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는 지금 산상설교를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마태복음 5장 43절이하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지경까지 요구하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의를 예수님의 입으로 전해듣고 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예수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고, 그래서 그 결론 부분인 48절에서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명령앞에 서있습니다. 우리는 기꺼이 이 명령을 받으며 그 명령에 귀함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소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신앙생활을 해보면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믿음들은 현실속에서 맥을 못추는 경우가 대부분 입니다.
우리 하나님앞에 기도도 하고 노력도 하고 여러가지 애를 써보지만 참으로 우리의 믿음은 연약하고 우리의 의지는 무력합니다.
하나님은 뭐하고 계실까?
하나님은 내 소원과 발버둥에 왜 대답하지 않으실까?
우리에게 허락된 신앙적인 요구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성취되는 것일까 하는데 대해서
현실적인 답을 오늘 이 로마서 5장 1절에서 4절에 있는 말씀을 통하여 확인하려고 합니다.
1절과 2절에서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약속과 승리속에 서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 약속과 승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까지 실패될 수 없고 포기될 수 없는,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허락한 신자들의 운명이라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래놓고 3절에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이 환란은 말하자면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에서 그 구원에 영광된 승리 사이의 현재일 것입니다.
그 허락된 구원이 약속의 영광의 승리를 위하여 가는 과정으로써 성경은 환란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환란이란 말 그대로 우리 곤고한 현실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인내로 이끈다고 합니다.
인내라는 말을 지금 이 성경이 하고싶은 말로 제대로 이해하면 환란이 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인내는 고통과 슬픔을 경험한다는 뜻입니다. 겪는다는 뜻이죠.
고난을 겪는 것이 인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의 인내는 넉넉함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감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치 않지만 감내해야 하는 것, 당하는 것이죠. 그것이 우리를 연단으로 이끕니다.
연단은 아시는대로 심신을 단련하여 굳세게하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을 단련할까요? 단련한다고 할때 우리는 노력하고 연습하고 하는 것도 그 단련이라는 말속에 또는 연단이라는 말속에 들어있지만, 더 중요하게 금을 제련해내는, 불순물을 제거하는 일이나 또 쇠붙이나 금속을 강하게 만드는 일같은 것을 우리는 이 말씀속에서 이해할 수있습니다.
그것이 환란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현실이란 말이죠
우리 신자들의 신앙현실이 뭐냐 그러면 환란속에 있다는 것이죠.
우리의 소원과 우리의 믿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보이지 않은, 우리의 소원과 믿음의 보상과 거리가 먼 실패와 좌절, 고통, 고민, 갈등, 슬픔들이 현실이요, 신자가 걸어가는 환란이라고 성경은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은 왜 그러냐, 진짜냐를 떠나서 실제로 신자들의 모두의 공통된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비명이 아니라, 욥기에 나타나는 욥의 반응에서도 아주 중요하게 나타납니다.
욥은 성실한 사람이며 정직한 신앙인 입니다. 그러나 그는 원치않는 고난에 휩싸이게 됩니다.
고통속에 있고, 자녀를 다 잃고, 부인은 떠나고, 그자신은 몸에 병까지 들어 최악의 국면까지 인도됩니다.
그가 하나님앞에 울부짖는 그 비명은 우리의 현실속에서의 우리의 비명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십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한 창조물들을 제대로 돌보시는 분입니까?
이 욥의 울부짖음이고 비명이고 질문입니다. 우리 모두 그렇지 않습니까?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마음에 하나님의 약속들과 명령들이 아무리 고귀하고 진실되다고 인정하고 소원한다할 지라도 우리의 현실을 해결할 방법이 없게 됩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아주 좋은 예가 있습니다.
요셉의 생애죠. 창세기 39장에 가 보십시다.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아! 대단하죠. 요셉의 종 생활입니다.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고 형통케하심을 그 주인이 알아봅니다. 그 주인집을 복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많은 질문거리를 사실 던집니다.
요셉은 팔려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특별이 사랑을 받은 아들이고, 그래서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아버지의 사랑이 너무 극진해서 형들의 미움을 받아 죽게 됩니다. 형들이 그를 죽이기로 하죠. 맏형인 르우벤이 그 아우들을 말려서 간신히 살아납니다. 죽이는 대신 그 먼나라를 왕래하며 상업을 하는 대상에게 그를 팝니다. 요셉은 목숨은 건지지만 팔려서 이 에굽땅에 와 종이 됩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현실보다 더 근본적으로 인생이라는 그 현실속에서 기가 막히다, 기가 막히다 그래도 요셉만큼 기가 막히기도 어렵습니다. 형들이 죽일려고 했는데 간신히 살아나서 종이 됐다, 목숨을 구했으니 기뻐해야될 지, 생전 처음보는 땅에 처음보는 사람들에게 와서 종 노릇을 해야 되니 얼마나 자기 신세가 정말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를 생각합니다.
