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 (20)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8. 11. 07:14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비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대표되는 하나님의 의와 다른 인간의 의에 결정적 결함을 지적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중요한 세가지 단어가 있는데, 하나는 비판이고 들보, 그리고 외식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비판 정신이 의를 추구하지만, 어떻게 자기에게는 아무 쓸모가 없는가, 남의 눈에 티를 볼 수 있지만, 자기눈에 들보를 깨닫지 못하며, 빼낼 수 없는, 그래서 겉치장 밖에 할 수 없는 의인가를 지적하는데 본문이 쓰이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마태복음 23장으로 가 봅니다.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한다,(,,라고지적하시고)

 

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라고 질책하십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누구를 정죄하거나 누구를 심하게 꾸짖은 적이 없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해서만은 굉장히 목소리를 높이시고 정면으로 반박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오심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하나님의 의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고 꼭 필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대표되는 인간의 자기주장, 자기 자존성이라는 것이 이 은혜와 하나님의 의를 받아들이는 데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표현은 1절에 있는 바와 같이 저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뜻은 모세의 순종은 따라하지 않고 모세의 지위만 누릴려고 합니다.
저들이 말하는 바는 옳지만 저들이 그것을 행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는 간단한 지적이 아니고,

저들이 하는 말을 지킬 능력은 없으면서 그렇게 말함으로써 마치 지키는 자 같이 군다 라는 뜻입니다.
중요하죠.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택하고 있는 마태복음 7장의 1장에서 5장까지 있는 비판하지 말라는 얘기는,

우리가 어떤 옳은 것을 알아서 남을 판단하고 심판하고 정죄한다고해서 그 사람이 그 이해를,

또는 그 지식을 본인의 실력으로 갖고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 얘기 입니다.
이 문제의 어려움은 이런 지적과 이런 이해와 또는 이런 깨우침들이 마치 자신이 그것을 생산해내고 그것을 적용할 수 있는 것으로 스스로를 기만하는데에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비판하는 의가 위험하다라는 지적입니다.


우리는 세계 역사속에서 사실 지난 이천년 동안에 세계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아마 근대일 것입니다.
산업혁명이라는 것과 지성으로의 이상이라는 것이 아직까지도 인류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데,

지성이 발달되고 합리주의와 인본주의가 주장되면서 인류는 그때 아주 큰 꿈을 가졌습니다.
인간이 진보하고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지식이라는 것이, 혹은 지성이라는 것이 또는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성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라는 것을 확인한 것이 지난 몇세기 동안에, 한 이삼백년 동안에 가장 중요한 역사의 교훈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인간적 본성과 묶여있는 것이라서,

즉 인간의 자존성에 관한 그 고집과 묶여있는 것이라서 우리는 지금까지도 이 영향아래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죄의 본성과 엮여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는 것이 힘이고 그리고 우리의 실력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실력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쉽게 남을 판단하고 설명하는 것으로 그 설명과 지식이 사람을 변화시키더냐 라고 물어보셔야 됩니다.
우리 보통 어려운 문제가 생기거나 견해를 달리할 때, 논리성으로 또는 명분으로 상대방을 설득합니다.
이런 유명한 말이 있죠. 이런 토론의 어려움을 '토론은 안하는 게 좋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면 바보가 되고, 이기면 원한만 남는다' 그러죠.
사람은요 맞다 틀리다로 항복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여러분 자녀를 길러봐도 알고, 또 여러분 자라나는 동안에도 경험하셨을 겁니다.
제가 가끔 당구를 치는데, 여러가지 영적(^^) 현실적 필요에 의해서 운동삼아 하는데, 지금 저야 잘 치죠.
그 하수들 같이 쳐보면 결정적인 기본기에 흠이 있습니다. 근데 어느 한분이 샷을 할 때마다 눈을 감아요.
결정적인 흠이죠. 그래서 여러번 충고를 했습니다.'눈을 뜨야 된다' 그 너무나 당연한 거 아녜요?
그가 어느날 대꾸를 했습니다. "목사님, 용서하세요, 저 아버지 말도 안듣고 컸습니다"
아마 본인도 하고 싶었을 겁니다. 웬일인지 하여튼 그것을 못해서 잘 못치죠.

