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 (27) (종결편)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9. 8. 07:50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예수님께서 이 산상설교를 마치자, 그 들은 무리들이 참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참 놀랍다, 서기관들의 가르침과 다르다, 권위가 있다' 그렇게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여기에 이 산상설교의 가장 중요한 주제인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 예수 안에서 허락된 하나님의 의에 중요한 본질이 비교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대표적인 본질을 은혜와 사랑이라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은혜와 사랑이 바리새인의 의와 비교될 때, 자칫 도덕과 법과 대척점에 있는 것같이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의 중요한 결함은 그 도덕성과 법에 문제가 아니고 그 정신과 그 내용을 성취할 수 없는데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지적이 같은 마태복음 23장 1절 이하에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1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라고 말합니다.
지적의 핵심이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말만하고 행하지 않는다' 라는 것이 '알고 있지만 실천은 없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본인들이 이룰 수가 없다' 그런 뜻입니다.
도덕이나 법이나 궁극적인 목적은 성경이 얘기하는 바와같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입니다.
그것이 적극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속에서 경험하듯이 도덕이나 법이나 굉장히 부정적이고 소극적으로 밖에는 사용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최소한의 사회질서를 위하여 강제력을 가지고 요구됩니다.
도덕을 원할지라도 그것이 명분으로는 모두의 공감을 받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왜 불가능하느냐하면, 적극적으로 그 가치를 자신과 남에게 나눌만큼의 실력이 죄인된 인간에서는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의 치명적 결함이 무엇이냐할 때 무엇이 옳은지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옳은 것을 행사할 때 그 옳음의 행사가 자신을 기만하거나 위장할 수 밖에 없으며,

또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정죄하는 것으로 밖에 그 도덕과 법을 사용할 다른 실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우리 현실속에서 쉽게 이 사실을 목도하는데, 우리가 어느 곳에서나 최소한의 질서를 위하여 법을 얘기하고 도덕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내에서도 질서를 위하여 최소한의 윤리가 요구됩니다.
은혜를 얘기하고 사랑을 얘기한다고 해서 도덕과 법과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법에 생명과 내용과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예수밖에 없다. 그런 뜻으로써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대조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그 가진 명분과 가치를 인정한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들먹일 때마다 그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으로,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으로 가지 못하는 부분을 간과합니다.
우리가 어느 곳에서나 저지르는 실수이죠.
최소한의 어떤 질서가 필요할 때, 어떤 수준이 필요할 때, 우리가 윤리를 얘기하는 것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보십시요.
"당신 왜그래? 그 말도 안되는 짓을 왜 해?" 라고 얘기함으로써 나는 그것을 마치 지키고 있는 자같고 상대방은 틀려서 할 수 있는 자와 할 수 없는 자를 나누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자가 할 수 없는 자를 비난하므로써만 자신이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그를 포용하여 자신이 옳음을 증명할 방법은 자연인의 경우에는 없습니다. 어떻게 옳은데 입을 다물고 있단 말입니다?
옳은데 입 다물고 있으면 무식한 자나 방관하는 자가 되는 것 뿐이지, 상대방이 잘못한 것을 웃고 포용할 수 없는 이유는 다른 개선의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지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옳음은 늘 비평할 수 밖에 없습니다.
누구의 잘못을 들추어서만 자기의 옳음이 증거된다는 것은 사실 치사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공부 잘 해갖고 와서
"야 너는 왜 하나 틀렸니?"
"여보 옆집의 누구는 다 틀렸어" 이렇게 얘기하는 건 여러분도 알다시피 치사합니다.
우리 공부 잘하면 (잘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다 이해하는 건데^^) 시험 문제가 쉽게 나오는 것이 싫습니다. 치사하죠.
그러면 이렇게 해 봅시다. 여러분이 부자면 물가가 싼 것이 싫다, 논리상 그렇게 가야 됩니다.
우리의 자기 확인은 참으로 비열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린 누가 틀리면 불편합니다. 그 사람 때문에 일어나는 부작용들이 싫습니다.
