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12)

새벽지기1 2016. 7. 12. 07:53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늘 보시는 본문은 6장 1절에 요약된 것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조심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2절부터 구제와 기도 금식, 세가지 가장 대표적인 종교행위를 예로 들어서 그것이 가장 기독교 신앙행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상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내용은 우리 지금 계속 살펴보는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예수 안에서 허락되는 하나님의 의에 다른 점을 가르치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것과 하나님께 보이는 것을 이 6장에 내용들을 통하여 확인해보면, 사람에게 보이는 것은 2절에서 보는 바와같이 '외식하는 자가,,,' 라고 해서 마음으로부터의 변화가 아니라, 겉으로만 그런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그리하는 것이며 2절 마지막에 보듯이 그들은 자기 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외식하고 영광을 구하고 그 상을 받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명분이 되는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죠. 명분이란, 사람이 마땅히 따라야 할 도리라, 이렇게 사전적으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마땅히 해야되는 일인데 그 마땅한 일을 오늘 본문으로 얘기하면 사람과 합의를 한 마땅함이죠. 하나님과 합의한 마땅함이 아니라, 사람과 합의한 마땅함인데,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대조되어 세상과의 타협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 합의한 것이어야하고 하나님이 뜻하시는 것이어야하고, 세상이 구하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근데 이 문제가 왜 문제가 되느냐하면,

이것이 지금 보상을 받을 수 있고 사람들 앞에 힘을 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의 의는 세상이 이해하고 항복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이해될 수도 믿을 수도 순종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산상수훈에 시작 부분에서 팔복이 예수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
그리고 예수만 있다면 어떤 조건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복을 다루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세상이 공감하고 인간이 만들어내는 의라면,
하나님의 의는 예수안에서만 성립하고 그리고 이해되고 실천될 수 있는 의라 이렇게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 두개의 교묘한 교묘한 그 문제가 뭐냐하면, 그것이 세상앞에 기독교적 신앙에도 그 세상이 인정하는 요소가 있다는 것이죠. 그게 뭐냐하면, 윤리와 도덕입니다. 선행입니다. 그러나 오늘 이제 지적하듯이 세상이 인정하는 명분들이 예수가 있어야만 이해되는 것이냐, 예수없이 이해되는 것이냐가 이제 대조하여 여기식으로 얘기하면,
저들은 자기상을 이미 받았는데 제대로 된 하나님의 의는 실천해야 하며,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은밀하 갚는다라고 얘기함으로써,

가장 분명하게 세상에서 보상을 받는 것과, 세상에서 보상을 받지 못하고 하나님께 보상을 받는 것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문제가 얼마나 우리에게 본성적인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살고있는 현실속에서 얼마나 큰 유혹인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의 가장 큰 약점은 외식으로 드러났듯이,

저들이 속이 바뀌거나 진심인 것이 아니고 변화된 인격과 성품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순전히 보상을 받기 위하여,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꾸민 짓이라는 것이죠.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꾸민다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오직 세상에서 보상을 받기위하여 자주자주 오용되는 일반적인 현실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을 거짓되게 가장할 수 있죠. 얼마든지 우리가 현실속에서 보는 일인데,
예수 믿는 자도 그럴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중요한 경고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시험과 오해가 기독교 신앙속에도 파고 들어올 수 있을까요.
갈라디아스 6장은 이렇게도 경고합니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이 14절에 있는 바울의 선언은 이겁니다. 내가 속해있는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통치가 유일한 통치요, 질서요, 내용인 나라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세상나라에 속하지 않는다. 이 두나라는 혼합될 수 없다. 병존할 수 없다. 그렇게 선언합니다. 앞으로 더 살펴보겠지만, 그렇다고해서 두 나라 중에 어느 나라를 지금 완전히 외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어느나라에 속하는지는 분명히 선택해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통치에 속하기로 믿고 결심한 자들 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나라에 속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구분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이지 않고 지리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렇죠.


