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11)

새벽지기1 2016. 7. 7. 07:04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우리는 산상수훈 설교중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를 성경말씀을 따라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오늘 본문이나 지난 주 본문같이 로마서에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 의를 소원하고 기뻐하고 우리안에 가지고 싶은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것이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는 중입니다.
지난 주에 확인했다시피 우리의 신앙현실은 우리의 기대와 또는 생각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현실이 온다할지라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꺾을 수도 없고, 우리가 볼 때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같지않은, 우리가 소원하는 것과 다른 길의 모습도 결국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승리로 주시는 길일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현실보다 크다 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 현실이 오늘은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일하는가 하는 것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다시 확인해 보고싶습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이 본문은 풀어쓰면 이해하기 좋게 좀 자세하게 표현을 하자면 너희 자신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살아있는 재물로 드리라란 뜻입니다. 너희 몸을 또는 너희 자신을 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이것이 관념적이거나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우리의 몸을 포함한 전인격이 바쳐지는 제사를 원하고, 산재물이라는 것은, 살아있는 재물, (이것 오해의 소지가 좀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제물, 현실을 사는 삶으로 제물로 드려라 그런 뜻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이 쉽게 이상적으로 또는 이렇게 종교적인 명분으로 흘러서 육체가 포함된 실체로 이해하는 것과,
현실을 어떤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하심이라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일에 매우 본능적으로 취약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 모든 것을 면제받거나 우회하거나 또는 쉽게 쉽게 넘어서는 것일거라고 기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장 1절이하의 말씀에 이렇게 사도바울은 신앙의 실제적 진전을 이렇게 권유하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와 또 온 아가야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3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5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6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준 사도바울의 편지인데, 지금 읽은 이 내용의 의의가 편지의 서두에 등장하는 내용은 고난이라는 것이 성도들의 신앙현실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바와같이 신앙이 나빠서 고난을 당하고 신앙이 좋으면 면제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인 설명과는 다르다 아거죠.
너희가 받는 환란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도 환란을 받고 있다 라고 얘기하고 하나 더 지나가서 7절,

 

7    너희를 위한 우리의 소망이 견고함은 너희가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된 것 같이 위로에도 그러할 줄을 앎이라
8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너희가 받는 환란이 신자 모두가 다 당하는 당연한 현실이며, 내가 너희를 위로하는 것은 나는 환란에서 면제됐거나 환란을 넘어섰기 때문에 너희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환란을 당한 자이기 때문에 너희를 위로할 자격이 있다 이렇게 말을 한다 말이죠.
사도바울이 당한 환란은 어느 정도였느냐하면 죽음을 각오한 정도였다 이거죠.
이젠 죽는구나하고 생각하는 죽음을 직면한 자리까지 그 환란을 당했었다고 얘기합니다.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환란이 당연한 것이고 환란을 당함으로써 환란당한 자를 위로할 수 있다는 자격, 조건을 넘어서서 환란이 적극적인 이유가 있는것이구나 라는 생각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모든 성도에게 있는 것이요,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자에겐 없고, 실패한 신앙인에게만 오는 것이 환란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잘잘못을 따져봐야하는 문제지만, 지금과 같이 성경이 환란이 어느 성도나 당하는 당연한 현실이고 신앙인생의 그 과정이라면 그 환란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와 어떤 목적이 있는가 따져봐야죠.

 

우선 확인하는 건 이겁니다. 환란은 우리를 이상과 꿈에서 끌어냅니다. 우리는 기독교신앙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힘든 현실을 그 모면하는 또는 해결하는 방법일 거라고 제일 먼저 기대를 합니다. 우리는 행복을 원하고 평안을 원하고 형통을 원합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신앙생활은 지금 우리가 기대하는 답을 쉽게 주지않습니다.
오히려 일반인들이 당하는 것보다 더 큰 고난과 갈등과 절망과 실패를 맛보게 합니다.

