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 (26)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9. 5. 07:39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산상수훈의 마지막 결론 부분이 되었습니다.

굉장히 큰 경고로 결론을 짓고 있습니다.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그리고 이 경고를 이해시키기 위해서 모래 위에 지은 집과 반석 위에 지은 집을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을 비교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아시죠?
집이 어디에 세워졌느냐를 비교하고 있습니다.
홍수가 났을 때 무너지는 집은 집을 잘못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기초가 부실한 데, 모래위에 지었기 때문이고 홍수와 창수를 견디는 집은 지금 반석 위에 있기 때문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대표된 인간의 의와 예수 안에서 드러난 하나니의 의의 차이가 무엇이냐 할 때, 내용을 떠나서 가장 기본적으로 본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기초이냐? 라고 묻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논할 때도 우리는 지난 주에 생각해 본 바와 같이,
그것이 옳다는 말 자체에 대한 이해가 우리 인간이 가지는 이해와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가 전적으로 다르다는 걸 보았습니다.
그 옳음이 자랑하는 옳음이 아니고, 용서하는 옳음이었던 것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 의를 만들어 내는 것은 예수로만 가능하다' 이게 이제 결론이죠.
예수 없이는 다른 어느 곳에다 집을 지어도 그것은 헛되다, 그것은 가치없다,
왜 그러냐?  왜 예수 위에만 있어야 되느냐? 는 문제는 우리에게  사실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또 잠깐 지나칠 수 있는, 늘 우리의 실수를 유발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집을 잘 지으면 됐지, 이게 우리한테는 늘 쫓아 다니는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집을 잘 지으면 됐지!,,,
여기에 비유에 기초들, 반석과 모래는 사실은 이 비유가 하고싶은 '예수만이 반석이다'하는 얘기를 여기는 충분히 드러낼 틈은 없습니다 
지금은 대조를 위하여 동원한 비유이기 때문에 이 비유의 내용을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 요한복음 15장으로 갑니다.

 

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2    무릇 내게 붙어 있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그것을 제거해 버리시고 무릇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열매를 맺게 하려 하여 그것을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입니다.


이 포도나무와 가지 비유는 붙어 있을 것이냐 말 것이냐는 문제가 아니라, 너무나 자명한 이 내용,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이건 너무나 자명한 원리입니다.
나무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고 어떻게 나무가지에 나무가지된 다른 대안을 찾거나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있습니까.
오늘 마태복음 7장에서 본 반석 위에 지을 것이냐, 모래위에 지을 것이냐는 우리가 사람이 자기 의로 갈 것이냐,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쫓을 것이냐, 가 대조되는 부분이었지만,
그것은 사실 어찌보면 사실은 가지인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께 붙어있지 않고서 어떻게 생명과 진리를 공급받을 수 있단 말이냐, 라는 것으로 요한복음 15장에 설명되어 있는 것이죠.


이 문제는 사실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말하는 것이죠.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것은 곧 마릅니다.

근데 딴 데가서 다른 대안을 찾고 다른 길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죠.
이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의가 우리에게 자연인이 가지는 의와 무엇이 다르냐? 라고 얘기하자면 바로 이것,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제대로 된 인간 노릇을, 혹은 인간 본연의 존재가 될 수 없다,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것을 어떤 도덕성으로나 종교성으로나 대조하기 이전에 존재론적 그렇다는 말이죠.
그래서 이 문제는 아주 재미있게도 8절 가시면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해서 이것이 묘하게 계명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창조주되심과 하나님의 보호자되심과 복주심에 붙어 있어야된다는 것은 무슨 다른 선택이 없는 유일한 우리라는 피조물의 존재의 길이며, 생명이며, 유일한 가치며, 목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왜 계명으로까지 확대되느냐?  이렇게 성경은 가르칩니다. 로마서 6장이죠.
무엇때문이냐?
로마서 6장 6절에 보시면 

 