'당신은 왜 샷을 할 때 눈을 감니? 한국 당구협회에 연락을 해서 모든 당구장에 출입을 제한한다'
이런 것은 사실은 현실적으로 쓸데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밖에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논쟁을 합니다.
설득을 하고 설명을 해서 내 말이 맞다는 것으로 상대방을 어쨌든 제압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긴 것 같습니다.
논리성으로 이기고 명분에서 이기면, 내가 이긴 것 같은데, 이 이긴 것 같은 것이 큰 오해를 낳습니다.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 살아보면 중간에 조금 넘어갑니다만,

기독교 신앙에서 용서의 어려움은, 사랑의 어려움은 용서를 하거나 사랑을 하면, 지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싸워봤을 때, 싸움에서 가장 어려운 게 싸움에 끝을 내기가 어려운데, 왜냐하면 마지막 말을 내가 하고 싶거든요. 마지막 말을,
하다못해 '좋아, 내가 오늘은 내가 참는다' 이말 이라도 해야 되거든요. 그냥 질 수는 없쟎아요.


근대성이 우리에게 준겁니다.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야만 되는 것으로 인간교육을 시켰죠. 그래서 그 마지막 말을 해야돼요.
그 마지막 말을 서로 해야 되니까, 끝까지 옆에서 친구들이 붙잡고 갈라놓고 끌려가면서라도 고함을 질러야되는  현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이긴 것으로 생각하고 가졌다고 생각을 합니다. 가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질타하시는 이 내용속에서 우리는 들보를 빼내지는 못하고 있는 겁니다.
티를 가려낼 수는 있는데, 티를 뽑는 것과 들보를 빼는 건, 들보를 빼는 게 쉽죠.

눈속에 기둥이 하나 들어가 있는 건데, 그거야 척 꺼낼 수 있죠. 그러나 그게 안 빠지더라는 사실이죠.

 

그래서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다른 것이냐!
라는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분명한 이해를 이 시점에서 대조를 하여 확인하여야 됩니다.
로마서 7장으로 가시죠.

 

7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8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9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10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1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여러분, 알고 이해한다고 해서 그것이 자기 것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이러면 안되는데 라고 하면서 성질을 부려본 적 있었을 것이고,

제일 많이 우리가 이런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않는 우리의 우리됨을 확인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면 안되는데, 이렇게 시작하는 말을 많이 하시죠.
이 말을 하면 안되는 건 아는데 그 말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이래서는 안되는 줄 알면서 밥상을 엎습니다. 아무 소용이 없죠.
성질이 났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내용이 전달될 게 없는데, 그것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의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게 뭐냐하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런가를 알았을 지언정,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행하도록 율법이 돕지도 못할 뿐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행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같은 로마서 7장 2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적으로 자기 육성을 통하여 말합니다.

 

21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22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는 비명은 왜 나온다고요?
아는 데 할 수가 없다 이 말이죠. 아는데 할 수가 없다 말이죠.
그래서 이제 그 해답이 이렇게 제시됩니다.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예수 안에서 이 문제가 해결되더라)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 25절은 가끔 오해되는데요, 앞에 있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답이 나오고 그 뒤에 나오는 얘기 땜에, 그것이 그 답과 연결되는 것으로 아는데, 그게 아닙니다.
답이 왜 필요한가를 한번더 짚는 겁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는데 그 둘이 갈등을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라, 알고 있고 소원하는데 늘 진다는 말입니다. 그 해결책은 예수 밖에 없더라, 이 얘기 입니다.
어떻게 해결했느냐, 8장 1절은 이렇게 합니다.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게 뭘까요? 굉장히 심오하고 경이로운 구절입니다.
예수 안에서 이제 정죄함이 없답니다.
정죄함이 없다는 것은 이제 더이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법을 근거로 하여 관계하는 분이 아니라,
예수로 관계하는 분이다 그런 뜻입니다.
법으로 관계한다는 것은 잘잘못에 책임을 묻는 관계를 말하고,
법으로 관계하지않고 예수 안에서 관계한다는 것은, 우리를 혈육적인 관계에서 우리를 대하겠다는 뜻입니다.
이해하기좋게 우리 자녀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를 무법하게 무질서하게 키우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명분을, 도리를, 그리고 해야할 책임을 가르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법으로 묶고 그 책임을 100%로 묻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 이상으로 묻죠. 사랑으로 묻죠. 그 여러분의 목숨을 걸고 헌신과 희생으로 그것을 묻습니다.
여기서 묻는다는 것은, 그 책임과 완성을 위하여 여러분이 기꺼이 희생할 것과 노력할 것과 넘어갈 것을 책임위에 더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이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자녀들이 우리에게 큰소리치는 무기가 뭐죠?
법이 아니고 사랑으로 자신들이 대접받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 무기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을 담보로 해서 이 공갈을 치죠.' 나 밥 안먹어'
이 공갈이 통하죠. 지가 안먹는데 왜 부모가 지죠?
부모가 자녀를 자기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맨 마지막 공갈은 이거죠. '나 집나갈꺼야'
나가는 게 무슨 이익이며, 무슨 위협이 되는거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법은, 또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은 , 법으로 우리를 대우하고 책임지우는 하나님이 아니라,
법을 주신 하나님이 그걸로 우릴 정죄하고 심판하시겠다는 분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율법을 주신 때에도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도 나타내신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친히 율법을 이렇게 정의 하십니다.
율법이 뭐냐? 그것은 하나님 사랑이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렇게 슬퍼하십니다.
우리는 법이 잘잘못을 판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것으로 내가 의로운 자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허락하신 의가 하나님의 의로움을 나타낼 때 그것을 당신의 희생과 기다리심과 넘어가심으로 의를 세운 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서 구원자체에 관한 설명에서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3)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또는 그의 피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는 뭐가 다르죠?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입니다. 자기 혼자 의로우신 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율법에서 보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또 로마서 3장에서 보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지는 아주 중요한 문제는 법으로 사람을 잡지않는 의라고 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법, 사람을 완성시키는 은혜를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실제로 마태복음 12장에 가시면, 그 유명한 안식일 논쟁이 나오는데, 예수님께서 이 안식일 논쟁을 이렇게 잠재우십니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2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3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5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의 주인입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실현되어 있습니다, 그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우리를 구원하기위한 당신의 죽으심입니다!
의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잡는 의가 아니라,  사람을 살려내기 위하여 자신이 죽는 의입니다.
우리의 의는 법을 지키기 위하여 정의를 실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잡습니다.
20세기 내내 사실은 인류가 여러가지 실험을 했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많은 정치적 실험을 했습니다.