 

왜 그러는가! 이걸 오늘 해결해야죠.
첫번째 이유는 우리를 쉬운 해답으로부터 끌어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목표하심을 하는 것보다, 고통을 면하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그렇게 쉽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얘기하고 있는 셈이죠.
그래서 환란이 우리를 인간의 가치와 의미와 또는 그 목표가 하나님의 작정속에서 우리의 기대보다 무한히 높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쉬운 답으로는 답을 삼지않으시겠다고 작정한 것이 모든 신자가 당하는 환란이라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신자된 신앙현실이 고통스럽다면 우리는 오늘 성경적인 답을 찾아야됩니다.
그 고통을 면하며 그저 편안함과 아무 갈등이 없는 상태를 요구한 것은 성경이 얘기하는 신자의 목표와는 다르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말하자면 환란이, 현실이 이런 것을 만든다고 얘기하는 셈입니다.
우리를 이해력과 인내력과 더 깊은 생각으로 우리를 이끈다 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고통을 당하거나 실패를 당하지 않고, 고통을 당하거나 실패를 당한 자를 이해하고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지금 사도바울이 얘기한 것같이 더 크게 예수님께서 우리 인생을 체휼하셨기 때문에 우리를 도울 수 있다라고 선언합니다. 그렇게 얘기함으로써 우리의 고난과 어려움들을 (자꾸 반복하지만) 면하게 해주겠다가 아니라, 돕게하겠다고만 얘기합니다.
신앙현실의 고난은 환란은, 이 실패와 낙심들은 우리가 반드시 제대로 이해해야 할 신자의 인생경로가 되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렇게 더 깊은 설명으로 인도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선 다른건 다 그만두고 분명한 건 이겁니다. 우리는 늘 죽음에 넘기워진다고 성경이 선언한다는 사실이죠.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시기 때문에 고통에서 실패에서 갈등에서 면제받지 않는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여기 있는대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는 현실을 살아야합니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를 모시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의 6절에서 얘기한 바와같이 창조의 능력으로 허락된 것이랍니다.
창조의 능력이란 6절에 있는대로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라고 얘기함으로써 우리가 가진 신앙, 예수를 믿는 신앙, 예수 안에 있는 구원,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허락된 것이라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예수를 소유하고 있고 예수 안에 있고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았다고 해서 혹독한 현실을 면제받고 있지 않다는 얘기를 한다는 사실이죠.

그럼 왜 이런 길을 요구하시는가?


지금 이 본문대로 하자면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라고 얘기합니다.  이 말씀은 얼핏 잘못 생각하면, 물론 우리는 유한하고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말하자면, 조종아래, 조작아래 붙들어 맸다 이렇게 오해할 소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목적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는 즉 구원의 목표는 인간이 소원하고 할 수 있는 상상과 소원과 능력보다 큰 목표 아래 있는 것이다 라고 얘기하는 것이죠.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않다는 것은, 우리 예수 믿으면서 현실속에서 우리가 가장 갈등하는 것,
왜 하나님은 평안을 주시지 않는가, 답을 주시지 않는가, 많은 것 바라지 않고 남에게 그저 아쉬운 소리하지 않고 우리 가족 그냥 화목하게 사는것 정도도 안들어 주신단 말인가 로 하나님은 타협하시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고달프죠.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적인 표현으로 훌륭한 사람을 만들기로 작정을 하신겁니다.


러니 쉽게 살 생각은 그만 두십시요.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셨다는 말의 무게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냥 뭘 아드님까지 보내시며, 편지 한 장 아니면 명함 한 장 싸인해서 주시지, 이게 우리의 우리가 가지는 신앙현실에서의 가장 큰 오해일 것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그래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살아서 죽으라고 요구 하시는데 무서움이 있습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감수하라는데 어느만큼 감수하면 보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맞이하는 자라까지,
죽음을 각오하는 자리까지 이 현실을 살아내라고 합니다.
그래서 좀 극단적인 표현을 쓰면 죽으랍니다. 실패하고 죽으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하여야만 우리 안에 보배인 예수가 누구인지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부르신 복음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가 드러난다고 얘기합니다.