그것은 십자가로만 분리됩니다.
십자가로 분리된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지신 십자가로 허락되고 들어가고 누리는 나라이고, 이 세상은 십자가 없이 존재하고 유지되고 누리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두 나라를 구별짓지, 다른 것은 두 나라를 구별짓는 어떤 것도 되지 못합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왜 이런 너무나 당연한 말이 강조되어야하느냐하면 우리는 짐심을 가지고 우리가 믿는 믿음의 진리됨과 영원함을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의 내용들과 믿음의 약속들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우린 어떤 마음이 드느냐하면, 우리가 예수 믿어서 어떻게 형통해지는가, 예수 믿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보다 윤리 도덕적 차원에서 나은가,
또는 한걸음 더가서 우리가 얼마나 유익한 존재인가를 증명하고 싶어합니다.
이런 것들은 다 진심에서 출발하지만, 잘못하면 이것이 십자가를 필요없게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조심해야 됩니다.

 

아주 우리 한국교회에서 오해되는 이 문제에 관한 이런 예를 들어 봅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한국교회 역사상 가장 큰 신자 수를 확보하고 있지만, 영향력은 줄었다하는 비평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예전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교회에서만 힘을 쓴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유익했다, 교개 지도자들은 나라의 지도자였으며 사회의 지도자였다, 오늘날 기독교는 그 힘을 잃었다, 이것은 참으로 마땅한 지적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렇게 쓰여질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쓸모가 있음으로써 이 나라와 이 민족앞에 '봐라,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복된 나라가 된다' 라고 십자가없이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일이다 이겁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것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여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뒤를 쫓는 섬김과 사랑으로 여러분의 인격과 존재와 인생이 거룩하고 진실하고 희생적이고 성실하다면 그건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말하자면 훌륭하고 성공한 것이 십자가를 대신해서 기독교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러면 큰 일나는 것입니다.


굉장히 애매한 구별일 수 있죠?
여러분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내가 가진 신앙의 복된 내용들을 나누고 싶어서 가지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여러분들이 다른 영혼들 앞에 여러분이 믿는 신앙을 증거하고 싶고,

저들의 영혼에 어쨌든 영향을 주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얘기하는 이 사도 바울의 십자가로만 인하여 이 두나라가 분리된다,,,
말하자면 세상나라에서 하나님나라에 들어오는 것은, 십자가를 통하지않고는 불가능하다 하는 얘기는,
우리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의 근거가 기독교 신앙의 성립이 십자가외에는 아무것도 없다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만일 기독교인 된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실천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이 나의 존재와 인생을 통하여 영향이 일어나기를 바란다면, 여러분은 더많이 십자가게 근거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쉽게 우리는 조금전에 본바와같이 기독교 신앙을 힘에 의존하게 됩니다.
여러분 그 많이 요구를 해 오시거든요, 무슨 요구를 해오시느냐하면,
교회가 훌륭하기를 바라고 목사님이 훌륭하기를 바라십니다.
가끔은 저에게 정치적 발언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정치적 발언을 삼가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저는 정치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건 그렇게 예수를 믿는다는 이름하나로 정치나 역사 이런거를 마음대로 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게다가 그런 말을 함으로써 십자가를 대신하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2장에서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이런 자세를 가진 것에 마음깊이 아로새겨 놓아야할 것입니다.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지 모릅니다. 왜 무시무시하냐하면, 아슬아슬하거든요.
뭐가! 지금 이 사도 바울이 얘기하는 이 경고!
이 조심해야 될 내용이 참으로 무섭고 아슬아슬 합니다.
너무나 그게 미묘한 것이라서 쉽게 넘어갈 수 있거든요.
고린도교회 나가 복음을 전할 때, 고린도 교회를 시작할 때, 그들에게 고린도에 있는 시민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사도바울이 가장 조심한 게 뭐냐하면,
자기 말이, 자기 말이 한 사람의 영혼을 설득할 수 있을까봐 겁냈다 그럽니다.
사람이 사람을 이론과 무슨 현실적인 것으로 설명하여 합의하는 것이 기독교가 될까봐 떨었다 이겁니다.
기독교는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 으로만 근거로 하고 성립하는 종교인데,
내가 설명을 다해서 그것이 이루어 질까봐 겁냈다, 그렇다면 그것은 더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내가 가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기독교를 증거한 것이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그 전도에 간섭하셔서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듯이 너희를 불러야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내가 그 일을 할 때  이일을 결과시키기 위하여 내가 다른 것을 더많이 의존할까봐 내가 떨었다,
너희들이 내 말을 듣고 합의한 정도로 기독교를 이해할까봐 떨었다,,, 이 미묘함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사실 너무나 쉽게 이 미묘한 부분의 진심을 가졌기 때문에 걸려듭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랑하는 어떤 한 영혼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이 구원을 증거하고 성립시키기위하여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이 기적을 허락하시기를 바랍니다.
뭐 못고칠 병이 낳는다든지, 어떤 위급한 현실이 해결되는 일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정당한 신앙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해서 십자가가 아닌것이 그의 영혼을 바꿀 수 있었다라고 믿어시면,
그 다음에 우리에게 말하자면 기적은,
기도는 그것이 십자가를 대신하는 기독교의 근거가 되고 맙니다.
기도나 기적이나 무엇이간에 그것은 십자가위에 서있는 것이지, 십자가를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현실속에서 세상앞에 그것으로 내가 예수 믿는 것이 이해되고 설득력이 있기를 바래서 힘을 가지고 싶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영혼을 조작하고 싶다고요!
기독교 신자가 늘고, 우리가 국가를 위하여 기도하여 남북통일이 되고 이게 제일 무섭습니다, 저로서는.

