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 (22)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8. 17. 07:49


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이 알아먹지 못하는 자에게, 가치를 모르는 자에게 값진 것을 주어 쓸모없는 결과를 초래하지 마라, 이렇게 읽힙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 이하에 가면 바로 이 문제가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도 이렇게 드러납니다.
좀 길지만 거룩한 것을 개에게 던져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한번 봅시다.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    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37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1    너희는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43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또는 참된 것또는 참된 것
45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또는 참된 것)
46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는데도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또는 참된 것
47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48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4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거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50    나는 내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51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52    유대인들이 이르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53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5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55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7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9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이 대목을 전부 보시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하여 저들의 형편과 저들의 결함과 문제를 지적하시고 예수님만이 답인 것을 제시하는 장면인 것을 보십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의 반응은 의외로 모든 문제에 주께서 거는 문제에 참여하지 않고 계속 자기를 방어하기에 바쁘고 자존심을 지켜 아무 필요가 없는 것같이, 아무 문제가 없는 것같이 굴고 그러기 위하여 이 문제를 지적하는 예수를 공격합니다. 

 
참 놀랍죠. 그래서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너희가 나를 죽이려 한다'라는 말을 두번이나 하셨고, 마지막에 실제로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을 나가십니다. 진리를 얘기하고 생명을 전하면 구원하기 위한 예수님의 증언과 설득에 대하여 유대인들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 필요와 지적에 동참하지 않으며 관심도 없으며, 오직 자존심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진리와 생명과 혹은 그 호위와 구원을 거부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이 요한복음 8장의 이 장면은 그래서 오늘 우리가 보는 마태복음 7장 6절에 나오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말고 돼지앞에 진주를 주지말라' 라는 말씀으로 그래서 지금 표현되고 있는 것과는 다르습니다. 
 알 만한 사람한테 얘기해라, 알아듣는 사람한테 말해라, 그런 뜻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7장에 가면 예수님이 이제 죽으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죽으시면서 요한복음 8장과 전혀 다른 예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11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12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13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그들이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언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14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크게 놀라워하더라

 

예수님의 죽으심을 보면 그가 억울한 무고로 지금 이 자리에 섰는 것을 봅니다. 허나 그가 당신에게 씌어진 잘못된 고소와 억울함들에 대하여 변명하지 않으며, 그것을 벗어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봅니다. 그는 이 죽음을 이미 감수하기로 작정하신 분이고, 이미 이 목적을 위해서 오신 분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과 유대인들간에 격렬한 논쟁이 말하자면 설득과 설명에 관한 것이라면, 주님은 지금 이자리에서 잠잠하실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이 누구고 우리의 결함이 무엇인가를 공격하여 상대방을 항복시키기 위하여 오신 분이라면 그러면 잠잠히 죽으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잠잠히 죽는 장면, 이사야 53장에 예언에 따르면  '털깍는 자 앞에 잠잠함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도다' 라고 예언된 메시아의 모습으로 그가 그의 죽음과 그 고난에 대하여 변명하거나 벗어나거나 도망가려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억울함을 감수하신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누구를 설명하여 납득시키는 사명으로 이땅에 오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억울한 죽음을 각오하고 오셨지, 우리를 납득시켜 당신의 오심이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증명될 것을 목적하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마태복음 7장 6절에 나타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말고 진주를 돼지앞에 두지말라는 얘기는, 개 돼지를 경멸하라는 그런 말이 아니라, 개 돼지에게 진주보다 더 급한 그 무엇이다 그런 뜻이죠. 우리 식으로 말하면, 진주 팔아서 자기 필요한 것 사면 됩니다. 그러나 개와 돼지는 그런 개념이 없습니다. 개와 돼지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우리 그저 보편적인 이해를 갖고 보자면 먹을 것이 가장 급한 것이죠. 진주가 자기네가 먹는 것을 얼마나 많이 살 수 있는가를 모릅니다. '스누피'라는 만화속의 개가 있습니다. 피넛츠라는 만화에 '스누피'를 통하여 작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만화에, 그 대단한 만화죠. "너 그들에게 가서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그들 자신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얘기해 봐, 그러면 그들이 널 잡아 먹을려고 할꺼야! "

 

오늘 이 문제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찾아가서 "너 지금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살아서 지금 요모양 요꼴이야" 라고 얘기하면, 탁 자빠져서 "그랬어? 내가 뭘 고쳐야 돼?" 이렇게 이야기하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네가 뭔데? 네 할일이나 해!, 내가 살다가 내 꼴을 내 책임으로, 내가 내 운명으로 살 테니까 너 가서 얼씬 거리지마, 안번만 더 오면 죽여 버릴꺼야!"