그러니까 그를 비난할 뿐만 아니라, 정죄합니다. 뭐라고 정죄합니까? "넌 왜 태어났니?" 이거죠.
본질로 들어가면 그거죠, '넌 왜 태어났니?'
"좋아 내가 한번 양보하마, 너 태어난 것 내가 인정하겠는데, 너 이민가라" 아 이거죠.
우린 몰아 냅니다. 그것 밖에는 우리는 도덕을 법을 사용할 줄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하고 싶은 얘기는 뭐냐하면,  예수 안에서 들어난 하나님의 의는 이 옳고 그른 자격 논쟁이나 유용성에 관한 능력문제와 다른, 다른 본질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그것이 복음의 가장 중요한 본질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로마서 1장 입니다. 16절에 오시면 복음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은 일단 능력으로 소개됩니다.
왜냐하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설명된 대표된 이 인간의 의는, 하나님 없이 인간이 만들어내는 의는, 옳은 것을 혹 알 수는 있으나, 옳은 것을 행할 능력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죄인인 까닭입니다. 죄 아래 붙잡혀 있습니다. 선택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일차적으로 은혜와 사랑으로 강조하는 것은, 죄의 반대말이 은혜이고 사랑인 탓입니다.
죄 자체와 그냥 이해를 위해서 반대되는 단어를 고르라면 선이나 의가 맞죠.
그러나 죄의 반대말을 은혜나 사랑으로 놓는 이유는 죄가 하나의 규칙이거나 내용일 뿐만 아니라, 세력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하나의 세력으로 우리를 붙잡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를 행할려면 참다운 의인이 되려면,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첫번째 조건이 되어야만 합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때문에 은혜가 그 반대편에 섭니다. 왜 은혜의 반대편에 설 수 밖에 없느냐하면 죄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구원을 위하여 왜 은혜가 필요하냐? 죄를 벗어날 실력과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와서 구해줘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의 은혜, 누구의 용서, 누구의 해방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죄의 반대말을 은혜라고 얘기하는 여기에는 도덕이 필요없다, 혼란과 무질서가 상관없다, 싸우지 말자,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진정한 도덕을 지키려면, 진정한 법을 지키려면 그 내용을 제대로 실천하려면 우리는 은혜부터 받아야 된다, 예수 안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이 얘기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조금 전에 읽은 로마서 1절 16절에 능력이라는 표현과 17절에 나오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산다'라는 그 설명은 결국 한 인간이 가지는 의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우리의 실력과 우리의 범위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있는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한 것으로만 사랑이 가능하다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말하자면 기독교 신앙의 자랑이 있는 것입니다.
왜 예수를 믿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내는 가치, 의미, 승리보다 큰 비교할 수 없는 창조주의 속성과 성품과 능력과 거룩함으로의 부름이 그기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심에 있어 당신의 의를 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옳바른 내용과 옳바른 규범을 가지고도 결국엔 이루어낼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내용을 사랑으로 대조시키고 사랑으로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것이 요한복음 15장 입니다.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랍니다.
그것이 여기에도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계명'이란 어떤 이상, 규칙, 개념이 의의 조건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나의 계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자의 속성과 성품의 능력이 강조되고 있는 것이지,  무인격적인 개념이 강조되고 있지 않고, 어떤 규칙과 규율로써  법으로써 우리의 의에 조건에 있지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내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내가 예수 안에 있는 방법입니다.
그에 따르고 그의 통치에 나를 순종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요구는 굴종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힘으로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하는 것이 13절에 나오듯이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14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라고 얘기합니다.
이 계명의 요구는 하나님과 우리간에 권력자와 복종자라는 구별을 낳는 요구가 아니고, 친구의 관계이기 때문에 요구하는 사랑의 요구랍니다. 친구란 그렇죠? 친구란 대등한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친구이기 때문에 요구한다고 합니다. 사랑은.
이 사랑으로 요구하는 대등함, 이라는 것은 참으로 놀랍죠!
