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 (25)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9. 1. 23:53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오늘 본문입니다.
열매를 봐라, 그거죠. 열매를 봐서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아라 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 소개되는 말을 이렇게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19절에 있는 것같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를 아름다운 열매를 맺자라고 이해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면 나무와 열매로 설명하려는 정체성을 확인하는 증거라는 핵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장에 가면 바로 이 정체성을 확인하는 증거에 관한 대표적인 말씀이 나옵니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자'라는 말은 그 자체로 옳은 것이지만, 본문에서 소개하고 싶은 건 그런 뜻이 아니라, 성령을 쫓고 있는지, 육체를 쫓고 있는지 열매로 봐라 라는 일종의 판결식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늘 혼돈하는 것 중의 하나인데, 기독교적 신앙의 명분과 기독교적 신앙의 형태를 가지면 성령을 쫓는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늘 하는 얘기지만, 옳은 얘기를 하는데 성질 부리면 아니다 그겁니다.
옳은 일을 하는데 성질 부릴 수 있죠. 그러면 육체를 쫓고 있는 것이다라고 성경은 얘기합니다.
그 열매와 나무를 지금 어떻게 사용하고 있느냐하면, 전봇대가 사과 감 배 사다가 주렁주렁 걸어놓지 마라 그겁니다.
성령의 열매로 나열된 것을 목표하여 열매를 끌어 모으고 사려고 하지마라, 그것이 열리는 나무가 되라 그겁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니까 자기 의에 있느냐,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의 통치안에 있느냐를 대조하는 지금 산상설교에서,
열매로 나무를 안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정체성을 증명할 열매로 자신을 확인해야 된다 그런 뜻입니다.
그게 뭘까요?
마태복음 5장에 가시면, 산상설교 첫부분에서 우리가 이미 이런 하나님의 의에 정체성을 잘 드러내 주는 내용을 이미 만났었습니다.
그게 마태복음 5장 44절입니다.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예수를 믿지않는 세상 사람들도 기독교 신앙이 갖는 가장 고급한 윤리로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이것이 윤리적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쫓아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의 통치가 이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그 원수를 사랑해야 됩니다.
이어 나오는 말씀을 보면 확실해 집니다.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를 불러 자신의 자녀로 삼으시려는 우리 아버지가 이런 분이며 자비롭고 용서하는 분이며, 우리에게 당신의 성품과 속성으로 채우라고 부르시기 때문에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된다는 것이 예수도 없고 아버지도 없고 그 자체로 가치를 가져서 기독교 신앙의 명분이 되면 비판하는 의가 됩니다.
'나는 했다, 너는 못했다'가 되고 '나는 더했다, 너는 조금 밖에 못했다'가 되고, 자신이 가진 것으로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밖에 써먹을 수 없는 의가 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살펴 보겠지만,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는 전혀 다르습니다. 계속 볼까요?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남보다 더하는 것, 이방인과 다른 것은 다 하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의 구별됨입니다. 그들과 다른 것인데, 그것을 결론 48절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로 요구되고, 이미 앞의 45절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라고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는 기독교 신앙, 예수 안에서 허락되는 하나님의 의의 본질, 신자된 정체성이라는 것은 예수가 누구냐에 다 달려있습니다.
예수가 누구냐라는 것은 예수를 보내시는 하나님, 예수가 누군가에 따라서 하나님이 누군가가 우리의 이해에 차이를 만들어 낼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냐?
예수로 하나님이 무얼하실려고 하느냐?
여기에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특징과 본질이 있는 것이죠.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11장에 가시면 이 문제를 예수님 자신이 이렇게 당신의 정체성을, 예수의 정체성은 메시아된 정체성과 함께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정체성을, 속성을 드러내는 발언을 하십니다.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우리 잘 아는 구절이죠.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치유의 역사와 기적이 있다' 당연하고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은 핵심되는 내용이 이겁니다. 이 기적은 자격이 없는 자에게 복이 주어진다하는 거죠.
못 듣고, 못 일어나고, 못 보고, 죽을 병에 걸려 있는데, 그것을 고칠 능력이 없는 자에게 회복과 고침이라는 복이 자격과 조건없이, 그 유일한 조건이 있다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이 이런 결과를 초래하더라는 거죠.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는 아까 본 바와 같이 관용이요, 용서요, 사랑인 것입니다.
이것이 아까 본 성령의 열매에서 보고 육체의 일과 대조되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과 같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특징이며, 신자된 정체성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말을 할려면, 예수가 누구냐라는 정체성과 그 본질적 특성에 연속성을 가져야 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이사야 61장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메시야 예언입니다.

