러면서 할례라는 것을 조건으로 삼는 이유는 너희가 신앙을 권력화하려는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지금 12장에 있는 바와 같이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박해를 면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예수를 믿는 것이 세상사람들에게 이해되는 원리나 보상의 법칙이 아니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아 박해를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13절에 있는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자랑한다는 건 그것이 힘이 되기를 바라는 거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그것이 힘으로 권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기를 바래서
그기에 세상사람들이 납득할 만한 어떤 규칙을 어떤 원리를 십자가 외의 내용을 구원의 조건으로 지금 덧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내용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로 살면서 가장 당황하는 게 무엇이냐,
그러면 우리의 믿음을 세상적인 이해관계로 혹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설명을 납득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받도록 손해를 받도록 혹은 벌을 받도록 할 어떤 장치도 기독교 신앙에는 없습니다.
그건 마지막 날에만 드러납니다.
예수님 다시 오시는 때에만 예수를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의 구별이 얼마나 큰 것인가가 드러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전에는 복음은 구원으로만 제시되며 사랑과 은혜로만 제시되지,
심판으로는 지금은 물리적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이 하는 얘기는 이겁니다.
14절에 있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라는 얘기는 내가 예전에 속했을 때에는 세상의 원리 세상의 힘이라는 것으로 살았다면,
지금 예수 안에서는 세상적인 법칙이나 세상적인 힘이 작용하지 않는 세상속에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허락된 세상이다, 여기서는 힘으로 주장하지 않고,
예수님 말씀하신 것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의와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의의 대조점은 분명해 졌습니다.
그것이 힘으로 작용하느냐, 섬기는 것으로 작용하느냐죠.
권력이냐, 희생이냐 이렇게 드러납니다.
그 구제가 그 어려움과 난관을 해결하는 것으로써 작용하면 그것은 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가난과 어려움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 속에 있고 무력함 속에 있고 난처함 속에 있는 자를 위로하는 것이라면, 그건 힘이 될 수는 없습니다.
뭐 아무리 편을 들어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속에 있는 자를 말하자면, 진심으로 그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는 그건 뭐 쓸데없는 것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렇게 그냥 말로 설명하는 것같이, 하나는 현실적인 힘이 되고 하나는 이상적인 그 요구이다라는 식으로 나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이렇게 힘을 사실상은 가집니다.
로마서 5장 5절에 가시면, 한 영혼에 대한 진정한 대접, 존중이라는 것은 이 나라가 예수로 말미암아 허락된 나라, 예수 안에서 허락되는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속에 이런 사실은 무시무시한 실제적인 힘이 있습니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 앞에 설명한 대로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어쩌다 있는 정도지만,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는 없습니다. 그렇죠?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죽으십니다.
하나님이 그리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제라는 이 신앙실천에서 이 구제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속에 있는 난관과 곤경 속에 있는 한 영혼을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찾아오듯이,
찾아가는것이 구제라 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충분의 내용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사랑하여 마치 더 이상 귀한 것이 없는 것같이,
우리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것같이 그 아들을 보내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오늘의 신앙을,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통치를, 허락받게 했으므로 우리는 지금 내가 볼 때,
사랑하고 돕고 찾아갈 필요나 이유가 없는 사람들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기독교만이 가지는 구제인 것입니다.
그의 존귀함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오늘 내가 있는 것과 동일한 이유로,
저가 아직 그의 어려움 속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르고 그 은혜와 사랑을 모르는 자리에 있을 지라도,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역사적 사실 속에서 나를 부르신 나의 분명한 현실 속에서,
그를 향해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신 대상이다라고 믿는 것이죠!
그게 구제입니다! 전혀 다르죠!
이 문제는 고린도후서 5장에 가면 조금더 이렇게 정확히 설명이 됩니다.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또는 끄는도다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사도바울이 전하는 건 뭐죠?
이 세상 나라와 다른 하나님 나라입니다.
영원한 나라이고, 그리고 그 나라는 의와 진리와 선하심과 긍휼과 자비의 나라입니다.
이 세상의 경제, 이 세상의 가치, 이 세상의 힘과 다른 진리와 생명과 의와 거룩의 나라입니다.
그걸 위하여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 안에서 우리는 그 나라로 부름을 받으며 예수 안에서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이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시는 존재, 하나님이 원래 창조했던 존재로 회복이 되고 부활하며 새로워 지고 충만해 집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 안에 있으면 다른 존재가 되고,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고,
우리로 하여금 전도하며 선교하며 우리 인생을 살므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게 하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구제에 나서는 기본 동기요, 근거입니다.
구제만을 하라는 것 아닙니다.