그 돼야죠. 기도해야죠.
기도했더니 되더라는 참 무섭습니다. 이해하시겠죠?
십자가위에 서있지 않고 기도만 하면 된다면,
기도가 십자가에서 분리되면, 그것은 금방 주문이 되고 우리에게는 무시무시한 무력이 될 것입니다 ! 무력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이상 우리의 신앙이 십자가를 통해서만 이 세상 나라와 하나님 나라를 분리하는,,,

그러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로 그의 백성들을 부름은,
그  문을, 그 진리를, 그 생명을 대체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얘기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입니다.
그러니까 저들은 이것을 보이는 힘으로 가질려고 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본바와같이 외식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외식을 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앞에 영광을 받아내고 그 상을 받는 것은,

그것이 명분이 되어 세상속에서 힘을 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는 힘은 그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4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바로 이 문제로 사탄앞에 이런 시험과 그 시험에 답을 하십니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오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며 그를 섬기는 그로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백성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이 세상 나라를 힘으로 뺏으러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나라에 속한 모든 자연인들이 하나님 나라에 부름을 받는 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뿐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우리를 또 하나님의 나라를 성립시킵니다.
이 문제는 믿음의 싸움이지, 권력의 싸움은 아닙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가지고 싶었던 의는 뭐라고요?
사람들에게 항복 받아내는 의입니다. 그리하여 권력이 되는 의입니다.
그건 뭐 우리도 그러고 싶습니다.
한 영혼을 너무 쉽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 싶은 소원 때문에,  이는 십자가가 아니라, 보이는 힘을 갖고 싶습니다.
보라! 예수를 믿었더니 어떻게 되나 보라! 이건 맞는 말입니다만,
그것이 십자가 없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되고 맙니다.


우리는 힘! 힘! 누구를 굴복시키고 강제하는 통제력으로써의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하면 여기에 나타나는 바와같은 사탄아 물러가라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십니다! 세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끝임없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여, 이 세상속에 있으되, 하나님의 통치를 순종하는 자로 현실을 극복해 나가야합니다.
이것이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의 은밀히 갚으시는 상 입니다!
권력화 되지 않습니다. 명분화 되지를 않습니다. 어려운 문제이죠.
여러분 생각에 이 문제가 그래서 보이는 권력이 되어 큰소리치고 예수믿게하는 그런 동기부여와,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인정하고 그 백성으로 살아야한다는 동기부여 중에 어느것이 더 귀해 보입니까?
권력이 되는 것이 동기부여로서는 매력이 있습니다. 쉽죠. 쉽죠!