이 참으로 놀랍죠.
우리에게는 이 문제가 이해가 안됩니다.
우리가 능력이 있고 의지력이 있고 책임감이 있고 실력이 있고 지위가 있어야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가 믿는 복음의 내용이, 또 신빙성이 있는 증거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보고 죽으라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현실 속에서 무얼 각오해야 되느냐하면, 우리의 현실이 여기 10절에 있는 식으로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라는 표현에 나타나는 바와같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죄인들 손에 의하여 죽으신 죽으심으로 끝난 인생을 살았습니다.
부활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죽으셨지만, 이 세상이 예수님에게 강요한 것은 죽음입니다.
그 죽음을 걸어야 합니다. 그 죽음을 걸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 오늘 본문인 로마서 12장 1절에서 얘기한 것과 같이 우리 몸으로 살으므로 그 죽음을 감수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거 얼마나 어려운 요구인지 아시겠죠?


우리가 우리의 현실을 극복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해답을 받든가, 어려움을 통해서 무슨 더 놀라운 다른 보상을 받는다는 개념보다 우리라는 존재가 죽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조와 재창조의 역사를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수긍하여 감수하라는 뜻입니다.
어렵죠?
신앙생활에 대한 가장 큰 오해와 유혹은 이것이 보이는 현실에서 보상을 받을거라고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 실제로 그 보상들이 없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확인시키며 우리 인생이 얼마나 하나님께 중요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약속 속에서 움직이는 것인가를 확인시키는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현실적인 답을 주십니다.
우리 예수님의 생애에서도 보아왔고 교회사 속에 일어났던 사건들로 그것은 고칠 수 없는 병이 낫는다던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기적적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늘 있어옵니다. 그러나 결국은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고난의 생애를 살도록 부름을 받지, 한번 어떤 보상을 받고 나니까 다시는 겨울이 되어도 춥지않고 여름이 되어도 땀이 나지 않는 인생이 되는 그런 길로 부름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현실속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요구하는 각자의 삶을 감당해야되는 것입니다.
그 인생을 수긍하고 순종하셔야 됩니다.
우리는 기독교가 보란듯한 명분과 형태로 나타나기를 바래서 우리의 신자된 생애가 임무를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임무를 가졌다는 것은 크게 틀린 표현은 아니지만, 자꾸만 오해되고 있습니다.
보란듯한 종교적 형태와 사건으로 만들어질 거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일상생활이라는 것은 누구와 누구와 구별이 되지 않는 그저 우리 세상적인 표현으로 지지고 볶는 그런 삶의 연속입니다. 아무리 잘해도 표날 것이 없고,  또 아무리 도망갈려고 그래도 도망갈 수 없는 반복되는 끈질긴 도전이요 시험입니다. 그 삶을 사셔야 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삶을 수긍하여 여러분이라는 존재가 시간과 공간이라는 이 창조세계 속에서 현실이라는 어떤 조건과 환경으로 여러분에게 도전해 오는 것을 여러분의 몸과 마음으로 실체를 가지고 구체적인 반응을 하는 일! 그것을 성경이 요구합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도망가지 않았고 여러분이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러분의 존재를 삶으로 구체화해야 합니다.

 