이 때 요셉이 십대입니다. 십대에 잡혀온 것으로 보입니다. 정신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요셉과 함께 하셔서 그를 형통케 하십니다.
그러면 여러분 금방 이 질문이 나오죠.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다가 형들이 죽일려고 그럴 때, 팔아 먹을 땐 왜 가만히 계시다가, 종된 다음에 오셔서 복은 주고 그러십니까,
안그렇습니까? 이건 우리 마땅히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요셉의 생애의 중요성은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우리 모두의 사실 현실적인 문제들도 따지고보면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때에 찾아오시지 않는다는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때에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가 원하는 목표를 이루어주시지 않습니다.
그 다른 것을 도우십니다. 고통을 견디게 하시거나, 무슨 억울함을 참게 하는데 오시고,
억울함이나 고통을 해결시켜주는 문제에는 하나님이 여간해서 개입하시지않습니다.
어떻습니까? 제 경우는 그랬습니다. 이 문제는 뒤에 19절 보시면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그는 유혹을 받습니다. 주인 마나님께서 그를 유혹하고 요셉은 거절을 합니다.
9절을 보시면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그는 아직도 아주 깊은 신앙인입니다. 그러나 이 신앙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 문제에 진실을 가려주시지 않습니다.
그는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힙니다. 옥에 갇혔더니 간수장을 통하여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실려면 그전에 베푸셔야죠. 우리 모두의 현실속에서 우리의 답답함입니다.
억울한 거를 진실을 밝혀서 요셉을 살려주셔야죠. 그 때는 침묵하시다가 옥에 가니까 그 때야 간수장을 통하여 그를 형통하게 하셔서 그의 죄수생활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이 문제를 시편 105편에 가면 우리가 여러번 찾아봤던 사실입니다만 시편에서는 이렇게 요셉의 그때 상황을 설명합니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그는 이제 처음 죄수로 들어갔을 때, 그 죄수들이 받는 고통의 형편에 처하게 됩니다. 족쇠를 채우고 쇠사슬로 묶어놨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에 보시면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몸에 2번이라고 번호가 붙어 있습니다. 맨밑에 훈노트를 보시면 2번에 히,혼 이죠.
히브리말로 혼이 쇠사슬에 매였단 뜻입니다. 직역하면 그 혼을 쇠사슬이 꿰뚫었다 라고 제가 여러번 말씀드렸습니다.
혼을 쇠사슬이 꿰뚫었다는 건 우리가 얘기하는 우리말 표현으로 혼비백산했다는 뜻입니다. 넋이 나갔습니다.
그는 아직도 신앙을 지키고 있지만 그는 그 신앙에 대하여 보상을 받지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생깁니까? 라고 하소연도 했을 것이고, 말하자면 인생이 뭔가, 믿음이 뭔가하는 질문앞에 붙잡혔을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의 이 환란을 당하면, 말하자면 인생이 잘 풀리지 않고 곤고하면, 근본적인 질문밖에 할 수가 없습니다.
가장 중요하게 이거죠. 이렇게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계속 살것이냐? 인생과 인간은 뭐냐? 라는 질문을 합니다.
그렇지않습니까? 또 신앙과 이상에 대해서도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무슨 이유 때문에 살아야하는가? 무슨 목적이 있는가?
아니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과 영생의 약속이 대체 어떤 가치가 있는가? 라고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벌거벗겨져 그 진실한 현실의 그 수준으로써 직면을 하고 대면을 하게 됩니다. 나라는 사람의 실력, 나라는 사람의 내용을 직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다고해서 답이 쉽게 오지않습니다.
아무리 인생이 뭐냐, 신앙이 뭐냐, 내 삶의 가치가 있느냐 라고 물어도 두드려도 하나님은 또 쉽게 답도 주지않습니다.
우리는 도망가고 싶습니다. 도망가는 방법은 많습니다. 제일 도망 많이 가는 건 술 먹는 겁니다.
