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 (24)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8. 22. 07:36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우린 지난 주에 앞절인 12절에 있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남을 대접하라 하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써 가치있으려면, 진정한 존귀함을 소유하려면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가 그가 지은 또 사랑하는 자녀로써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의 필요를 공급받을 때만 우리는 우리 이웃을 약탈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필요를 우리의 이웃에게서 빼앗아 올 필요가 없고, 우리는 비로소 내가 하나님 안에서 충분하다는 것과  내 이웃도 내가 무엇을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 백성으로만 충분할 수 있다는 걸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랬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인간의 인간된 자리이고 서로간에 대접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자리라 했습니다.
이럴 때에만 우리는 이웃과 비로소 전쟁을 종식하게 됩니다. 
우리는 화해할 수 있고 우리는 우리 이웃이 두렵지않고 증오할 필요없고 경쟁할 필요없고 싸울 필요가 업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이웃과 화해가 이루어지고 평화가 온다는데 핵심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 평화와 화목은 모두가 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여 하나님의 의로 채워질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고 좁은 길로 가야하는 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진정한 이해를 위해 마태복음 19장 16절으로 가 봅니다.

 

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 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8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ㄷ)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출 20:12-16; 신 5:16-20
19    네 부모를 공경하라, ㄹ)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레 19:18
20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자주 오해되는 본문입니다.
그 청년이 재물을 포기할 수 없어서 결국 주를 따르는 길을 실패했다,

그리고 뒤이어 나오는 부자가 하늘나라에 갈 수 없는 비유,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더욱 더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 부를 다 나누어 이웃을 구제해야 된다 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 자체에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이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것보다 훨씬 깊고 다릅니다.
좁은 문으로 가야하는 일, 그것이 좁은 길인 이유를 성경이 마태복음 19장에서 이 비유로 잘 보충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집니다.
우리는 이미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는 질문을 공부하고 지나왔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재물은 그것입니다.
부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주인, 하나님을 대신하는 주인으로써 재물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실상의 실제적인 주인은 나죠.
내가 내 욕심과 내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재물이 신이 되는 것이죠.
그 싸움은 언제나 내가 나의 주인이 될 것이냐,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될 것이냐라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이 길이 좁은 이유는 이 길에는 우리라는 이름으로 걸을 수 있는 여지가 없습니다.
여기는 다 예수 안에 들어가야 됩니다.
이것이 좁은 문이고 좁은 길인 이유는 예수 안에만 들어가야되는 그래서 이 길은 예수님만 서 있는 길로 보이고, 저 넓은 문 넓은 길은 각각 자기 이름으로 존재하는 길입니다.
성경적으로 표현하면  '각각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의 길입니다.
그기에는 다수가 있습니다. 철수도 있고 영희도 있고,,,
철수와 영희를 어떤 의미로써 사용하는지 아시죠? 개나 소나 다 있는 데입니다.

 

여기에는 예수 안에 들어가 있어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예수 안에 있는 것으로만 정체성이 확인되고, 밖으로는 예수만 문이고 예수만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이게 우리한테 어렵죠.
어떤 의미에서 어려우냐하면 지금 이 마태복음 19장에서 보는 이 비유와 같이, 비유가 아니고 이건 실제 일어났던 사건인데,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요구하는 결정은 이겁니다.
재물을 나누어 주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재물을 놓고 나를 따르라 입니다.
이 나를 따르라와 재물을 놔라가 서로 반대되는, 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는 문제로 등장하고 있는 걸 놓치고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이 신앙을 대신하게 됐다 이겁니다.
우리가 불쌍한 자를 돕는다든가 가난한 자를 돕는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이 가지는 큰 기본적인 책임입니다.
이웃을 불쌍히 여겨야 된다는 것 속에 다 들어있는 책임들 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예수를 쫓기위한 선택적 문제인 기본을 벗어나서 이웃을 돕고 봉사를 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으로 대체되어서는 안된다 말입니다.
재물을 놓고 예수를 붙잡는 싸움을 얘기하는 것이지, 재물로 가난을 구제하고 불쌍한 자를 돕는 것이 기독교가 되면,
우리는 다시 돌아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로 갑니다. 
하나님이 유일한 주인으로써 우리의 창조주요 아버지로써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만 채워주실 수 있고, 그래서 갈 수 있는 영광의 자리를 놓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윤리와 도덕적 차원에서의 만족에 머물고 만다 이겁니다.
이걸 경계하시는 거죠.
이건 예수가 필요하냐, 필요치 않느냐라는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이지, 선행을 논하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말입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는 23절 이하 보시면,