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
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9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10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연합의 교리'라고 합니다.
기독교인들의 구원, 믿음은 말하자면 옳고 그름에 대한 선택, 사망과 생명에서의 선택, 또는 그가 선택한 것에 대한 충성, 훈련, 이런 것보다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다 그 아들안에 감싸 안았다라고 가르치는 셈입니다.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홍수가 이 세상을 덮었을 때, 방주 안에 있는 자들이 사는 것같이 기독교의 구원은 하나님이 예수를 보내사, 자기 뜻을 따르고 죄 아래 있던 자들을 영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을 영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안에 품음으로써 사망을 벗어나 생명으로 우리를 승리하게 하셨다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안에 들어감으로써 예수의 죽음에서 예수와 함께 죽어 우리를 붙잡고 있던 사망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죄에 대하여 죽습니다.
그기서 죽는다는 건 관계가 끊어집니다. 그러고 예수의 부활에 함께 동참하여 살아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회복이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악에 살 때, 죄가 요구하는 것들로 다스려지고 죄가 내용이었던 자가 이제 하나님과 회복되어 하나님의 통치의 보호를 받고 인도함 받고 그 통치자의 성품으로 우리의 내용이 인격과 성품과 모든 것이 바뀌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예수 안에서. '예수 안에서' 이 연합의 교리는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이 어디에 있느냐? 예수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이 아니고, (아! 이거 또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예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비행기 타고 갈 때, 고소 공포증을 느낄지라도 여러분이 비행기 밑으로 떨어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기차를 타고 갈 때, 뒤짚어 앉아 계셔도 가는 반대편으로 앉아 계셔도 기차가 여러분을 목적지로 끌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기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모든 근거와 이유와 방법과 운명은 예수에 달려있는 겁니다.
우리가 그에게 묶여 있습니다.


