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23)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8. 18. 07:53


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9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10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오늘 본문 말씀에 결론이 되는 12절 말씀은 매우 유명한 구절입니다. 우리 주님의 가르치심을 따르고 있는 예수 믿는 신자들만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에서도 성경 가운데 이 구절을 황금율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가장 놀랍고 귀한 교훈이라 그렇게 받고 있습니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가지는 이해는 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가지는 이해와 같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이 갖는 그 깊은 내용을 오늘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만, 피상적으로 읽으면 세상사람들이 말하는 것같이, 마치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라는 뜻으로 이해하기 꼭 좋습니다.


물론 본문은 단순히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 7절부터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고 그리고 '대접'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마음에 두고 그 깊은 이해를 위해서 이 결론부분부터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대접을 받는다하는 이 문제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나라는 존재가 이해되고 납득되면 좋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자기가 존귀한 존중함을 받으려면 상대방을 존중해야 된다라고 가르치면서, '그것이 율법이고 선지자라' 그렇게 얘기함으로써 그것이 다만 오늘 여기에 등장한 갑작스러운 돌연한 교훈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사상과 맥을 같이 한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죠.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실마리가 마태복음 22장 34절에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계명은 십계명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모든 율법의 요약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첫째되는 계명이란, 십계명을 주셨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두 돌판에 계명을 써서 주셨는데, 첫번째 돌판에 일 계명부터 사 계명까지, 두번째 돌판에 오 계명에서 십 계명까지 있습니다. 첫번째 돌판에 있는 일 계명에서 사 계명은, 여호와만 섬겨라, 우상을 만들지 마라,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라, 하는 하나님께 대한 계명입니다. 그리고 오 계명부터는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이웃에게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얼핏 보기에는 이 계명들이 다 매우 부정적인 명령으로 되어있는데, 예수님께서 이것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설명하십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율법에서는 십계명에서는, 그것이 범법의 경계선을 가르치는 것으로 보이는데 하나님은 그런 두려운 하나님, 벌주시는 하나님 그런 의미에서 거룩한 하나님이신데,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이 사랑을 요구하시는 하나님,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가, 성경이 전체를 통하여 가르치는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가르치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너희에게 하나님은 이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하다, 이것이 첫째 계명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의 필요와 만족과 감격의 충분한 하나님이시다, 그런 뜻입니다. 우리의 필요를 채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만족케하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감격케하시는 하나님이다... 오 계명부터 십 계명까지는 둘째 계명이라고 소개하는 내용은, '네 이웃을 약탈해서 네 필요를 채울 필요가 없다' 그런 뜻입니다. '너는 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충분하기 때문에 네 이웃하고 경쟁하거나 싸우거나 시기하거나 증오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둘째 계명입니다. 이 계명을 이해하는 이런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놓고 보자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분명 이런 결론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이웃을 이용하거나 이웃을 격파할 필요없이 하나님안에서 충분해야 합니다. 내가 이웃과 경쟁과 싸움과 증오를 벗어날 때, 이웃은 나를 나로써 존귀히 여길 것이요, 우리도 우리의 이웃을 약탈의 대상, 수단 이해관계로 보지않고, 하나님이 저들의 필요를 채우고 내가 저들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는 사실 속에서 이웃을 내 손에서 놓고, 경멸과 멸시, 수단, 흉악한 생각을 비로소 털어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여기서 얘기하는 '대접'입니다. 왜냐하면, 본문으로 돌아오셔서 이 '대접' 얘기는 이런 문맥 속에 있습니다.

 
7장 1절은 '비판하지 말라'로 시작합니다.
2절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즉 우리가 우리의 이웃에 흠을 잡아내면 우리의 이웃은 그것으로 우리를 존귀히 여기거나 우리에게 항복하지 않는답니다.
우리가 이웃을 정죄하면, 동일한 이유와 잣대로 이웃도 우리를 공격할 것이라고 합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6절에 나오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앞에 던지지 말라'에서 드러난 대로, 우리가 진주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그것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지식적으로나 능력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앞서 있다고해서 그것이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우리가 누구의 흠을 잡고 정죄를 하는 것이 내가 상대방을 교정할 수 있고 항복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린 누굴 흉볼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해서 나는 그 사람을 흉 본만큼 그 흉본 내용을 고쳐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도덕을 기준으로 할 때, 내가 옳을 수 있습니다. 그냥 옳을 뿐이지, 도덕과 율법이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여름 내내 비 많이 왔는데 그 잠수교 한강수위가 어느 만큼되면 잠수교가 통제됩니다. 그러면 그 수위가 7미터가 됐다라는 잣대와 그래서 그게 물을 더 이상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과는 아무도 연결을 시키지 않습니다. 법이나 율법이란 그런 것입니다. 사람을 고쳐내는 실력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구를 비판할 날카로운 안목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날카로움이 상대방을 살려낼 실력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진주를 개와 돼지에게 주었을 때, 개 돼지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않는다는 데서 명백해졌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전체 문제가 비판하여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과 대조하고 있는 우리의 의와,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에 대조라는 걸 놓쳐서는 아니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대표됐던 우리의 의의 약점이 뭡니까? 옳은 것은 알 수 있으되, 옳을 수는 없고, 옳게 만들 수 없는 의입니다. 다만 비판하고 흠잡고 흉을 볼 수밖에 없는 의, 고쳐낼 능력이 없는 의, 그 참으로 답답한 의입니다!