 

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이건 부자를 흉보는 것 아닙니다. 부자를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 아닙니다.
그 부가 너희에게 무슨 의미이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 부가 신이고 그 부가 유일한 수단이라면 그러면 너희는 안된다는 거죠.
왜요?
부와 가난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붙들어야 할 것을 부로 대신하고 있다면 그건 안된다는 거죠.
그래서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는 것을, 예수 없이는 구원이 없다는 말 그것을 이렇게 푼 셈이죠. 그래서 뭐라 그래요?

 

25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가난해야 구원을 얻는다가 아니라)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예수를 믿어야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가지기 위해서 표현은 예수입니다. 예수!
윤리, 도덕, 능력, 진심, 이상 어떤 것도 아닌 예수로 부터 출발해야 됩니다.
그러나 우린 아차! 하면 선행으로 출발할 수 있다 이거죠,
그래서 이 문제가 마태복음 16장 21절에서는 이렇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21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24절 유명한 말씀이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합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동시에 예수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아까 비교한 재물과 십자가를 겸하여 섬길 수 없듯이, 자기 부인과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연속현상에 있는 것이라서,
자기를 주장하고 예수를 따를 수는 없는데, 자기 부인은 예수를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해관계를 넘어서 있다든가 개인적인 욕심에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할 때는 이미 주를 따르고 있다고 믿는다는 말이죠.
어휴 갑자기 너무 어려운데로 훅 넘어가죠!?
그러니까 재물을 나누어주는 것이 신앙이 아니듯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그것은 다 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는,

 

지금 산상설교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비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와 대비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의란, 우리가 둘 중에 하나밖에 선택할 수 없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부인은 내가 주인인 것을 거부하고 주를 섬기기 위한 소극적 부정적 우선적 순서일 뿐이지, 부인이 전부는 아닙니다.
재산을 나누어주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바로 그 문제에서 그러니까 내 생각이 진실이다, 내 생각이 옳다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그 문제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에베소서 4장 17절로 가면 이렇게 성경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21    5)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는 일단 이 문제가 이렇게 20절을 기준으로 해서 그 앞에 있는 불신자들과 20절 이후의 신자들의 대조로 이해되고,  그 앞에 불신자들의 생활 양태와 20절 이후에 신자들의 생활의 모습이 굉장히 도덕적으로 비교되고 있다라고 느끼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이 도덕성을 가지는 것 당연한 것입니다.
도덕성을 벗아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도덕서을 비교하자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큰 겁니다.
20절 앞에 있는 17,18, 19절의 핵심은 저들의 부도덕성이 자신이 자기의 주인이기 때문에 썩어져 감과 죽음에서 도망갈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피조물인 각 개인이 자신이 주인이 되어 자기의 필요를 만들고 자신의 욕심과 자기의 소원을 이루는 과정에서 생명과 진리는 만들어 낼 수 없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지적입니다.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저들과 다른데, 예수를 믿어서 도덕성을 가지거나 어떤 가치있는 것을 생산한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는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저들이 20절 앞에 있는 내용들이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서 사망과 부패밖에 만들 수 없다면, 우리는 예수 안에 있음으로써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룩한 것과 생명된 것과 영광된 것을 만들어 내시리라라고 대조를 하면서, 그래서 앞의 얘기가 자기가 주인인, 여기 18절에 보듯이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어서, 감각없고 방탕에 방임되어 더러운 것을 행한다면,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와 붙드심에 따라 새로운 사람이 됐다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으면 도덕적이어야 된다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하여야 한다 입니다.


아 조금 더 갈께요.

우리의 신앙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이 신자의 책임이고 신앙의 내용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순종해야하는 자이기 때문에 거절해야 됩니다.
그게 뭐가 다르냐,,, 내가 훌륭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걸 지킬 도덕성과 영성이 늘고 능력이 생겨서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부도덕한 일을 거부하고 성경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을 받아들여야 됩니다.
이 일에는 마음에 넉넉함과 능력이 생겨서만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해야된다 말입니다.
(아이고 이거 다 걸리셨네,,)
우리가 우리의 신앙에서 무슨 오해가 있느냐하면,