왜냐하면 사랑의 반대말은 여러분 알듯이 증오가 아닙니다. 외면도 아닙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아마 동정이거나 굴종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의 중요한 요소가 대등한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안에서 우리를 찾아오사 우리에게 허락하시려는 의,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다른데, 우리가 여태껏 살펴본 바와 같이 법과 윤리가 우리는 자기 증명을 위하여 누구를 해치려는 것으로밖에 쓸 능력이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예수 안에서 상대방을 존중하며 가치있게 만드는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데 법과 도덕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더 큰 이유로 오신다는 거죠.
도덕이란 최소한의 가치가 있어야되고 법이란 최소한의 조건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옳고 그런 조건을 묻는다든가 가치가 있다 없다에조건을 묻는 것이 법과 도덕입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시는 것은 그 자격과 가치보다 큰 다른 조건을 갖고 오시는데 그 조건은 뭐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격과 가치로는 받을 수 없는 어떤 복을, 어떤 영광을, 또는 어떤 명예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기로 했답니다.
그 조건과 이유가 뭔가 봤더니 그것은 법적 조건과 도덕의 조건보다 훨씬 큰, 그것으로는 관계할 수 없는 관계로써만 성립하는 조건으로써 하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그런 관계 대상으로써 대접하시더라는 겁니다.
여기에 말하자면 당시 무리들이 반항한 이 가르침은 다르다, 예수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다라고 반항하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성경에 사실은 성경 전체에 드러나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시는 깊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요구하시고 또 우리에게 당신을 알리시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핵심되는 내용인데, 우리가 늘 간과하고 있죠.
출애굽기 32장 30절에 가시면, 당시 역사적 배경은 이렇습니다.
애굽을 탈출하여 하나님이 기적 속에서 해방되어 이제 시내산에 이르렀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간 동안 기다리던 백성들이 금송아지 만들어서 범죄했던 그 당시입니다.

 

30    이튿날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큰 죄를 범하였도다 내가 이제 여호와께로 올라가노니 혹 너희를 위하여 속죄가 될까 하노라 하고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그리하여 용서를 받아냅니다.
모세의 기도의 핵심이 뭔가요?  하나님, 원래 이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저들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약속하셨을 때 자격과 가치를 보고 하시지 아니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이 때의 사랑을 서두에 얘기한 것 같이 도덕과 대척점에 놓지 마시란 말입니다.
도덕을 도덕되게 하고 법을 법되게 하는 진정한 본질이요 생명입니다.
사랑이 빠지면 도덕과 법은 사람 잡는 것외엔 아무런 기능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얘기를 하는 거죠.
하나님! 만일 이 백성을 버리실려면 저도 버리십시요. 저도 하나님 마음에 들 자격을 만들 실력은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 아니십니다. 하나님 그렇게 응답하십니다.
구약에만 있느냐? 신약에도 있습니다.
로마서 9장을 보십시다. 바울도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다 보니까 제가 생각했던 모세나 바울보다 생각보다 실력이 있더라구요.
여러분들도 거기에 초대받으십시요.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뭘 원하는 거냐하면 바울은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죠.
그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가 나중에 회심하고 이제 복음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뜻밖에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되어서 이방에 다니면서 여러 교회를 세우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마음에 늘 자기 동족 자기 민족이 예수를 믿지 않는 일에 대하여 마음이 아픕니다.
이 고백을 합니다.
'내 혈육 내 골육과 친척을 구원받게하기 위하여라면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져도 좋다'
여러분 그런 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구원받아 천국가기 바쁜 우리에게 나 지옥가도 좋다, 대신에 내 가족 구원시켜달라' 이렇게 기도하는 꼴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나타난 것 아닌가요?
'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아버지여 나를 사망에 내려보내 주시옵소서!'
그게 성육신과 십자가 아닌가요?
하나님은 기꺼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의 자리에 당신을 낮추어 찾아오셔서 사망의 자리까지, 우리가 있는 그 자리에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오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죠.