구제만 특별한 신앙실천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한 영혼을 만날 때 우리 이웃을 대할 때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새로운 피조물이 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기독론적으로 마음에 기억하고,
내가 이미 그런 경험과 체험과 은혜 속에서 이 자리에 있는 줄 아는 믿음으로 이웃앞에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린 결단코 그 사람을 놓고 나의 먼저 믿은 것, 그의 아직 믿지 않는 것, 혹은 나의 여유와 그의 부족을 인하여,
그를 희생물로써 또는 구제라는 이름을 동원하여 나를 증명하지 않습니다.
나를 증명하지 않고 예수를 증명합니다.
예수 안에, 그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사는 자의 다름,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으로 삽니다.
이 문제가 구제라는 문제로 여기 설명되기 때문에 여기 자칫 잘못하면 이것이 하나의 행위, 명분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뒤에 기도나 금식같은 예를 드신 이유도 그것이 사회앞에서,
그러니까 우리가 몸담고 살고있는 세상에서 우리 이웃들앞에 종교적 범위로,
내용으로 혹은 영역으로 도망가는 것을 예수님이 경고하신 말씀인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존재하며 하나님이 함께 살게하신 이웃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써 다르게 서있어야 합니다.
다른 이해와 우리가 가진 신앙고백의 진정한 내용으로 무장되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가장 많이 나타나는 이런 예를 하나 들 필요를 느낍니다.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신앙을 권력으로 가지느냐 할 때, 우리가 가장 크게 명분으로 가지는 데, 그
명분을 보통은 대화 속에서 이미 그 휘두룹니다. 우린 누구와 얘기를 할 때,
그 대화가 상대방의 입장을 들어준다든가 상대방의 고통을 들어주는 자리에 잘 못갑니다.
우린 빨리 정답을 얘기할려고 합니다.
우리가 빨리 정답을 얘기할려는 가장 큰 이유는 뭐냐하면, 상대방의 얘기를 들어 줄 여유기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주장이 수준이 낮을 때도 있고 관심이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구제에서 보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가 가난 속에 있는 혹은 곤경 속에 있는 존재를 곤경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귀히 여겨줘야 된다는 것으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
예수님께서 스스로 지은 죄 때문에 영원한 멸망을 자초한 인류의 곤경속에 찾아오신 것같이,
우리의 모양 우리의 모양으로 우리의 형편에 동참하신 것같이,
그리고 힘으로 우리를 위협하시거나 소위 공갈을 치신 것이 아니라, 참으로 우리를 위하여 당신이 죽으신 것같이,
그렇게 우리의 삶을 우리의 일상을 신앙적으로 고쳐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 속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명분이라는 것이 가장 크게 권력으로 작용합니다.
제일 많이 하는 말, 기도 안해서 그래! 이렇게 하는 것은 더이상 얘기하지 말자는 것인데,
얘기하지 말자는 건 뭐냐하면, 너는 나에게 너무 하찮다 그런 뜻이 됩니다.
그러시면 안됩니다. 물론 끝없이 하소연을 들어줄 수는 물론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할 체력도 시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알고는 있어야 됩니다. 내가 얼마 못참고 도망왔다, 그건 알아야지, 누구누구는 xx다 이렇게 하는 건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는 절대 변명할 수 없게 되어있는 것이 오늘 구제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명분으로 입을 틀어 막거나 그 다음에 이것보다 좀더 나쁜 형태는 고함을 지르는 것이죠.
고함을 질러서 대화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으로 하여금 자격이 없게 만들어 버리고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실은 기독교 신앙행위에서 제일 자주 등장하는 겁니다.
그리고 가장 고급한 내용을 얘기할 때도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세상 권력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이 세상이 보다 정의롭고 민주적이고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이것을 지금 구제에서 논하는 바와 같이 그러니까 해결로써 이런 단어들을 동원합니다.
자유, 정의, 민주 이런 것들이 방법으로써 등장하고 있어서 일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지, 말하자면
이런 난관과 현실을 당한 자로써 고급하게 감수하고 극복하고 이겨내는 모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물론 더 정의로운 사회가 되고 더 복지국가가 되기를 저도 소원합니다.
그러나 그기에는 그 사회와 국가에 속한 한 시민, 또는 우리 믿음의 공동체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한 성도가
자신에게 허락된 환경과 조건 속에서 신자로써 어떻게 자신을 나타내어 하나님 나라의 다름,
마태복음 5장에서 이미 예수님이 지적하셨듯이 빛이 되며 소금이 되느냐,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에,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동원하고 우리의 주장을 동원하고 있는 꼴이 된다 그겁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크게 우리는 억울해 합니다. 우린 분노합니다.