하나님이 장차 구원자를 보내실 것인데, 그 구원자가 와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복과 하나님의 영광으로 채우실 것이다.
누구에게? 가난한 자에게, 갖힌 자에게, 희망이 없는 자에게, 자격이 없는 자에게, 능력이 없는 자에게 이 일을 하실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 안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는 은혜롭고 자비롭고 용서하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복주시려는 우리 아버지시다.
이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예수를 믿는다고 고백함으로써 가지게 되는 기독교 신앙의 가장 특징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우리는 자꾸만 기능적으로 도전을 받죠.
예수를 믿어 쓸모있기를 바랍니다.
그 교회에 요청하는 것도 교회가 쓸모있기를 바랍니다.
어떤 쓸모가 있으면 좋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교회가 어떤 쓸모가 있으면 좋겠습니까? 남북통일에 한 건 했으면 좋겠습니까?
모든 세상 사람들이 놀라는 어떤 사회 봉사를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런 것들이 우리를 속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세상이 가진 가난을 없애며 불의를 없애는 하는 싸움에 본질적 문제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우리의 본성과 죄의 권세 때문에 이룰 수 없는 각 개인의 변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으로의 변화,
그래서 용서받는 자로써 현실과 세상과 사회에 시대를  책임지는 개인을 만듭니다.
교회는 이런 일로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긍휼과 기적에 의해서 부름을 받은 자로써, 한 믿음의 공동체의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예수 한 분인 겁니다.
그 분이 나를 불러줘서 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공동체가 조직이 되면, 그 조직이 힘을 갖기를 바라고 능력이 있기를 바라고 명분이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 틀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저 사람은 왜 교회에 왔을까? 저 사람은 왜 기독교인이 됐을까?
다른 교회에 갔으면 하나님께 더 영광이 됐을텐데.
이 가장 기독교적인 이해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쓸모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사회적인 공감을 받아내는 것.
이것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요한일서 4장 7절에 가시면

 

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을 알면 아주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사랑이랍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에 있는 것같이 사랑은 뭐였죠?
사랑은 천사의 말을 하는 것이나 산을 옮기는 믿음이나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열정과도 다른 것입니다.
사랑없이 그것이 시행되면 그것은 자기 의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가는 첫번째가 뭐였죠? 오래 참는 것이었습니다.

성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바라고 견디고 믿는 것입니다.
교회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같이 같은 신앙고백을 했으니까, 일사분란 하고 한마음이 되어 보란 듯이 움직이는 세력이 아니고, 모일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를 용납하는 곳입니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을 용납할 수 있느냐가 그 교회의 교회된 깊음이지,

얼마나 보란 듯이 일을 할 수 있느냐는 한국교회가 직면한 시험일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 가시면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 말은 밑줄을 그어놓으셔야 되요.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이게 기독교 신앙의 정수입니다.
이걸 벗어나면 싸움밖에 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 어려움이 있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믿음의 관심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견해 차이나 시끄러운 일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그 모든 걸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음이 되어야 교회가 멋있어 지는 건 결단코 아닙니다.
제 설교를 듣고도 은혜 못 받는 사람이 있는 걸 제가 용서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가 너무 정곡을 찌르니까 웃을 수 밖에 없죠.^^ 속을 안 들킬려고,,,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요.
한국교회는 성공함으로써 본질에서 약간 시험을 받아 위험한 관심을 여러가지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민족과 국가 앞에 쓸모가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교회는 민족과 국가를 초월하는 데 입니다.