이건 뭐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우리의 실상을 우리 인간된 현실을 가장 잘 드러내는 늘 반복되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래서 이 7장 6절의 핵심은 이거죠.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가 나름대로 옳습니다. 하나의 진리일 수 있고, 도덕일 수 있고 또 저들이 그것을 진심과 호의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지켜야하고 그 말을 들어야하는 사람들을 변화시킬 능력은 없습니다. 여러분 옳으면 여러분이 다 항복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알아도 죄는 짓습니다.우리가 누구에게 상대방이 얼마나 잘못했고 지금 어떻게 해야 된다고 얘기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그 말에 귀를 기울잉고 합의하고 감사해야하는 그 정도의 수준에 존재가 아니라는 것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 평생에 가장 잘 알고 지내던 친구들은 대부분 고등하교 친구들입니다. 왜그럴까요? 고등학교 때는 싸우고 다음날 또다시 만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꼴 같지 않는 꼴을 보고도 다음날 똑같은 교실에서 마주쳐야 되어서 우리가 소위 말하는 미운 정이 듭니다. 미운 정이 든다는 건 뭐냐하면 넘어가게 되는 겁니다. 더 이상 안 싸우기로 하는 겁니다. 쟤는 늘 말을 밉게 한다는 걸 내가 감수하는 겁니다. 쟤는 성격이 그렇다는 거를 감수하는 겁니다. "놔 둬! 늘 그랬잖아" 이게 친구 지간을 지속시킵니다. 마음이 다 합하고 일정한 성실과 능력과 도덕성이 있고  인격이 고매하면 친구가 안됩니다! 자기 하나가 그런 것만으로도 사람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끼리 모여있는 관계란 없습니다.


사람은 훌륭하려면 가능한 자신을 감추고 누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시간을 줄여야지, 오래 있으면 결국엔 실력없는게 드러납니다.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문제입니다. 피너츠 만화의 중요한 한 권이 제목이 이겁니다, 아주 기절초풍할 일이죠.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 네 성격 탓이야' 늘 잘못을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옳고 그런 문제가 아니라 성격이 그러니까, 얼마나 가슴을 치는 얘깁니까.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아는데 우린 언제나 '죄송합니다 제 성격이 그렇습니다' 라는 말을 여러분 다 해보셨죠. 그러나 고쳐지지를 않습니다.


여기에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대비되는 예수 안에서의 하나님의 의가 왜 필요한가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 의는 뭐냐, 요한복음 6장 53절에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5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대단한 말씀입니다. 진주를 던지지않고 진주를 팔아 음식을 주기로 하신 겁니다. 당신이 우리를 설득하러 오거나 정죄하러 오시지않고 당신을 우리의 양식으로 내 주시기로 하신 겁니다. 그래서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시라고 권하므로써 우리라는 존재가 우리의 살과 피가 예수로 재구성되는 일을 위하여 오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넉넉하심 속에서 비로소 우리는 누구의 말을 들을 수 있고, 호의를 받을 수 있고, 비판을 감수할 수 있고, 화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왜 이런 얘기를 예수 안에서만 이라고 얘기해야 되죠? 우리가 우리 자연인들이 현실에서 가장 많이 갈등을 겪는 대목이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납득하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호의 진심 희생입니다. 그걸로 납득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상대방이 몰라서 그렇지않습니까? 아는데 그것을 받아들일 어떤 가장 근본적인 어떤 그릇도 자세도 무슨 근거도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갈증은 있지만, 어떤 그릇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인격이 있고 영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리와 행복과 생명과 옳음과 또 용서와 화목과, 이런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뭐가  우리 안에는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면 우리는 그걸 치워버리지, 그것이 우리에게 양식이 되고 안에서 우리를 만드는 어떤 것도 되질않습니다.  부모와 자식관계에서 제일 가장 잘 나타납니다. 부모는 자식앞에 거의 애원합니다. 내가 네가 이번에 10등안에 들기만 하면 내가 잠옷 바람에 삼성동을 뛰마! 그러면 자식이 그 말을 못 알아 듣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정말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그런다는 걸 아는데, 그게 할 수가 없습니다. 해 보신 분들은 표정에 변화가 없는데, 전 못해본 쪽입니다. 알지만 안 됩니다. 그러면 뭐라고 답할 수 밖에 없냐하면, "잠옷 바람엔 왜 뛰어요?!"  이런 정말 그 진심과 희생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합니다. 어머니는 기절하죠. '저 새끼가 내가 자기를 위하여 잠옷 바람에 뛰겠다는데, 잠옷 바람에 왜 뛰냐고 하네' 아녜요, 지금 무엇을 서로 서로 어긋나고 있는지를 알아야돼요, 우린 신앙인이니까 더하고 더 합니다. 우린 믿음으로 이 말을 하거든요. 예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다, 성경이 그리 말한다 하는 조건을 붙이면 우린 더 변명과 회피를 할 수없죠.  그런데 안 되거든요. 안 되거든요. "그럼 나 예수 안 믿을꺼야!" 이 멋대가리없는 대답밖에 할 게 없습니다.
"너 신앙생활 그 따위로 해서 되겠어?"

"내가 어때서?"

"아 성경에도 일하기도 싫거든 먹지도 말라 그러잖아?" 