나치 제국이 있었고, 소련 공산주의가 있었고, 폴포트 정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하여 인간성을 외면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부모가 자식을 죽일 수 있는 이념을 정의를 실험하기 위하여 저들이 사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성이 말살되는 의라는 것은 무엇에 쓸 겁니까!
모든 악을 제거하고 부정을 제거하고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서 사람을 잡고 남아나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는데 있어서 우리의 의가  본질상 어떤 의냐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는 이웃도 죽이고 자신도 죽이는 의밖에 가지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의라는 것이 참으로 놀라운 것이 우리 모두를 살리는 것이요, 참다운 해답을 주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이 문제를 우리의 의가 정죄하는 의고 죽이는 의라면, 하나님의 의는 살리는 의고 또 성경적인 표현으로 사랑하는 의입니다.
사랑이라는 문제에 대하여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해서 이 비판하는 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다 알 것같은 이 사랑이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죠.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초반 3절 속에 나타나는 이 중요한 사랑의 무게를 알아야됩니다.
말하자면 진심, 이상, 가치, 의미, 명분, 윤리 이런 것들이 사랑과 붙어있지 않으면 그 자체가 아무 가치가 없답니다.
좀 더 확대할까요?
정의, 평화, 자유, 행복, 진리 이런 것들이 사랑과 분리되어서는 그것이 공허한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 속에서나 특별히 신앙적인 관계로서의 관계를 맺을 때,

꼭 신경써야하는 것은 사랑이 배제된 명분에 꼭 조심하셔야 됩니다.
우리 신자들 사이에 제일 빨리 이해하고 빨리 훈련해야 되는 게 뭐냐하면,
신앙 현실을 걷는 어떤 신자도 다 갈등과 염려 속에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됩니다.
그 하소연을 받아줄줄 알아야 됩니다.
'어렵구나, 어렵구나, 오늘 내가 냉면살께' 이걸 하세요.
'이건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거는 지금 이렇고 이렇고 이래서 네가 지금 이렇게 이렇게 된 게 당연한 결과 아니냐!' 이렇게 얘기하시면 안됩니다.
그건 답이 되질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우리가 말하자면 무엇이 옳은가를 증명해서 결론을 내리다보면,
틀린자를 다 배제시키고, 다 보내고 법만 덩거러니 남습니다.
명분만 남습니다.
사람은 하나도 못 살려내고 법만 남습니다.
이거 참 큰일날 문제죠.
그걸 지금 하는 얘기입니다.