하나님의 힘을 국가로써 독점하고 싶었던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거 없어지고 예수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의 집단으로 민족과 국가의 인종의 차별없이, (다른 것은 물론이죠) 배우고 못배우고, 갖고 못갖고는 물론 차별이 없이 하나로 묶이는 데가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교회는 끊임없이 이 싸움을 해야 됩니다.
성경식으로 얘기하면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게 교회가 할 일입니다.
여러분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세상에서는 사람들이 '자기의'밖에 만나지 못합니다.
인간의 의에서 모두가 답을 얻지 못하여 그 영혼의 갈증을 풀 데가 없는데,

교회에 오니까 종교성의 의만 있고 도덕성의 의만 있으면, 그 실망한 사람이 교회에 와서 완전히 절망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를 만나야 됩니다.
용서하시는 분, 회복시켜 주시는 분, 사랑하시는 분을 만나야 됩니다.
그게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가 영원무궁하시기를 바라십니까?
그거는 모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어느 교회와 어느 나라로 하시지 않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훈련시킨 신앙인들과 그들의 신앙고백과 그들의 삶을 통하여 교회사가 이어오고 있습니다.
교회사 속에 어느 집단, 어느 단체, 어느 조직이 기독교 교회의 신앙을 여태까지 이어오고 있는 데는 아무데도 없습니다.
잊지 마셔야 됩니다.
같은 얘기를 골로새서 3장에서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 첫절을 조심하셔야 돼요.
12절에 있는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이것이 여러분의 모든 것이어야 됩니다.
이것으로 부족하면 안됩니다. 이것으로 충분해야 됩니다. 그래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참여하는 것이 됩니다.
그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의에 대한 욕심을 끊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조건 속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피차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야 됩니다.

기독교 신앙입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용서하다가 우리 교회라는 공동체를 망쳐도 상관이 없습니다.
망쳐도 상관없다니까 눈이 둥그레지시는데, 순교가 뭡니까?
순교란 기독교 신앙을 지키서 죽어버리는 건데요!  왜 교회가 영원무궁해야 됩니까?
순교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죽어버리는데 그게 한알의 썩는 밀알이 되는 방법, 죽음에서 부활을 만들어내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우리에게 순교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보이는 것으로 힘을 가지려고 하지 마십시요!
예수 안에 있는 것으로 힘을 가지려고 하십시요! 그것만이 우리의 무기가 되어야합니다.
그래서 이것은 아까 봤던 갈라디아서 5장 16절 이하의 이 이야기는 이렇게 사실은 결론으로 등장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 가면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다음에 뭐라고 나오느냐하면,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사람의 의와 하나님의 의를 이것보다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으로도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것이죠.
기독교 신앙은 '예수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누구신가에 관한 싸움인 것입니다. 예수를 닮는 싸움이고 나를 버리는 싸움입니다.
내가 없어지는 건 나의 존재가 없어지거나, 나의 어떤 주권과 나의  고유한 무슨 요소들이 없어진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아래 들어가 그 통치의 영광을 누리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죠.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분명해졌죠!
우리의 싸움은 어디에 있는가 보십시요.
예수 안에서, 십자가 안에서의 용서와 사랑은 싸울 수 없는 것들 입니다. 무엇인들 참을 수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로 가면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산상설교의 마태복음 7장에서 극명하게 대조되듯이,
비판하는 의, 정죄하여 가지는 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자기 정체성의 내용은 없고 상대방을 비판하고 정죄해서만 증명되는 자기의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용서하고 사랑하고 또 깊어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허락한 거룩한 것들로 채워지는 의를 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자신을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옆사람에게 손가락질하는 것이라면 그건 아닙니다. 왜요?
예수님이 그러려고 오시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구하러 오셨고, 죄인들을 용서하러 오셨지, 심판하러 오시지 않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입니다!
그의 수난이며 우리를 구원한 은혜입니다.
그걸 살아야됩니다.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현실, 그 현실의 모든 위협과 시험앞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세상에 나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용서하고 성실히 살아 죽음을 각오하여 나는 예수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자라! 라는 싸움으로 여러분 존재와 인생을 맡기는 싸움인 것입니다.
그러면 형통해진다, 이건 모릅니다, 그건 약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순교로 갈 수 있습니다. 고난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길을 가지 않는다면, 어쨌던 그것은 기독교 신앙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고 이 하나님의 통치에 대하여 제대로 항복하신다면, 여러분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현실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습니다. 짐이 가벼워져서가 아니라, 억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신앙을 사십시요!
이것이 예수가 오신 이유요,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삼으신 이유입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의 신앙고백이 갖는 예수 한분 안에만 있는 하나님의 은혜, 용서, 사랑, 기다려주심, 자비, 긍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의 삶과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 사회, 시대, 국가, 민족앞에서 예수가 누구인가를 증언하는 우리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고통이나 해결하려는 싼 것으로 우리의 귀한 것을 넘기지 말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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