심하면 자살을 하죠. 자폭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현실을 감내할 수가 없고, 자기라는 존재와 인생이 역전될 가능성도 없고, 이대로 평생을 고난속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은 참으로 끔직합니다. 몸부림을 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하나 더 확인해야 될 실제적인 질문은 이겁니다. 현실이 곤고하다 라는 것과 함께 우리가 실력이 없고 우리는 참으로 작고 보잘것 없다, 무력하다는 사실과 함께 도망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죠. 현실의 무서움 중의 하나입니다.
왜 못 도망가죠?
우리는 관계에 묶여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관계는 혈연입니다. 부모, 부부, 자식, 친구, 이웃, 사회에 묶여있습니다.
내가 나하자 좋자고 도망을 갈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도망가면 아내나 남편이, 자식이나 부모나, 이웃과 친구가 걸립니다.
우리가 죽고 싶어도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한 책임져야 할 존재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도망을 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행복은, 또는 우리의 평안은 내가 내문제만 해결하는데만 있지 않고 내가 관계된 모든 사람의 인생의 현실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혈연 중에 누가 하나 아프면 재난이 옵니다. 누가 하나 문제가 생기면 모두에게 재앙이 옵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이의령 선생님께서 요근래 몇년 사이에 회심하시고 기독교 신자가 되어 한번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인간과 인생이 얼마나 무력하냐,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행복을 다 책임질 수 없느냐하는 얘기를 이런 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정확한 문장은 제가 외어낼 수가 없지만, 내용상 이겁니다.
말하자면, 재앙이란 재난이란 이 표현을 쓰시지는 않으셨습니다만 '느닷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한밤중에 걸려온 전화 한통으로 그만 모든 평화가 깨어지고 행복이 조각이 난다' 이거죠. 딸댁에서 전화가 온겁니다. "손자가 아픕니다" 이 한마디에 여태껏 가장 튼튼하고 영원히 갈 것같던 행복이 무너지는 겁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실이라는 것은 이렇게 여러사람하고 관계성 속에 묶여 그것이 족쇠같이 나를 현실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 현실을 해결해 주거나 아니면 도망가게 해 주십시요, 그것이 아마 우리들의 소원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않습니다. 지금 보는대로 요셉을 판 것은 그의 형들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옛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웬수는 집 안에 있다.
우리의 인생속에서 자기를 위하여 고민하고, 자기 자식을 위하여 걱정하는 것은 근심걱정 중에 아마 가장 작은 것일 겁니다. 자신의 문제로 걱정하는 것은, 훨씬 우리가 관계성속에 있는 사람들에 관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내 문제는 내가 감수하고 가면 되는데, 내 아이들에게 일어나고, 내 아내나 남편에게 일어나고, 내가 사랑하고 책임져야할 누구에게 일어난 일이, 우리를 더욱 슬프고 곤란하게 합니다.
왜? 우리는 너무나 무력합니다. 너무나 무력합니다.
아프거나 사고를 당했거나 책임질 일이 생겼을 때, 우리가 할 수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은 성질내는 일밖에 없습니다.
거봐 내가 그러지 말랬지? 이것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 현실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요셉의 경우같이 우리에게 묶어준 사람들입니다.
오죽하면 이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 사람말고 누구랑 결혼했어도 이것보다는 낫을걸,,, 이 생각은 누구나 하는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그 사람이 네 웬수가 아니다 이거죠.
형들은 요셉을 팔았습니다. 저들은 선한 이유로 그러지않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얘기하죠. 창세기 45장으로 오시면
7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나중에 깨닫습니다.
우리가 고통스럽고 책임을 져야하고 도망갈 수없게 나를 붙들고 있다고 생각하는 현실, 삶의 실제, 환란을 이루는 모든 구성 요소들, 시대, 국가, 사회, 혈연, 나의 무슨 신분, 하다못해 무슨 유전자 까지 모두 합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시는 손길입니다. 이 요셉이 그것을 깨닫죠. 당신들이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냈습니다. 50장에 가면 이렇게 한번 더 나옵니다.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 이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현실을 고통에서 형통으로 바꾸어 주실거라고 기대합니다. 믿음의 보상이 그것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보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아까 로마서 5장에서 본바와같은 신적 목표에 있습니다. 그것을 이루는 과정은 우리가 보는바와같이 환란입니다. 하나님은 이걸 견디게 하십니다.
다시 시편 105편으로 돌아오셔서 아까 봤던 말씀을 좀 더 확인해 봅시다.
17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1)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히, 혼
19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환란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심신을 단련하여 훈련하여 굳세게 하는 그 과정이,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서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그의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개입하신 것이라, 준비하신 것이라 라고 얘기합니다.