"그래 나 굶을께"

이 멋대가리없는 말이 나오는 이유를 알아야 됩니다.


우리 안에 예수가 들어오시지 않으면 그로 말미암이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넉넉한 인격과 영적인 부요함을 가지지않으면, 무엇을 담을 수도, 무엇을 받을 수도 없단 말이죠. 여기에 바로 오늘 얘기하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마라, 진주를 돼지앞에 주지 마라, 라는 말이 가지는 뜻이 있습니다. 예수 없이는 어떤 호의도 어떤 진심도 어떤 옳음도 무용합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가 사랑에서 확인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장에 나오는 이 말씀 기억하시죠?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을지라도, 자기 몸을 불 사르게 내어주는 열정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사랑이 그 일을 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환상, 능력, 열정 그것 자체로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아무 힘이 없습니다. 사랑이 그 일을 해야 됩니다. 사랑 자신이 그것으로 환상으로 능력으로 정열로 표현할 때에만 그것은 가치가 있고, 유용합니다. 마찬가지로 옳다는 것은, 예수가 예수 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사, 당신의 귀한 백성으로 우리를 부활시키시는 예수의 생명으로 새로 빚으시는 일이 전제되지 않으면 우리에게 진리, 진심, 헌신, 무슨 의미, 가치, 이상 모두가 힘을 잃습니다. 그것은 그냥 관용입니다. 그것은 그냥 하나의 생각입니다. 실체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때나 바로 이 문제를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예수를 전제해야 됩니다. 예수라는 이름으로 내가 나가지말고, 내가 예수 안에서 내가 나감으로써 상대방이 예수를 만나게해야 합니다.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를 만나게 해야 됩니다. 예수를 동원하여 내가 상대방이 만나지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스 4장  29절에는 이런 중요한 권면이 나옵니다. 바로 이 문제 '상대방이 예수를 만나게 하라 너를 만나게 하지 마라' 이렇게 나오죠.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여기까지는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이 대단히 윤리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이것이 윤리나 도덕 이상이라는 것은 그 다음 절을 보시면 이렇게 드러납니다.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그래서 불쌍히 여기라는 것은 우월감을 가지고 동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가 대책이 없다는 걸 알아야됩니다. 대책이 없다는 걸!
우리가 어느 한사람의 변화를 위하여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우리 스스로에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설명을 잘 합니다.
내가 다른 무슨 음흉한 생각을 가지고 내 욕심을 위하여 상대방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이 되면, 상대방이 납득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사람은 그것으로 납득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영혼의 갈증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베푸시는 영적 풍요로움을 받지 않고는 인간은 살도 피도 뼈도 있을 수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비판하지 말라에서부터 출발한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이 무엇이냐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영적으로 살찌는 문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안에서만 허락되는 것이고 그 일이 허락되었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을 자신과 이웃에게 책임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가 예수 안에서 얻은 이런 해답들과 넉넉함들과 이제 주고 받고 용서하고 기다리고 이해할 수 있는 일들을,

나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친절하게 하는 것으로 용서하는 것으로 합니다.
이것들은 다 이런 의미와 다르다는 거를 알아야됩니다.
상대방을 내 마음에 들게 명분과 논리로 강제하는 것과 다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성령운동이 그렇습니다!
기적이 동원될 때가 그렇습니다.
기적과 성령으로 인하여 조급한 확인 때문에 한국교회 성도들은 기다려야하고 답답해야하는 것이 가지는 더 깊은 생각, 더 긴 훈련이라는 것에서 자꾸 도망을 갑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아는 것은 이 참으로 지루한 반복되는 일상과 평범함 속에서 하나님이 만들어 가신다는 걸 알아야됩니다.
한 영혼을 채우고 신앙인격을 만들어내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 범상한 일 속에서 하나님이 신비롭게 만들어 가는 것들입니다.
보약먹고 크지않고 그 밥에 그 나물먹고 크는 것과 같습니다.
좋은 약 먹으면 IQ가 100씩 안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 가시고 채우시는 방법과 그기에서 특별히 기다려야하고 용서해야되고 비판하지말아야하고 명분으로 조급하게 상대방을 요구하지 않아야 될 이 의!  여러분들 ?신사된 인생 속에서 꼭 필요한 실천에 내용들이요 원칙들입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여러분의 삶을 살고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앞에 이 의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핍절함과 갈증과 우리의 분노는 다 우리 영혼의 가난함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이웃에게 책임을 지우고 분노하고 억울해 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나고 새생명이 주어지고 예수로 말미암는 십자가에 그 무한한 은혜가 베풀어졌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부요하지 못합니다.
오늘도 말씀으로 우리를 깨우쳐셨으니 우리 자신을 위하여 우리 신자된 인생을 위하여 하나님의 의를 힘입어 승리하는 자 되게 하시옵소서, 그리할 때만 우리 이웃앞에 참다운 빛과 소금으로 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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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설교 녹취록 이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