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 (15)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7. 21. 21:31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오늘 본문의 금식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기독교 신앙의 참다운 본질을 설명하기 위하여 지금 비유로 드시는 대목입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 슬픔과 회개의 마음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슬픔과 회개의 마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지 못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하나님과의 회복신앙에 온전한 순종을 약속하는 그런 나아감입니다.
이런 금식이 잘못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 사실 놀랍고, 또 예수님의 지적으로 확인하는 것같이 그 잘못을 제대로 이해하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더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선 구약성경 이사야 58장을 찾아가 보겠습니다.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여기 지금 2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종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서 말하라는 내용이고, 3절의 우리는 그 얘기를 들어야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너희 역군을 압제하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금식에 관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꾸중은 잘 보시면 핵심이 이겁니다.
'너희가 와서 내앞에 회개하며 내 뜻을 쫓겠다고 그렇게 나와놓고 내 뜻을 또는 내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하고 싶은대로 하지않냐? 이겁니다'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이 금식이라는 종교행위는 행했지만, 진정한 뜻은 제대로 소통하지 못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일에 대해서는 실패한 이 문제를 지적하는 3절 끝에 있는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라는 뜻은,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자기가 결정한 일을 시키지, 하나님의 결정과 하나님의 뜻을 묻고 순종하지는 않지 않느냐! 
금식이 뭐냐! 금식이 결국 너의 결정과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기위한 종교적 겉치레에 불과하다면,
그게 어찌 금식이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이 되겠느냐!
이게 오늘 우리의 본문이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금식!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이 갚으시는 금식과의 대조이죠.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뭐냐 그러면 소위 오늘날 현대사회에서도 자주 언급되고 기독교와 상관없이 일종의 종교성으로 가치를 가지는 영성입니다.
현대사회에서의 영성은 세속적인 영성입니다.
세속적이라는 말을 쓰면 우리는 늘 윤리도덕적인 차원에서 가장 먼저 생각하는데,
세속적이라는 것은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상관없는 근거 내용을 말합니다.

 

세속적 영성이란 20세기에 굉장히 활발하게 펼쳐졌던 운동중에 하나인데, 이 영성이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신적 내용과 신성의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운동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속에 긍정적인 것, 쓸 만한 것이 있는가를 찾고 또 만들고 또 그렇게 자신들을 붙잡는 내용이고, 자기확인이고, 하는 것으로 영성이라는 말이 아직까지 유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속적 영성과 기독교의 영성은, 기독교에서 영성이라는 말을 주로 써 왔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영성이라고하면 기독교 신앙을 떠 올립니다. 세상이 말하는 영성은 기독교와 상관없는 것은 기독교의 영성은 자기성찰, 자기성결이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장으로 가 보겠습니다.

 