오늘 대조는 그겁니다.
반석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가 되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처음부터 끝까지 가장 중요한 근거 핵심 수단 운명이 예수를 놓고는 있을 수 없다는데 그 촛점이 있습니다.
그 우리가 아까부터 본문에서 봤다시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라고 나열되어 있는 것은 다 이것하고 대등한 근거가 될 수 없다 이겁니다.
집을 지었습니다는 아무런 대조가 없다니까요!!
어디다 지었느냐에 있다고요!!
반석 위에 지었느냐, 모래 위에 지었느야가 운명을 가르듯이, 예수 안에 있느냐, 예수로 말미암느냐, 예수가 내용이냐라고 묻고 있는 겁니다.
이 연합의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늘 흔들리고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본 바와같이 주의 이름을 불러 '자기의'로 갈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 조금 더 찾아가 보면 확실해지죠.
에베소서 4장 13절입니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 안에서 자라자또는 참된 생활을 하여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습니다.
유기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머리의 어떠함이 그 몸의 어떠함을 결정하며 요구합니다.
그 유기적 관계를 충분히 이해하시죠?
그 둘이 분리되면 둘이 다 죽습니다. 그리고 붙어 있는 한 둘이 유기적으로 요구하며 함께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주도권은 머리가 갖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자는 예외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름을 받는데,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인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고,
그 하나된 존재로써의 그리스도인의 내용과 완성에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이 얘기입니다.
예수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집을 짓는 이 문제가 다만 집을 짓는 문제가 아니라, 오늘 본 요한복음의 포도나무와 비교를 하면,
이 기초가 이 기초 위에 지었다, 저 기초 위에 지었다라는 구별보다 깊이 그 기초가 건물을 만든다는 것을 이해하시게 됩니다.
그 기초는 포도나무입니다.
우리는 거기에 붙은 가지로써 건물인 것입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그 중요성을?
도무지 감동이 없는 눈빛이 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성경이 그러니까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마치 그 십자가를 짐으로써 구원 문제를 해결하여 이제 믿는자는 그 은혜를 얻을 수 있는 정도로 기독교 신앙을,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약화시킨데 아마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같은 에베소서 1장 17절 이하의 얘기를 봅시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20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21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이게 하고싶은 말이 뭔지 세가지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기를 원한다!
너희를 부른 하나님이 너희를 어디로 데려 가려고 하는지 알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하여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은 어떤 능력을 동원하고 있는지 알기를 원한다!
그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이냐하면 그의 아들을 보내어 너희를 그와 묶어 너희를 죄와 사망에서 끌어냈고 너희를 완성하기 위하여 교회에 머리로 주셨느니라. 너희와 당신이 하나가 되도록 묶어버리셨느니라. 그래서 너희는 무엇이냐하면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그러니까 우리의 충만은 우리와 당신을 묶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함 때문에 충만할 수 밖에 없는데, 왜 충만할 수 밖에 없느냐하면, 나와 당신을 묶고 우리라는 존재를 당신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으로 이끄실 모든 내용이 그 분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흘러 넘어와 우리에게 채워져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으로 보여준 데로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하고 영광된 존재로 만드는 일을 예수 안에서 이루실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반석, 포도나무는 중요하죠.
그러니까 거기에서 얘기하는 계명을 지키라는, 이 통치자의 인도와 요구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 순종은! 그 순종은 무슨 우리의 보통 얘기하는 의지와 결단의 문제보다 사실은 차원이 좀 다르습니다.
밥 먹어라! 그 얘기죠.
'밥 먹어라' 그걸 결정해야 되고 선택해야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아, 물론 안 먹겠다고 선택할 수도 있겠죠)
그러니까 그 문제는 반석과 모래를 비교할 때, 둘을 대조하기 위하여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마치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여지는 것과 달리,
포도나무 비유에서는 붙어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분리되면 그것이 사망인 것같이,
'부모가 자식에게 밥 먹어라' 그러는데 '먹을까? 말까?'를 망설인다는 건 생각해서는 안되는 부분이고, 먹는 것이 선택이고 안 먹는 것도 선택이다 라는 그런 만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독교 신앙을 모르는 자에게 있어서야, 이것이 선택의 문제로 보여질 수 있겠지만, 신앙인에 있어서는 이것이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이 순종, 계명을 지키라는 명령법들이 등장하는 것은 그것 자체가 복인 것입니다!!!
밥 먹어라! 밥 먹어라!
젓가락질 할 때 소리내지 마라, 그것은 참 고급한데로 부름을 받는 것입니다.
난 내 자유를 마음껏 사용을 해서 내 젓가락 한번씩 공중에 던졌다 받아서 먹을꺼야, 이게 뭐 서커스에서야 하는,,,
성경의 명령법을 이해하셔야 됩니다. 그게 무슨 말인지,
우리가 도대체 이런 요구들을 왜 받는지,,,너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은혜와 진리와 생명과 영광과 거룩으로 지금 지금 채워지고 있는 존재란다!!! 이런 뜻입니다.
같은 에베소서 3장 14절에 가면 이런 기도가 나옵니다.

 

14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16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17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거 충만을 논하죠. 선택을 논하는 게 아니라, 충만을 논하는 겁니다.
마음껏 먹고 커라를 얘기하지, 무슨 어떤 지식적이고 의지적이고 소위 말하는 자유 뭐 이런 얘기들 안합니다.
그 보다 훨씬 훨씬 더 근원적인 얘기를 훨씬 중요한 얘기를 다루고 있죠.
하나님의 하나님되신 충족성과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근거로 한 하나님 아버지와 그 사랑과 은혜와 복 주시려는 말씀 앞에 선 자녀로써, 이것이 전제되어 있다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는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죠.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 나가는 것을 위하여 성경은 우리에게 명령법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이죠.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이게 뭘까요?
이것이 늘 우리의 구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든지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확인하고 있는데,
요한복음 15장 7절이 바로 그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다시 돌아가 보시죠.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를 계명이라고 명하시고,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라고 또 명하시며, 그것이 당신안에 거하는 법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거하는 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연합 속에서 7절에 있는 바와같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가 성립된다고 합니다. 또 16절에 보면