도덕과 윤리에 대하여 또는 법에 대하여 우리가 은혜가 우선한다, 사랑이 모든 것이다라고 얘기하는 이유를 이해하셔야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당연히 도덕성을 가집니다. 
당연히 법보다 더 큰 기준과 책임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우리가 의로워지고 우리가 책임을 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신앙부터 가지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 먼저 이듯이, 도덕과 법을 먼저 알고 나중에 은혜를 아는 순서를 가진다는 걸 기억하여 이 은혜가 진정한 결실을 하며, 모든 각자의 영혼과 영혼의 생명으로 그 결실하는 것을 기다리는 사랑을 가져야 됩니다.

산상설교 내내 신자의 신앙의 본질을 이것으로 설명했습니다.
이해와 용서라고. 이해와 용서라는 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 실력으로 윤리적일 수 없고 법을 지킬 수 없는 그 현실을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여 우리 모두가 동일한 형편 속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역사와 간섭을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의 중요한 중요한 실천적 이해는 신앙인으로써의 자기 실천과 이웃에 대한 이해가 보다 너그러워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웃어야 합니다.
어느 때 사람이 시퍼러 둥둥해지는 가 보십시요.
옳을 때 그렇습니다.
어떻게 옳을 때? 틀린 사람 잡아서 옳은 것을 확보할 때, 그 때 시퍼러 둥둥해져서 20세기에 제일 많이 자행된 세계 역사의 현실이 뭐냐?

지나간 20세기에 무슨 역사적 우리가 현실을 경험했느냐?
이념투쟁 때, 사람은 가장 인간성을 상실하더라를 배웠습니다.
옳은 사회 만들자! 옳은 세상 만들자! 그럴 때, 그게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그 때 제일 많이 사람을 죽였습니다.
지금도 여러분 한국사회도 이념투쟁이 있는데, 이 이념을 탓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이념투쟁을 하면 사람이 친척도 못알아보고 부모자식과도 연을 끊고 울어야할 때도 안울고 절대 웃지않는 사람이 됩니다.
이념에 사로잡혀서 인간성이 말살이 됩니다.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신앙도 잘못가면 이 결사각오가 순교가 시퍼러 둥둥을 만듭니다. 멋대가리없는 인간을 만듭니다.
시도 때도 없이 고함지르고 눈감고 혼자 우는 이상한 괴물을 만듭니다.
웃어야 됩니다. 웃는다는 건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도 이렇게 하면 안되는데, 또 너무 히죽히죽 웃으면서 하면 진정성이 떨어지지 않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요.
신앙이 좋다는 건, 지금 그의 실력이 없는 것을 넘어가 주는 겁니다.
손들고 막 옳은 소리하면 씩 웃는거죠.
'목소리 좋구만! 아, 알았어' 이렇게 어른 노릇을 하십시요.
하나님이 그의 생애 속에서 그를 만들어 오고 다듬어 오고 제대로 된 실력과 생명과 참다운 승리를 주신다는 것을 기다려 주십시요.
들어주셔야죠.서로 언성을 높이고 얼굴 시뻘거지는 것은 기독교 신앙 실천에는 없습니다.
'너 두고 봐 너 지옥가' 이 말은 안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입니다.
다만 옳으면 다가 아닌 것 기억하십시요.
내가 사람을 잡고 있나? 내가 참다운 인간성을 신앙으로 누리고 있는가를 확인하시는 여러분의 신앙과 신자된 현실이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 믿는 것이 기뻐야 합니다. 넉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린 조급하고 분내고 억울해 합니다. 우린 아직도 성육신을 십자가를 조금 밖에 이해하지 못합니다.
주께서 우릴 사랑하신다하며 내 계명을 지키라 초청하사 내 사랑안에 거하라 하십니다.
내 기쁨을 너희에게 준다 하십니다. 그 기쁨 주시옵소서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에 인격과 성품과 삶을 알게하사, 우리 인생의 기적을 알게 하옵소서. 그 신비를 누리게 하옵소서.
우리를 만나는 이들과 내가 사는 세상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는 줄 우리 이웃들로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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