18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인간 개인의 내면을 성찰하여 쓸 만한 것을 건져내는 작업이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을 기독교 영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기도교의 영성은 그 시작부터 '예수를 믿어라' 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 예수를 출입문으로 삼지않고 하나님을 만날 방법이 없습니다.
자기성찰이라는 게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신자된 정체성과 책임을 성찰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좋은 것이며, 기독교 영성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없는 자기성찰,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가 없는 인간과 인생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우리는 영성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금식이라는 것이 이런 순전히 자기순화, 결벽성으로 자신이 확인되고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는 가장 경계해야 될 것이 되는 셈입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 이하에 기독교 영성의 유일한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그러니까 기독교 영성은 자기를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냐 입니다!
여기서 누구냐 라는 것은 '예수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요,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관한 유일한 구체화요,
또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대하시며 목적하시는가에 관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설명이고 증거고 약속입니다!
기독교의 영성은 예수에게로 가지, 자기에게로 가지 않습니다.
예수가 누구고, 예수 안에서 우리가 누구로 부름을 받고, 어떤 목적으로 부름을 받는냐를 아는 것으로 자기성찰을 비로소 할 수 있지, 자기성찰을 근거로 해서 아까도 얘기한대로 가치와 목적을 만들어 내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점은 예수 안에 하나님의 모든 충만이 있고, 예수로 하나님이 만물과 화해하시겠다는 19절과 20절이 갖는 표현의 의미가 얼마나 얼마나 기독교에만 있는 것인지 알아야됩니다.
모든 가치는, 모든 회복은 예수를 모르고서는 온 우주와 과학, 문화, 정치 무엇도 예수 없이는  진정한 가치와 진정한 기능을 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기독교화해야 된다 라고 성경이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건 다른 문제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비로소 다른 눈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 안에서 다른 눈을 가지게 됩니다.
모든 세계를 보는 눈이 다르고 세상속에서 우리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꼭 권력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저 범상한 한 시민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만이 세상을, 역사를 우리 보통 얘기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을 우리만이 제대로 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주무르는 위치에 있지 않더라도 신자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을 하나님의 통치아래에서는 그것이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는가를 보이기를 원하시고 우리에게 그 책임을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스리는 위치에 있지않고 섬기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잊지않아야 되고 섬기는 위치에서 하나님은 충분히 당신의 영광을, 세상에 은혜를 베푸신다는 걸 알아야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입니다.
그는 평범한 한 인간으로 태어나시고 목수의 아들이시고 33년을 살다 십자가에 죽으시는 그런 인생을 삽니다.
아무런 권력을 가진 게 없지만, 그가 인류의 역사를, 운명을 바꾸 는 것입니다.
이 일은 21절 이하에 이렇게 연결됩니다.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그러니까 우리가 뭘 지켜야하는지 압니다. 우린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두려움, 공포, 심판이라는 것 이전에 관계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근거이시고 목적이시고 우리의 기쁨이고 소망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떠나서 우리의 정체성이나 우리의 존재나 우리의 가치나 의미나 책임을 책정할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복음이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셨다!
이게 복음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 되심과 우리의 아버지 되심은 예수를 보낸 사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너무나 충만하게 우리 모든 기독교 신앙인들을 항복시키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범죄하여 절망과 사망과 부패와 오염속에 스스로를 팽개친, 이 인류를 찾아오기 위하여 하나님이 당신을 낮추시고, 이 모든 오염과 부패와 사망을 친히 건너 찾아오신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이요, 수난이요 부활입니다.
그것이 우리 모든 기독교인의 영성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주 기독교 신앙의 표현을 감각적으로 많이 사용합니다.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표현은 기쁨, 평안, 확신 이런 단어들이죠.
그러나 이것은 본질이 내용을 설명하는 단어들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 본질의 그때의 감각일 뿐입니다.
그 본질적인 내용의 상태가 활발하고 만족스럽다는 표현은 될 수 있어도, 그냥 기쁨이니 진심이니 평안이니 하는 말들은 대단히 그 무엇을 담아내기에는, 진정한 내용과 방향을 담아내는 단어가 아닌 것은 이것과 같습니다,
이 차 성능좋다 는 말이 내가 옳바른데를 가고 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여러분이 타고 가는 자동차가 만족스럽고 보기좋고 안락하고 첨단의 정비를 갖추고 있고 뭐 조종이 쉬운것과 어디를 가고 있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이듯이, 우리가 기독교 영성을 얘기할 때, 이런 감각적인 표현들로 본질을 대체해서는 안됩니다.

 

세속성 영성은 뭘 만들었냐하면, 감각을 내용으로 대체했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의 기독교 신앙의 추구에 있어서도 사실은 기독교 영성이 예수로 말미암는 하나님이라는 근본적인 내용과 본질적인 존재들을 뒤로한 채, 감각적인 일에 너무 많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는 그런 시조속에, 그런 시대적 풍조속에 우리가 있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합니다.
이 일은 에베소서 1장에 가시면,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과의 관계, 그 예수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이 누구시며, 우리의 운명이 무엇이냐하는 문제는 에베소서 1장에서는 이런 식으로 표현됩니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세가지를 구합니다. 에베소 교회 교인들에게, 저도 오늘 이 말씀을 근거로 해서 여러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누구신지 성경적으로 바로 아시기를 권합니다. 
둘째는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목적과 기쁘신 뜻을 갖고 있는지, 그 영광된 목표를 알기를 원합니다.
19절에 세번째가 나오는데, 그렇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지금 어떤 능력으로 간섭하고 계시는지, 우리의 현실이 이런 하나님의 약속후에 현실속에서 어떻게 하나보자고 내던져진 무대가 아니라, 현실에 하나님이 개입하시고 간섭하시고 주도하시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기를 원한다고 이렇게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합니다.  