그러나 아까 갈라디아스 6장 12절에서 저희가 할례받게 강요하는 이유는 '십자가로 말미암는 박해를 면하려 함이라' 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사는 것의 어려움은 그것이 지금 명분이 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는 율리 도덕은 명분이 되는데, 기독교 신앙은 명분이 되지않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우리를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냥 많이 봐줘도 그냥 웃죠. 그냥 무해하니까.
크게 해가되지 않는건 인정하지만 그러나 많이들 놀리고 우리를 이해하지못합니다.

 

우린 믿음으로 살아야합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건 우리에게 그런 의미에서 은밀히 보시고 은밀히 갚으시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고,

그의 통치가 이 세상속에서 이런 보이지않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우리에게 사실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자기의 백성 삼으실 때,
다른 조건들 즉, 능력, 다른 요소들로 조건들로 조건을 삼지않고,

다만 믿음으로 조건을 삼았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사랑은 대등한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대등하고 존귀한 대접을 받는 것이 사랑의 조건입니다.
그리고 사랑할 뿐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방을 당신의 집념 집착으로만 이 사랑을 성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당신을 이해관계나 기계적 관계나 힘의 논리로 굴복하는 것 말고,
대등한 관계에서 신뢰로 관계를 맺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뭐가 아쉬워서 믿음을 요구하겠습니까?
믿음이란 보이지않는 인격적인 차원에서의 관계 아닙니까?
보이는 것으로 말미암는 관계보다,

비교할 수없이 큰 조건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신앙이 얘기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의 나라는 십자가 위에 서있고 사랑 때문에 시작했고,
그러고 우리 모든 하나님이 불러 그의 통치에 참여시킨 자신의 자녀들에게 믿음을 요구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믿어달라는 것은 의심이 가고 만족스럽지 않지만 한번 한번 믿어보라는, 한번 뭘 걸어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나는 너희에게 믿음의 대상이 되겠다,

나는 너희에게 나에게 신뢰를 요구한다, 라고 요구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믿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의는 사실 이 세상속에서 세상사람들이 납득하지 못하고,
그 이해관계나 기계적 관계, 또는 정치적 또는 물리적 힘의 원리속에서 독특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없는 법칙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사실 현실속에서 원치않는 굴복을 해야되고,
원치않는 타협을 해야될 때, 얼마나 우리 마음에 우리 인격 깊은 곳에 자존심의 상처를 받습니까?
우리가 인생이 이게 뭔가! 산다는 게 뭔가! 인간이 뭔가!  이런 생각을 살면서 제일 많이 하지않습니까?
그러고 할 수없이 굴복해야될 때가 있죠.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어느 경우에도 이게 뭔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도록 부르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였고 나는 너희들을 내 아들을 주어 내 백성을 삼는다,
내 자녀를 삼는다,
나는 너희에게 아낄 것이 없다,
나는 너희에게 믿음을 요구한다,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
여기에 무얼 덧붙일 것이 있습니까.
여기에 뭐가 부족할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이것에 부족을 느낀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과 너무나 동떨어진 조급함이나 피상성이나 그리고 핑계와 나태함으로 도망가는 것일 겁니다.
참으로 인간답고 참으로 벅찬 인생을 사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을 떠나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앞에 보이기 위하여 너희 의를 행하지 마라,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이 갚으시는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
오늘의 말씀이며 신자된 특권인지를 아시는 오늘의 증거가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 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음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힘으로 누르지 않으시며 윽박지르지 않으시며 우리를 소모하시거나 우리를 수단으로 쓰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를 대접하십니다. 그 대접의 가장 큰 대접은 하나님이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성경의 이름과 같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약속합니다.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시옵고 우리의 인생을 열랍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http://lamp.kr/lamp-sermon/?p=4577

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중일예배 설교 녹취록 이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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