환상이 있을지라도 능력이 있을지라도, 또는 열정이 있을지라도 사랑과 아무관계가 없다면,

사랑과 묶여 있는 게 아니라면, 그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 그럽니다. 그것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도 신앙이 좋으시면 안됩니다. 
사랑이라는 본체가 신앙을 가져야지, 사랑은 없고 신앙이라는 명분과 어떤 열심만 가지면 그 사람을 다룰 방법이 없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을 다 죽일 뿐입니다. 이게 그 얘기입니다.
사랑은 뭐냐! 사랑은 이렇게 넘쳐나고 억제할 수 없는 감동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이 아니고, 그 사랑이라는 완성의 자리에 가기 위하여 시작해서 도달해야되는 긴 여정이 있습니다. 과정이 있습니다.
4절에서 이렇게 소개합니다. 사랑은 우선 오래 참는 거랍니다.
오래 참는다는 건, 상대방의 꼬라지를 인정하셔야 됩니다.
내 마음에 들라 그러지 마십시요. 계속 평형법적으로 나오는데,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내 마음에 들라고 하지마십시요. 사랑은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사랑은 넘쳐나는 희열이 아니고, 넘쳐나는 감동이 아니고, 이렇게 억제해야되는 겁니다. 
어떤 억제? 판단하고 물리치고 고함지르고 싶은 강제력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뒤에도 나옵니다만,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1)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그게 다 이런 겁니다.  '저건 왜 여기에 있나,,.' 이 생각을 버리셔야 합니다.
'저건 왜 예수를 믿나,,, 저건 왜 하필이면 우리교회에 나오나,,, 저건 왜 한국에 태어나서 날 속썩이나,,,' 이걸 지우셔야 됩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은 막 눈에 불이 켜지는 게 아닙니다. 그냥 얼른 고개를 돌리고 싶은 걸 참는 겁니다.
웃고 인사하셔야 됩니다. 신앙입니다. 그게 신앙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리 죽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소서' 이렇게 죽습니다. 넉넉하시지 않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고통의 죽음을 견디시는 겁니다.
웃으면서 죽지 않으셨습니다. 우린 가끔 이 문제를 오해하지 않나 싶습니다.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그 다음이 재미있습니다)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모든 것은 뭐냐?
어느 한 구석도 마음에 드는 게 없는 걸 다 기다려야 됩니다.
'열 개 잘못한 거 좋아, 한 구석이라도 마음에 드는 게 있어야지' 그것마져 없는 것을 참는다 이겁니다.
그것마져 없는 것을 믿어야되고, 그것마져 없는 것을 바라고, 그것마져 최후, 최소한의 조건 하나도 없는 것을 견뎌야 됩니다.  
'사랑합시다' 우리 교회에서 자주 쓰는 구호인데, 
"오늘도 한 교회 모였으니 서로 이웃끼리 바라고 '사랑 합니다' 한마디 합시다" 그러면 어때요? 여러분 사랑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그 때만은 웃죠. 사랑합니다.
제가 지금 할께요, 인상 참고 옆 사람한테 해 볼께요 '사랑합니다'. 이 사랑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얼마나 치졸하고 비겁한 존재인지 아시지않습니까.
우리 안에서 선한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높은 정도가 아니라,
치명적이고 본질적이고 다른 무엇과도 대신 할 수없는 자장 우선적인 우리의 필요입니다.
이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이 은혜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실 신자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감격이라는 것은 사실 찾을 데가 없습니다.
우리가 비겁함과 못난 것과 한심한 데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나로 하여금 나의 비열함과 치졸함과 부끄러움을 우선적으로 인식하고 내 들보를 빼는 작업으로 나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만으로 인간은 인간답습니다. 

그것만으로 사람은 커다란 힘을 발휘합니다.
그것만으로 우리는 세상에서 빛입니다.
자기 들보를 빼는 자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만이 예수 안에서의 은혜를 확인하고, 삶 속에서 그 작업을 하며, 그 순종을 하며, 그 필요를 구하는 자로써의 겸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가지시는 예수 안에서의 의를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여러분과 인생에 실현하고 누리시는, 그래서 복되신 인생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요.
우리는 비로소 비참한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부끄럽고 비열한 인생을 면할 수 있습니다.
이 구원, 이 복을 누리는 저희들 되게하사, 우리의 존재와 인생으로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에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을 하는 자로써의 책임있는 신앙인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어떤 특권인지 예수 안에서 확인하고,
바로 그 믿음으로 그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의 자녀로 그 인생을 책임지리라 약속하고 돌아가는 심령들에게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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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예배 설교 녹취록 이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