오늘은 우리 필요상 마지막 이 문제에 좀 주의를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영성이란 결국 단순히 지성적인 것이 아닙니다. 지적 사색이 아닙니다.

영성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리시고 예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성실하심으로 우리를 그 목적에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입니다. 기독교 영성은 현실을 담아내는 것이지, 현실로부터 도망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 얘기한 어떤 지적 사색이 되던가, 도덕성이 되던가, 종교성이 되어 다만 다만 그런 사변과 성찰이라는 정적이고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상상의 세계로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담아내는 실력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하여 지금 현실속에서 일하고 있기 때문에 현실을 외면하면 하나님의 간섭하시는 손길로부터 도망가는 꼴이 됩니다.

우리는 물론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외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수긍하고 고백하고 그리고 기대하는 바와 현실이 너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고 그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을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현실은 고통스럽습니다.
우리의 고민은 그기에 있죠.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을 가진 이고 그 아들을 보내신 사랑을 갖고 있는데 왜 현실이 이러냐,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는 깊은 갈등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은 당신을 우리에게 알리시기 위하여 친히 인간의 몸을 입고 인생을 사셨듯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우리에게 보여줬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대등한 인격적 대상으로 대접하여 우리를 설득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의 가장 중요한 조건은 대등한 대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조종하거나 강압할 마음이 없어십니다.
그건 사랑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여러분 마음에는 나는 조종당해도 좋아, 물론 있으실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큰 신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신 그 사랑과 그 능력으로, 우리의 인생을 예수를 매일 보내시는 마음으로, 우리와 씨름하십니다.
그걸 성경에서는 뭐라고 써느냐하면 20절 이하에,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예수를 보내시고 그로 우리의 인생을 걷게 하시고 우리를 끌어 안게 하시고 그에게 만물의 권세를 주십니다.         
그리고 그 예수와 우리를 묶으십니다.
이게 교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부름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은, 하나님과 화목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머리와 몸으로 유기적으로 긴밀하게 생명를 걸어놓고 묶여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우리가 되시고 우리 인생을 사시고 죽음까지 통과하신 것처럼 우리의 존재와 우리의 현실과 우리의 모든 경우에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성육신과 수난은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계속 되고 있는 셈입니다.
우리의 모든 비겁함과 연약함과 배신과 미련함과 게으름에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묶어놓아, 우리의 가장 부끄럽고, 우리의 가장 연약한 순간도 하나님이 나를 붙잡은 손에서 빠져나가는 경우나 장소나 시간은 없다고 선언하시고 그렇게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겁니다.
예베소서 4장 13절 이하로 가시면,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 안에서 자라자또는 참된 생활을 하여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가장 중요한 강조는 그리스도의 충만한  자리까지 자라라 하는 것입니다.  그에게까지 자라라,,,
기독교 신앙인들이 가져야하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본질이요 목표는 이겁니다.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리스도를 닮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얘기로 떼우시면 안됩니다.

아까도 얘기했지만, 난 평안해, 난 기뻐, 이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되는데, 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라가게 하기위하여 우리의 어리섞음과 우리의 어린 것과 유치한 것,  ?세소부터 우리가 완성이 되는 그날까지, 완성된 이후에도 우리와 하나로 당신을 묶어놓고 계십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데 있어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삶의 목표와 내용을 삼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포용, 끌어안음을 놓치시면 안됩니다.
용서와 기다림이라는 것 말입니다.