신앙의 성숙이 실력이 생겨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신앙의 실천에 실패를 하면, 나는 왜 신앙이 늘지 않는가라는 문제로 빠져 듭니다.
우리의 신앙 실력이라는 것은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용서하는 문제를 이루어내는 실력으로 크는 게 아니라, 
성경이 '너 이렇게 사나운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고 그래서 참는 걸로 용서의 길로 들어가는 것이라니까요.
이렇게 기독교 신앙의 모든 덕목들과 실천들은 순종이라는 문제로, 예수라는 근거로부터 출발하고 가능해지는 것이지,
여러분 마음에 거룩한 마음과 넘치는 마음이 생기기를 기다렸다간 끝이 없는 것이다, 그 말 입니다.
이게 좁은 길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죽었다가 깨도 내가 이 길에 들어가지지 않는 겁니다. 좁은 문에 끼는 겁니다.
왜요? 우린 아직도 정욕이 있고 탐욕이 있고 더러운 생각이 있고 이기심이 있습니다.
늘 들어가려며는 이게 걸려서 못들어가는 겁니다.
좁은 문! 바늘 귀! 재물을 하나님 대신으로 삼으면 못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순종을 하지 않고, 실력이 크기를 바래서 이 문을 들러가려면 도저히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 길을 들어갈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력을 압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 용서할 수 없고 기다려 줄 수 없는 마음,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들어가는 방법이 있죠. 예수께서 들어가신 길이고 열어놓으신 길인데, 예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겁니다.
마음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하지 마십시요. 그건 훨씬 오래 걸립니다.
하다보면 됩니다.
아 이거 오해하지 마십시요. 위선을 하라는 건가? 이렇게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말만 그렇게 하라는 것 아닙니다.
우린 이미 사랑장에서 사랑이 이렇게 넘쳐나는, 모든 것을 품는 사랑으로 소개되고 있지 않고, 오래 참음으로 부터 시작했다는 걸 압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라은 무례히 행치 않고 사랑은 성내지않고,, 이 세가지에 이미 다 걸리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사랑해서 부부싸움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사랑과 진심을 가지고 믿음의 충고를 하지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얼마나 성질을 부립니까?
내 말대로 하라니까, 그래서 가서 기도해봐 라고 성질을 부인다고요. 안타까워서 안타까워서,,,
답을 줄려고 성질을 부린다고요. 내말 안들을려면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마, 까지 간단 말예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니까요. 성경은 뭐라 그래요?
에베소서 4장 25절 이하를 봐요

 