여러분 살면서 제일 고달픈게 뭡니까?

아는데 안 되는거죠. 아는데 안 되는 거,,,! 그 때 제일 구찮은 친구가 누굽니까?
와서 정답 얘기해 주는 사람이죠. 정답(?)얘기하는 사람,,,
"열심히 해 봐, 이렇게 해 봐, 저렇게 해 봐,"
" 아, 우리 다 잡아다 죽입시다"^^
그게 분명히 7장 6절에 나오는 겁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아니 그렇습니까?
진심이고 옳고 호의를 가지면 되는 것 아닙니다.
그것 갖고 문제가 해결 되는 것 아닙니다.
한 인간이 영혼과 인격을 만족시키는 것, 그것 정도 갖고 되지 않습니다.
그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결코 기도를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통 얘기하는 기도, 신앙의 실천, 신앙의 한 방법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의를 만들어 낼 실력이 없음을 인정하라, 너희의 한계를 확인하라 이겁니다.
너희 안에서 의를 만들어 낼 수 없다, 너희가 만들어 내는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 뿐이다.
그것은 명분이 있고, 그것은 잘난 척은 할 수 있지만, 실제적인 능력은 가지지 못한 것이다.
'외식 한다' 그러죠. 겉치레를 할 수밖에 없다, 한 영혼을 회복시킬 수 없다, 살려 낼 수 없고 채울 수 없다,
그러니 구하라! 이겁니다.  밖에 있다, 너희 안에는 없다, 그리고 뭐가 등장하느냐하면,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로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르리라가 연결됩니다. 이 9절 이하죠.
왜 갑자기 아들이 됐죠?
너희가 악한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 이렇게 등장합니다.
왜 여기서 갑자기 아버지가 등장을 했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시는 길은 딱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저 무서운 신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아버지가 된 것은 예수로 말미암아서 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시고, 당신의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시며, 우리를 끌어모아 당신 안에서 하나님을 같이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십니다. 
이 기독문 속에 뭐가 뭐가 중요하게 들어가 있느냐, 예수로 말미암은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이라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를, 우리 홀로 만들어 내는 의에서는,

자신에게나 이웃에게나 그 영혼과 인격에 답을 줄 수 없었던 존재로부터,

아버지의 자녀가 됨으로 아버지로부터 우리의 필요를 얻을 수 있는 자리로 우리를 바꾸어 놓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있죠.!!!
오죽하면 '기독교 신앙'이라 그러겠습니까?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한문 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죠. 그리스도교를 한문으로 써서 기독교가 되는 거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게 되는  바로 이 사실에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고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느냐하면,
요한복음 17장 17절에 이렇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8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내었고
19    또 그들을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그들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
20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21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22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23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예수님의 기도에 이 중요한 내용이 오늘 본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주께서는 세상을 의지하여 살고있지 않다고 당신을 구별합니다.
내가 거룩하고 너희도 거룩하여야 된다. 이 거룩함은 구별된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의 것으로 근거하거나  내용을 삼지않고 하나님으로만 근거하고 내용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러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나를 보냈다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아버지 안에서 충만케하기 위하여 아버지께서 그리하시는 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를 보내신 것이다, 이거죠.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라는 것은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유일한 근거고 유일한 시작이고 유일한 내용이고 유일한 목적입니다.
예수 안에서라는 얘기는 비로소 하나님이 우리에게 누구신가가 밝혀지는 것입니다.

그는 창조주시며, 우리 아버지가 되기로 결심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을 보내십니다.
그 아들을 보내심으로 우리를 하나님 안에서 충만케하고 승리케 하기로 약속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이 드러납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모두가 다 우리의 필요가 다 하나님 손에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넉넉한 것이며,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의 신적 의지로 이루어지고야말 운명인지를 깨우쳐야 됩니다. 
골로새서 1장 18절에는 이렇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이 복음은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 신앙입니다.
이 복음의 핵심이 뭐라고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자녀와 백성으로 세우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22절에 보는 바와 같이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십니다.
여기서 도덕성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기능성을 벗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사회적 시대적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비판?  하나님 없는 세상에 죄악된 것과 그 무지한 것, 그 부패성, 그 잘못된 것, 지적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지적이 그 지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되면 안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여기서 말하는 거룩하고 흠없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자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내가 사는 사회나 내가 사는 시대에 의해서 도움을 받거나 그들을 비판해서 확보되는 자리가 아니라,

환경과 조건에 상관없이 영원무궁토록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확보된 자리에서 안타까움으로 나올 수 있고 사랑으로 나올 수는 있으되, 그것이 빈약한 정체성이 되는 그런 말일 수는 없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 실수를 자주 합니다.
종종 그 뜻밖에 정치적 발언을 하는 그 예들이 있습니다.
저는 견해를 약간 달리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죠. 
그것이 목사들의 시대와 사회적인 책임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얘기함으로써 마치 교회가 또는 신앙이 가장 중요한 자기의 의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늘 본문과 다르습니다.
대접 얘기였잖습니까?