왜요? 일이 해결되기를 바라지, 모순, 비리, 억압, 곤경이라는 것을 예수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로 받아내는 그걸 다 지고 일어서는 신자의 모습에 대해서는 우리가 사실은 관심이 없습니다.
로마서 14장 7절에 가면 그래서 이 문제가 더 현실적으로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이 로마서 14장 얘기는 초대교회 때 예수님 오셨던 그 시대에
로마의 속국으로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있었던 현실적인 어려움에 관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건 뭐냐하면 로마가 여러 신을 섬기고 있었고 시장에 나오는 육류는 전부 그 국가 신들 우상들에게 바쳐졌던 제물입니다.
그러고야 시장에 나왔습니다. 그기다가 우상제물이니까 먹어서는 안된다 라는 것이 기본적인 신자들의 입장이었고,
사도바울은 뜻밖에 고린도전서 8장에 소개된 대로 괜찬다, 그랬습니다.
사도바울이 괜찬다고 하는 것은 우상은 없다, 그건 인간들이 스스로 속고 있는 것이지, 하나님외게 다른 신은 없다,
그러니 다른 신이 없는 걸 아는 이상, 그 아닌 신에게, 없는 신에게 바쳐진 걸 먹는게 무슨 문제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서도 뭐라고 얘기하느냐하면 그기까지 이해력이 없는 신자들에게 시험되지 않도록 먹지마라,
그러나 먹는 게 죄는 아니다.(그 문제는 고린도전서 8장 설교 때 했으니까 나중에 필요하면 참조하십시요)
그러면서 로마서 14장에서 무슨 얘기를 하냐하면, 동일한 얘기입니다.
먹는자와 먹지 않는자, 그러니까 먹는자도 주를 위하여 먹고, 먹지 않는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않는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시다, 예수만이 유일한 구세주시다, 그래서 다른 우상은 없는 것이니까 상관없다 라고 알고 먹는 것이고,
안 먹는자도 하나님밖에 없다의 다른 신의 제물을 먹을 수 없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희 둘이 누가 옳으냐로 상대방을 꺽어 자기 정체성을 증명하는 식으로 싸우지는 마라!
요기가 중요해요!
상대방의 틀린 것을 지적하여 나의 옳음을 지적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적극적인 방향과 방법이 아니다! 이거죠!
그래서 이 지금 다시 봅니다만 7절에 있는 '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
이 9절 말씀을 '유진 피터슨'이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메세지' 라고 된 신약성경 그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 쓴,
본문의 내용을 최대한 살려서 이해하기 좋게 풀어 쓴 성경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여러분 가정에 '메세지'라는 성경책을 (신약만 있습니다만) 한 권씩 비치하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보시기 권합니다.
이 9절을 이렇게 풀어 썼습니다. '삶과 죽음의 전 영역에 걸쳐 우리의 주인이 되셔서 서로가 서로에게 행하는 소소한 복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뜻은 서로가 서로에게 행하는 소소한 복종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만드시기 위함이었답니다.
소소한 복종이 뭔지 알겠죠?
우리는 가장 간단하고 쉬운데서부터도 말하자면 권력을 써서 자신을 옹호하고 자신을 확인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란 자신을 어디서만 확인하느냐하면 예수안에서만 확인합니다.
예수 안에서 확인하는 건 뭐냐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어 허락하시는 그 나라의 의, 자비하심, 긍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론에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존재와 역사에 그리고 운명에, 하나님이 개입하시되,
의와 선과 능력과 거룩과 영광과 사랑으로 개입하시고 약속하시고 작정하시고 이루실 것이라를 아는 것으로
우리와 타인을, 나와 환경을, 내가 속한 나라와 역사와 운명을 이해하고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구제로도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삶에 여러분의 자리를 예수 안에서 확보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우리 이웃앞에 우리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제, 예수가 누구시냐! 하는 중요한 증언을
다른 방법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 고백과 여러분의 삶의 현실과 조건들에 대하여 믿음을 가지시고,
억울함과 분노에서 벗어나셔서 성경이 그토록 여러번 강조하는 이것! 감사함으로 감사함으로
여러분의 존재와 인생을 하나님께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그의 큰 기적을 경험하십시요.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시고 지금도 우리를 통하여 이웃을 찾아가시며,
이 세상의 아버지의 은혜와 영광을 나타내려 하십니다.
이 일에 우리가 믿음을 갖게 하시옵소서.
우리의 이해가 가지않고 도무지 맥히지않는 현실을 믿음으로 감싸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존재하며 인내하는 충성을 주앞에 바치고,
우리가 이 자리에 온 것같이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과 이웃이 하나님을 만나는 은혜와 기적이 있다는 것,
알고 믿고 실천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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