25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27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
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30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원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31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걸 순종하십시요.
좁은 문, 좁은 길은 우리에게 이 순종을 요구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십시요. 거룩해지고 실력 있으라고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주인이 아니면 여러분이 여러분에게서 만들려고 하는 어떤 과정, 어떤 단계, 어떤 경지에 연연하지 마시고,
성경이 예수 안에서 요구하는  어떤 신앙적 실천들을 따라 하셔야 됩니다.
연습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순종에 관한 싸움입니다.
우리는 불만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우리의 신앙이 이것보다 더 크서 우리가 넉넉히 용서하고 사랑하고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시작하지 않는 답니다.
순종하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에 확 불이 붙지만 좋은 말을 해야되는 겁니다.
"요즘 왜 그렇게 얼굴이 어두워?"
"몰라도 돼"
"나 한테 얘기하면 안될까? 내가 도와주고 싶은데?"
"우리 애가 속을 썩이잖아"
"어떻게 썩이는데?"
"집을 나갔잖아"
"속 상하겠다, 아휴 어떻하면 좋니,,나도 기도해 줄께, 견디다 힘들면 말해, 내가 뭐든지 해 줄께"
그렇게 하라구요.
속으로는 '아유 너 그럴 줄 알았다. 너 신앙생활하는 것 보니까 그거 당하는 거 싸다. 너 그보다 큰 일 당해도 할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거 한국교회가 쭉 이 말 했어요. 옳기 때문에,,, 성경이 그 말 하지 말래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자기는 옳아서 그 말 해요, 편든다고 그 말해요, 그러나 교회만큼 속 털어놓을 수 없는데가 어디 있어요?
모든 충고가 명분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아무 위로가 안된다는 거 아시죠?
제가 제일 곤란하게 생각하는 아주 요새도 지기 힘든 짐이 무엇인지 아세요?
눈물을 흘리며 찾아와서 "목사님 건강하세요. 왜 아프세요?" 성질 부리고 가는데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요.
"누구는 아프고 싶겠어요?"
"진심이예요, 간을 꺼내 줄 수 있어요"
꺼내면 늘 비수만 나오고,,,
우리는 그렇게 밖에, 그게 말하자면 신앙이고 신앙의 진보라고 생각을 해요.
아녜요. 이것 따라 하세요. 웃으시고, 귀 기울이시고, 그 처지에 동참하시고, 편을 드시고, 같이 우시고, 하고 싶은 말 감추시고,,,
우리 언젠가 산상설교에서 그 말했죠?
'예수님이 털깍는 자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도다' 했죠?
입 다물고 죽어 가시죠! 
변명하지 않고, 분내지 않고, 보복하지 않으시고, 그것이 당신이 걸어가야 되는 길인 줄 알고 담담히 걸어 가셨습니다.
물론 웃지 않으셨어요.
그리고 울지도 않으셨어요.
우린 우리가 걸어가야하는 길이 뭔지를 모릅니다.
우린 아직도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을 예수 안에서 주인으로 섬기겠노라 하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아까 에베소서 4장 앞에서 나온 그런 감각없는 자, 방탕에 방임한 자, 성질들 부리는 자로 이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여 확인하는 것, 우리는 그 길을 예수를 놓고 홀로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성경은 이런 이분법을 내놓습니다.
이 굉장히 중요한 이분법인데,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16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어떻게 이분화 하느냐하면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밖에 있는 자로 나눕니다.
우리 쉽게 예수 믿은 자와 믿지 않는 자, 천국가는 자와 지옥가는 자, 이 이분법이 아니라,
자기가 주인인 자와 예수를 주인으로 하는 자로 둘로 나누는데, 이 구별은 예수를 믿는 즉시 주어지는 구별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기엔 말하자면 우리가 가진 것으로 갖고 들어갈 수 있는 것이 그기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갖고 들어갈 수 있다는 건 뭐냐하면, 누구는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가진 어떤 사회적 지위나 혹은 지식 혹은 권력 어떤 것들이 여기에 들어와서 차별적으로 그의 지위와 내용에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와 예수 밖에 있는 자, 예수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자입니다.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순종입니다.
그가 어느만큼 순종하느냐의 문제이지, 그가 얼마만큼 유효하느냐의 문제는 여기 없습니다.
물론 얼마나 자격이 있느냐도 여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문제외에 신자들을 정의할 수 있는 다른 기초도 다른 내용도 없습니다.
우리 각각이라는 존재가 물론 다양하고 다 가치가 있고 그 개성을 인정받아야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는 이 일에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않고 우리의 개성이나 우리의 다양함이 근거를 이루거나 내용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이런 신자된 모습에 대하여 이런 이해를 촉구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입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이해의 맥락 속에서는 신자가 자신을 뭘로 이해하느냐하면, 자기가 예수로 산다는 것입니다.
우린 다 예수인 것입니다.
메시아의 역할로서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백성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다 예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보면 누구나 우리가 예수를 돕는자가 아니라,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속에 있는 자로 우리를 보기 때문에 우리도 자신을 그렇게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를 보면 다 똑같아. 예수쟁이야.
그 예수쟁이는 한국교회에서는 열심이 공통적이었습니다마는 지금 오늘 성경의 가르침대로 하면 이 길에는 아무도 다수가 없고 예수만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우리가 있지, 예수를 벗어나 존재하는 자가 없어서 좁은 문, 좁은 길 찾는 이가 적은 길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그렇게 이해하셔야 됩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누리는 자 그 통치를 순종하는 자로써 자신을 이해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가 신자된 어떤 특권도 어떤 영광도 제대로 누릴 수가 없게 됩니다.
이 길은 획일성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요, 강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를 욕심내는 그 어떤 것보다도 큰 천지를 지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신 당신의 영광과 목적을 이루시는 길로 불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간이 얼마나 영광스러울 수 있는가, 인간이 얼마나 멋지고 놀랍고 감사할 수 있는가를 이 길을 따라서 여러분들이 예수 안에서 직접 누리시는 오늘의 말씀이며 여러분들의 신앙고백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그 자녀로 사는 복을 그리고 그 중요한 구분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확인했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가진 의, 죽고 죽이는 의가 아닌, 살고 살리는 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통치에 영광과 승리를 누리는 일, 믿음으로 지켜내게 하옵소서. 우리의 인생에 펼져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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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포교회 박영선 목사  주일설교 녹취록 이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