여러분은 이웃과 세상과 상관없이 하나님 안에서 충분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평화를 만들어 내고, 그것만이 이웃들로 하여금 '우리가 우리의 필요를 무엇으로 채웠는가' 묻게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무관심하자는 것과 다르습니다.
우린 어쨌든 이 현실속에 있어야되고, 우리가 사는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지만, 그것은 근거도 아니고 내용도 아닙니다. 그 조건속에 있을 뿐입니다.
빌립보서 3장으로 가면 7절 이하에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의 고백은 이런 대조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게 한답니다.
죽은 자의 삶에서 산 자의 삶으로 자기 인생을 바꾸겠다는 겁니다.
죽은 자의 삶은 예수없이 살던 삶이고, 부활한 삶은 예수를 믿어 갖게 된 삶입니다.
예수없이 살 때는 말하자면, 나의 의로 살던 때입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예수의 의로 살겠다는 겁니다.
내가 나의 의로 살 때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죽고 누구를 죽이는 것 밖에는 할 줄 모르던 때 입니다.

우리가 마태복음 7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것은 비판하는 것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활 생명 속에 산다는 것은, 내가 살고 살리는 것입니다.  살고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들이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완성을 의미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전혀 안목과 이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인들의 신앙현실을 보면, 가장 괴로운 것이 자기가 마땅히 되어야할 신앙의 수준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일 겁니다. 가장 괴로운 현실이겠지요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고 자기를 용서하고 사는 것이 믿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남을 용서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용서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나의 못난 것을 인하여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자폭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양심이 있다면 자폭해야 됩니다.
예수를 보내심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내가 자폭할 마음을 가지면 이웃에 있는 모두 다 우리는 죽일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이 그게 뭐야!  사람이 그게 뭐야?  이는 예수 안에서는 하지 않는 얘기들 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는 얘기는 용서하고 이해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은 금방 혼돈스러워지실 것입니다.
뭔가 보이는 기준, 보이는 눈금, 보이는 잣대, 그것이 언제나 우리에게는 자기 의입니다.
책임질 수 있는 것, 할 수 있는 것,

산상설교에서 가장 놀라운 하나님의 의의 놀라움은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나는 겁니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좋은 것으로 너희에게 주시지않겠느냐!'
그것 그걸 믿음으로 지켜야 됩니다.
내 못난 데로 갚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란 걸 믿어셔야 됩니다.
그것이 우리를 신앙인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해하지 않고, 이웃을 이용하지 않고, 이웃을 약탈하지 않고, 넉넉하다는 것이, 그래서 우리가 고통스럽지도 않고 소원이 다 이루어지고 아쉬울 것이 없는 경지에 이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게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채워야할 것이 많은 부족한 자란 것을 인식하지만, 그걸 채워줄 수 있는 이가 예수밖에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내 못난 것을 이웃에다가 쏟아붓지 않는 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도와 주십시요, 사랑한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앞에 나아가지, 내 괴로움과 내 고통을 인하여 옆사람 볶지 않는 거죠.
우리 자식을 기를 때도 많이 해봤죠.
자식을 위해서 뿐 아니라, 이대로 놔두면 틀림없이 평생 나를 고달프게 할거니까, '그러지말고 내 말을 듣든가 아니면 죽어라!' 아 이게 우리한테 있습니다. 그게 우리에게도 늘 나타나죠. 자폭적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이 문제에 오늘 답을 주시든가 아니면 저를 죽여 주십시요' 우린 이렇게 밖엔 할 줄 모릅니다.
아니라는 거죠. 아니라는 거죠. 어떤 대접을 받으라고요?


우리의 필요와 우리의 내용과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그 하나님은 그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아버지가 되기로 하신 분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자식의 사이는 법이나 다른 어떤 규칙이나, 다른 어떤 잣대로 갖다 댈 수 없습니다.
떼를 쓸 수 있습니다. 떼를 쓸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신앙을 갖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하나님이 예수를 보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여러분의 필요를 이웃하고 싸울 필요없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아신다면, 여러분의 신앙생활은 보다 넉넉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의미도 세상앞에 다르게 비추어질 것입니다.
이 믿음, 이 내용 간직하시고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못난 자식들 입니까?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우리의 못난 것보다 큽니다. 이 사실은 기억하게 하옵소서.
우리가 날카로움을 자랑하며, 판단하며 우월감을 확인하며 자존심을 세우며 진심과 호의를 가지고 진주를 만들어내는 그 자리에서 이제 벗어나, 예수 안에 있는 넉넉함으로 무장하게하사 우리 자신과 우리 이웃들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것이 우리의 빛이고 소금인 우리의 사명이며 우리의 복입니다.
우리의 고단한 인생,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 자신, 회개하고 가슴을 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보다 크다! 믿는 믿음으로 승리하게 하시옵소서.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극진하신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특권이고 자랑이고 운명인지 기억하고 믿음을 약속하고 충성을 약속하고 승리를 약속하고 돌아가는 심령들 위에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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