이것이 16절에 이렇게 강조되고 있는 것 다시 보십시요.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말합니다.
우린 같이 자라납니다. 우린 다 유치한 자리로부터 어리섞은 어린 자리로부터 완성의 자리에 갈 것입니다.
그 각각의 형편에 우리 예수님께서 당신을 묶어놓고 계십니다.
교회 공동체에 참석한다는 것은 왜 중요하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기다려 주심과 약속이 우리 안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개인으로써만이 아니라 같은 믿음의 전우들 동지들 속에서 봐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린 다양하게 각각의 독특한 과정으로 인도함을 받을 것입니다마는 다 공통된 목적지와 공통된 내용으로 인도받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우린 이런 것에서 벗어납니다.
나 같아라는 얘기에서 벗어납니다.
나 같아라라고 얘기할 때 우리는 무언가 훨씬 관념론적인 명분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왜 그따위밖에 못해, 이게 나 같아라의 근거이죠.
좀 더 정직해라, 좀 더 성실해라, 좀 더 능력있어라, 이런 것들은 다 예수라는 본질, 신약성경에 가장 중요한 신자들 신앙의 내용, 인격적 존재를 가리는 역할밖에 못합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조심해야되는 건, 화 내는 것입니다.
화를 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화 내는 걸 뭐라 그러느냐하면 
화를 내면 그 사람은 자기 역할이 끝납니다. 화 낸걸로 다 한 것이 됩니다. 이건 비겁한 겁니다.
화내고 도망가면 안됩니다. 화를 내지 마시고 내가 볼 때, 나는 통과했는데 그 문제를 통과하지 못한 그 공동체의 지체를 내가 알고있는 결론에 도달케하기 위해서 끌어안으셔야 됩니다.
늦게 오는 자와 보조를 맞추셔야 됩니다. 기다려주셔야 됩니다.
화를 내는 거는 무책임한 것입니다.
똑같이 화를 내는 거와 똑 같은데 전혀 다른 반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실거야' 이거 안됩니다. 이것도 뭔지 알겠죠?
그렇게 얘기해서 끌어 안아야되는 공동체의 책임을 외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유난히 청강생이 많습니다.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일을 현대교회 교인들은 매우 꺼려합니다. 간섭받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그 선포된 것이 각자의 인생에 어떻게 도전이 되고, 반응하는 자의  각각 다른 반응들 속에서 하나님이 기적을 이루시는 경이로운 현실을 가지지 않으면, 증언을 가지지 않으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여러분 교회안에 참여하셔서 공동체의 일원이 되면, 다른 많은 짐을 나누어져야 돼서 사실 귀찮을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모여서도 부족한 것, 마음에 안드는 것은 것을 보실 수도 있고 아주 한심한 것을 보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공동체를 구성하고 책임지는 일을 놓지면 뭐가 되느냐하면,
미국에 자녀를 영어 배우게 하려고 유학보냈더니 학교가서 수업받을 때만 영어듣고 영어 말한마디 안하고 학교 끝나면 교포사회에 돌아와서 영어 한마디도 쓸 필요없는 그 한국교포 사회 속에서 살다가와서 영어를 못하는 유학생이 되고 맙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을 말씀으로 배우고 마음에 감동하는 것으로 여러분 것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걸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도전하는 현실 속에서 반응해 보셔야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실제로 반응을 해보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압니다.
모든 훌륭한 사람들이 얘기했듯이 우리가 누구를 뭐 예술인이든 스포츠인이든 우리가 그 사람을 천재라고 하면 그 천재라고 일컬음을 받는 모든 사람이 불만스러워하는 건 나는 천재가 아니라 나는 남보다 더 연습했다. 그런 말 들으시죠?
여러분 연습하셔야 됩니다. 그리하면 세상에서는 도저히 그 답을 찾을 수 없고 대안을 찾을 수 없는 걸 기독교 신앙 안에서 찾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실력이 되어 여러분의 삶을 담아 낼 수 있게 됩니다.  
불평하고 핑계대고 화내고 거부하고 그리고 할 수없이 주일날 잡혀오고, 이 반복에서 벗어나셔야 됩니다.
믿는 사람 다우셔야 되는데, 믿는 사람 답게 되는 것은,
그것은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명예로운 것입니다.
그것은 속박이 아니며, 그것은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만족과 거룩함과 참다운 인생을 사는, 다른 대안이 없는 명예로운 길입니다.
여러분이 고백하고 부름받은 신자된 자리, 내용, 약속,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인도하심에 순종하시는 오늘의 말씀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되시고 예수안에서 부르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선하심과 우리를 향하신 기쁘심과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감사합니다.
그 충만으로 우리를 채우시고 우리의 삶을 인생을 존재를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고 누리고 채우는 이 복된 신자의 승리,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 안에서 살게된 신자된 인생을 감격하며 순종을 약속하고 돌아가는 심령들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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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예배 설교 

녹취록 이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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