울고! 분노하고! 슬프하고! 안타까워하고! 한숨짓고! 를 해야 됩니다.
그때에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이라는 존재 속에서 보배로써 빛을 발하게 하실 수 있답니다.
여러분이 그 여러분의 인생을 감수하시면 예수님이라는 존재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허락된 구원의 빛을 발한다는 것은,
그렇지않을 때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임재하실 어떤 매체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셔서 육신을 입으심으로써 요한복음 1장 14절의 표현대로 하자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런 가시적 존재로 우리의 삶을 시험해야 됩니다.
이것이 현실이 가지는 중요한 긍정적인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곤고한 생애속에 살게 하시는 이유입니다.
내가 내 삶을 수용함으로써 순종함으로써,
나라는 존재가 현실속에서 하나의 자리을 갖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내실 자리를 얻으시게 됩니다!
우리는 죽습니다.
그러나 이제 11절에 보는바와같이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2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놀랍죠!
우린 죽어갑니다. 죽음으로 내모는 현실속에 있습니다.
그 현실의 도전과 현실의 그 끌고가는 힘에 우리는 반응합니다. 적극적으로 그 삶을 수용합니다.
그래서 죽어갑니다. 그 죽음! 죽어가는 죽음의 자리까지 가는 내 생애, 나라는 존재가 현실속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여,
그기 우리가 모신 예수님이 시공간 속에 현실  속에 자리를 차지하시게 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는 이 죽어가는 일을 말하자면, 현실의 도전을 극복해야되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극복은 그런 의미에서 현실의 고통을 넘어서는 것, 그것은 그 갈등과 슬픔을 비껴가는 것, 해결하는 것이라는 개념에서 극복이 아니라, 현실이 죽음으로 내모는 것이 내 존재와 내 신앙의 전부가 아니다, 내 죽어가는 인생, 죽음으로 내몰리는 내 존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생명이 드러나기 위하여 요구하는 실체다 라는 걸 인정하여, 죽음으로 내모는 현실과 인생을 수용하는 겁니다. 기꺼이 수용하는 겁니다.
나는 죽음으로 내몰리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 라고 내 인생을 내가 수용하고 순종할 때,
그것을 우리가 신앙으로 현실을 극복한다고 얘기합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사셔야합니다.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여러분의 인생입니다.
여러분의 각자의 자리를 보십시요.
여러분의 아내와 남편, 자식, 부모, 일가친척, 동창, 이웃, 그 시대, 그 나라, 그 사회,, 이렇게 우리가 얼마나 씨줄과 날줄로 서로 촘촘히 연결되어 있는 지 모릅니다.
나 하나의 존재가 얼마나 많은 사람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고,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며, 내용을 가지며 목표하며 현실을 어떻게 수긍하고 소화하고 담내하는가가 나 하나의 존재를 통하여 내옆에 , 사실은 전 인류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나비효과 아닙니까.
나비의 날개짓 하나가 태풍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 하나의 존재는 큽니다.
우리는 우리가 나비에 불과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태풍을 만들어 내는 줄  모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이 요구한,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빌립보서 4장 13절에 있는 사도 바울의 이런 고백들이 이제 무슨 뜻인지 알게 됩니다. 11절부터 보죠.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갖혀있고 빌립보 교회에서 그를 위로하러 찾아왔습니다.
그기다 준 편지입니다. 너희들이 찾아와줘서 고맙다, 위로해줘서 고맙다.
내 궁핍한 것, 곤고한 것을 너희가 채워줘서 고맙다는 얘기 아니다!
나는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안다. 나는 그 모두가 상관이 없다.
왜요!
하나님이 그에게 어떤 현실을 요구하든 순종할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길을 통해서라도 하나님이 그길에서 나를 통하여 기적을 이루실 줄을 이제 그는 압니다.
그래서 뭐라고 고백해요?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쉽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나 무슨 꼴이라도 당할 수 있다, 그렇게 얘기하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하는 것 어렵습니다.
누가 쉽다고 말하면 믿지 마십시요. 쉽지 않습니다. 어렵습니다!
왜 어려우냐고요? 하나님은 우리를 신적 수준과 목적을 가지고 간섭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작은 인생, 감추어진 인생이 하나님의 큰 손길인 것 기억하십시요.
여러분이 충성을 다하면 여러분 하나를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자신에게 우선 하나님의 이 높고 놀랍고 깊은 뜻을 알리시고 채우실 것입니다.
각자의 삶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충성하시고 극복하시고 인내하시고 순종하시는 승리를 오늘의 말씀으로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 그래서 예수님을 모시고 현실을 사는 것 큰 복입니다.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힘에 부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고 죽을 각오를 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고백과같이 우리가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내리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아야 옳습니다.
이 믿음의 승리를 주십시요. 우리의 인생을 바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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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예배 설교 

녹취록 이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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