16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라는 약속도 주어집니다.
조금 전에 본 에베소서 3장 20절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무엇이든지는 '반석이 제외된 무엇이든지'가 되고, 그 무엇이든지는 '나무에서 분리되어 나가는 것같까지 포함한 무엇이든지'로  이해됩니다.
내 안에 거하면,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얼마든지 얼마든지, 풍성무쌍하게 ,,, 그게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죠.
너희가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면 얼마든지 몇십층이든지 몇평이든지 그 약속속에 있다는 제한을,,, (우리로써는 제한이락 얘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죄성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오늘 우리가 본 본문에 나오는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것은 본질상 기독교 신앙을 점검하는 기준에 없는 것들이다, 이런 얘기입니다.
얼마나 능력있냐, 업적이 있느냐, 하는 것들은 사실은 그런 기독교 신앙을 점검하는 첫번째 잣대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안에서 예수를 닮아 가는 겁니다. 우리 아까 이미 본 겁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이하에 있었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자라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화되는 내용입니다.
골로새서 1장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또는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권하고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완전한 자로 세우는 것입니다.
이것이 계명화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어를 배울 때 제일 많이 했던 것인데, 영어 실력이 느는 방법은 찌껄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길을 가다가 미국사람만 만나면 붙잡고 한마디라고 해보는 것이 느는 법입니다.
이것이 계명으로 주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주는 것들이 내 혈관을 흐르고 내 근육이 되고 내 세포가 되어야하는 이유 때문에 그 계명으로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계명이 이렇게 드러났던 걸 압니다.
사랑이란 뭐냐! 사랑은 천사의 말을 하는 것도 아니었고, 산을 옮기는 능력도 아니었고 자기를 불사르게 내어주는 열정과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가장 첫 어귀에 이것부터 시작했죠. 오래 참는 것이었습니다. 상대방의 꼴을 보아주는 것이었습니다. 그죠?
계명은 그렇게 오는 것이었습니다.
'너 정직해라' 그것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이루는 하나의 단계들 입니다.
그걸 했다 안했다의 중요성이 아니라, 그걸 하면 그만큼 예수의 의로 채워져 갈 것입니다.
사랑이, 사랑이 오래 참고 성내지 않고 무례이 행치 않고 악한 것을 생각치 않고 참고 믿고 바라고 견디는 것으로 진전되어 사랑이 무르익고 완성되어 가듯이,
계명이란 우리에게 했다 안했다라는 잣대로써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 것으로 만드는 실제적인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에 명령법으로 주어집니다.
우리는 그래서 정직히 살고, 온유하며 용서하며 이웃을 미워하지 않으며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들을 성경의 요구를 따라 훈련합니다.
그리하여 나는 여기까지 왔다가 아니라, 그리하여 우리는 그 일을 행함으로써 비로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참여함을 배웁니다.
어떻게요?
원수를 사랑할 방법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할 실력은 없습니다.
그 요구하는 명령법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의 갈등이 무엇을 찾아내느냐하면, 그 요구를 하신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요구하신 일을 이미 나에게 했다는 사실과 만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명령법은 힘을 발하죠. '나는 용서했다'라고 자랑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이 용서는 하나님의 것이다.

이 용서는 얼마나 큰가! 벌을 주고 정죄하는 것보다 용서가 얼마나 더 큰 힘이요, 큰 의인가를 스스로에게서  발견하죠.
절망과 자폭과 자괴 속에서 발견을 하죠. 예수가 누군가.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 나를 용서하고 축복하고 사랑하여 아버지가 되시려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 계명을 실천하려고 할 때마다 반석 위에 짓는 집입니다.
만약 이 일을 모른다면 기독교 신앙은 오직 순종과 실천이라는 의지와 실천의 싸움에 불과해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해 보십시요. 명령을 따라 해 보십시요.
여러분은 비로소 예수가 누구신지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알게 되십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 그의 의롭고 자비하심에 부름받은 여러분이라는 것을 기억하시는, 그리하여 예수 그르시도를 믿는 자라는 말이 갖는 진정한 인생과 존재가 되는 복된 신자의 길을 걷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입니다. 거기에만 진정한 인간의 승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이 있습니다. 그기에 용서와 감격과 화해와 정의와 평화가 있습니다.
이 놀라운 길로 부름을 받았으니 나와 내 인생을 통하여 내 영혼과 내 이웃과 세상앞에 과연 과연 빛과 소금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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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설교 녹취록 이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