그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우리는 이 환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이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현실은 우리를 괴롭히는 부정적이고 배척해야 될 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내는 신적 지위와 능력의 장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우리를 옥죄는 것같고, 우리를 붙잡고 날개를 펴지 못하게하는 것같은 모든 장애물들과, 이런 족쇠같고 물귀신같은 이런 일들에 대하여 아주 적극적인 신앙의 눈을 가져야합니다.
우린 따지고보면 훨훨 날고 싶은 소원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묶여서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님이 병석에 누워서 동생들을 위하여 대학을 포기한 사람,
무슨 부모가 또 안계시고 애들은 키워야겠고해서 예전에 무슨 공장에 직공으로 가서 모든 자신의 꿈을 접고 동생들을 위하여 희생한 사람, 이런 것들은 성경에서는 대단히 긍정적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무엇을 접고 무엇을 포기하는 것은 세상적인 가치에 있어서의 포기이지,
하나님이 한 영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있어서는 희생과 포기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내는 일을 보시며는, 요셉은 나중에 이런자가 됩니다, 시편 105편
20 왕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석방함이여 뭇 백성의 통치자가 그를 자유롭게 하였도다
21 그를 그의 집의 주관자로 삼아 그의 모든 소유를 관리하게 하고
22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그는 총리 자격이 생깁니다. 실력이 생깁니다.
총리가는 권좌에 권력을 얻고 지위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만한 실력을 쌓은 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그의 생애를 통하여 그를 총리자격이 있게 합니다.
여기 나타난대로 그 집의 주관자로 삼아 소유를 관리하며, 오늘날로 하면, 재정경재부 장관의 실력과,
그의 뜻대로 모든 신하를 다스리며, 총리죠, 정말, 그의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합니다.
아! 그가 말하자면 인생을 알며, 인간을 알며, 세상사는 도리와 그 분별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요셉이 보이는 보상을 받은 것에 너무 집착하시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요셉을 어떻게 그 영광된 결과에 이르게 했는가가 요셉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성경의 지적입니다.
그러니까 그의 형들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그에게 손해가 되지않았다는 결과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사실 현실적 신앙이해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여러분 자신의 실력 없음과 도움을 여러분이 소원하는 말하자면,
집안의 부부사이, 혹은 부모와 자식, 혹은 믿음의 식구들에게 도움을 받기보다 그들이 웬수일 수 있습니다. 그렇죠?
우리는 이 고백을 해야됩니다.
'여보 미안해 내가 실력이 없어서 당신을 희생만 시켰어, 능력없는 남편을 용서해줘'
이렇게 얘기해야될 겁니다.
그러면 아내도 꼭 이렇게 대답하셔야 됩니다.
'아냐 여보 당신을 만나서 나는 훌륭해졌어' 이말을 하셔야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속이 이렇게 깊어졌겠어, 여보?'
이것이 모든 사람이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겁니다.
이 사람만 없었으면, 이 상관, 혹은 이 경쟁자, 이 웬수만 없었더라도, 그때 그 사건만 없었더라도,,,
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신자들에게 없습니다.
그 억울했던 사건, 그래서 날개를 접은 그 사건, 그 일, 그 누구,,,
그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능력과 지혜속에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지, 우리를 손해케 할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은 여러분 자신의 부족함까지도 여러분의 인생에 중요한 요소입니다. 과정입니다.
요셉은 신앙이 좋았지만 그 보상을 받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나쁘지만 보상받을 것입니다.^^
우리의 못난 것이 우리를 더욱 더 깊은 진실된 진실된 하나님외에는 답을 줄 수 없는 그 진정한 답을 찾을 때까지 우리를 괴롭히고 자책하게 만들 것입니다. 그것만큼 큰 일을 하는 것도 없습니다.
생각하고 살게 되는 것, 고민하고 살게 되는 것, 신앙의 중요한 과정입니다.
믿음을 갖고 요셉을 승리케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랑의 증거안에서 우리의 생애를 지키신다, 확신하시는 오늘의 말씀, 여러분 신자된 인생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고 믿음을 갖고 사는 우리 신자들의 현실적 고민, 불만, 자책, 이 모든것이 손해보는 과정이 아닌 것을 이제 고백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자책하고 탓하는 것 마땅히 있어야하고, 우리의 부족함을 인정해야하고 고백해야하고 도우심을 구해야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하고, 결국 승리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인내해야합니다.
이 믿음 가지고 우리의 삶을 하나님앞에 바치게 하옵소서, 순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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