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산상수훈

산상수훈 (21) / 박영선 목사

새벽지기1 2016. 8. 12. 22:57


1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2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3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5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우리는 지난 주부터 오늘 본문에 있는 마태복음 7장 1절에서 5절에 있는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비판을 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부정적이거나 쓸모없다는 뜻을 말하는 것아닙니다.
사람은 논리성이 있어야되고 합리적이어야하며 이해하고 설명되어야합니다.
지성이 필요하며 무슨 일을 납득하기 위한 토론과 비평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한 내용은 그런 차원의 비평을 비판하는 게 아니고, 그 비판이 가지는 어떤 정죄감, 심판성 같은 것을 경계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정죄하며 심판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이냐라고 얘기할 때, 비평을 함으로써 마치 자기가 어떤 흠을 잡아내고 잘못된 것을 찾아낼 수 있는 그 수준 그 안목이  내용이라고 오해하지마라 하는 것이 지난 주 내용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말하자면, 예전에 처칠이 어떤 미술대회에 심사위원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누가 '아니 처칠이 무슨 그림을 안다고 미술대회에 심사위원을 하느냐' 그러자,

우리 잘 아는 처칠의 능수능란한 답변이 나왔죠.

'나는 달걀을 낳지 못한다, 그러나 그 달걀이 골았는지는 내가 안다' 하는 답을 남겼습니다.

그 맞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고 싶은 얘기는 처칠이 당했던 것을 약간 다른 관점에서 보아서 '달걀을 낳는 사람이 되라' 라는 관점에서 골았는지, 골지 않았는지 안다고 해서 달갈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게 첫번째 주님의 경고였습니다.
오늘 하나 더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이 비판을 하는 근거와 목적이 무엇이냐, 하는 측면에 관한 것인데, 이것도 우리 모두의 신앙을 점검하고 또 특별히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 나가는데 있어서 아주 필요한 가르침이기 때문에 오늘은 완전주의적 비판을 잠깐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 이하에 가시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2)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헬, 충만의 신장의 분량이)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기 있는 내용을 보시면, '완성으로 가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 있는 일이라'하는 말씀과 그 완성으로 가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되는 내용이 사랑이라, 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이 무슨 얘기냐하면 오늘 마태복음 7장의 비판하지 말라는 가르침과 연결해서 이런 말씀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어떤 완제품과는 다르다 그런 것입니다.
생산된 제품과 다르다는 것은 모든 제품은 만들어졌을 때 완벽해야 됩니다.
그 용도와 그 기능에 있어서 완벽해야 됩니다.
거기에 부족함이 있으면 그것은 불량품이죠. 고치거나 폐기처분해야 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완제품으로 어떤 물건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라나는 것이랍니다.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죠. 낳고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보면 알다시피 어린아이의 부족은 어디에 결함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어려서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비평이 완제품을 근거로 해서 결함을 지적하느냐, 자라난다는 개념을 알고 그 잘못을 파악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됩니다.
제품의 경우에는 불량처리를 하거나 고쳐야 되지만, 이게 자라나는 문제라는 걸 안다면, 우리는 함께 애를 써야 됩니다.
그 문제를 갈라디아서 6장 1장 이하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또는 무거운 짐을)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잘못하거든 범죄하거든 그를 바로 잡아라. 이렇게 나오는데
이 바로 잡는다는 것이 어떤 완제품의 결함을 고치는 문제가 아니라 이런 유기적인 생명체의 회복을 도우라는 뜻입니다.
제가 몇번 예를 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만 한번 더 합시다.
팔이 부러지면 병원에 가서 뼈를 맞추고 기브스를 해서 목에다 한달 이상 매달아 둡니다.
회복되기를 바라죠. 부르졌다고 해서 팔을 잘라 버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물론 의료적인 도움을 받아야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체 회복력입니다.
우선 목에 부러진 팔을 매달고 기다려줘야 되는데 목으로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고가 나지않았을 때도 우리 신체에서 가장 무거운 머리를 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머리가 무거운 이유는 아시다시피 이 안에 돌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러진 팔은 무겁게 기브스를 해서 목에 걸어놓으면 그 불평하지않을 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꺼이 견디는 것은 팔이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짐을 서로 지라'가 있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가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틀린 것을 정죄하고 결함을 고치러오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낳고 기르러 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우리를 낳으시며 우리와 당신을 묶으사 우리를 기르십니다.
그것이 조금전에 봤던 에베소서 4장에 있습니다. 조금있다 다시 돌아가 보겠지만 그런 개념을 갖지 못하면 우리가 자신의 신앙에서나 공동체에서 아주 커다란 판단 실수를 하게 됩니다.
자라나는 문제다, 회복시키는 문제다, 짐을 나누어져야 한다를 모르면,

3절에 지적된대로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라는 말씀에 걸립니다.
우리가 잘잘못을 구별한 실력이 있고 누구의 결함과 부족을 판단할 안목이 있는 것이 실력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한 짐을 지는 실력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그는 실력이 있는 자인 것입니다.
지적하고 판단하고 비평이 실력이 실력이 아니고, 짐을 지는 실력이 실력이란 말이죠. 4절에 보면,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자기 자리를 지키랍니다. 각각 자기 자랑을 이런 식으로 하랍니다. 팔이 부러졌을 때에는 목이라도 튼튼해야 됩니다.
다리가 부러졌으면 팔이라도 튼튼해야 지팡이라도 짚고 다닐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의 자랑이지 그리고 자기 자리이지, 누구의 실수나 부족을 지적하는 것이 자기의 내용이나 자기의 자리가 아니라는 거죠.
팔 부러졌다고 얘기하는 다리가, 다리가 튼튼해야되는 것이 자기 몫이고 자기 자리이고 자기 책임이고 자기 실력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이 비평이 혹은 비판이 자기 자리는 없고 자기 일은 없고 자기 몫은 없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님의 비판하지 말라 라는 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다시 에베소서 4장 15절에 가보시면 이 말씀은 그래서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사랑 안에서 자라자또는 참된 생활을 하여
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이 사랑이 매우 강조되고 있는데 지난 주 설교를 잠깐 되돌아 보시면, 사랑은 감격과 희열 어떤 절정의 문제가 아니라,

그 시작이 있고 그기 도달하는 중간 단계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사랑의 시작은 무엇이 아닌 것에서 부터 시작합니다.
사랑하여 감격과 감동과 기쁨이 있는 것보다 그 입구는 오래 참는 것, 오래 참는 것, 무례이 행치 않는 것, 성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사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안에서 큰다는 것은 가장 중요하게 누군가 상대방에게 내가 할 일을 책임을 묻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할 일을 상대방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것은,

너 때문에 우리 공동체가 힘이 든다든가, 너 때문에 우리나라가 요모양 요꼴이라고 화를 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 자리를 지키는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오래 참는 것이요, 무례이 행치 않는 것입니다. 
한 개인으로나 교회 공동체로나 기독교 신앙의 어려움은 이 완전주의라는 것이 사실은 우리에게 본성적인 하나의 시험거리가 됩니다.


개인으로 생각해 보십시요. 예수를 믿고 감격이 있고 신앙생활을 잘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습니다.
보통 자라는 사람들은 신앙의 소원이 대단히 간단한 것일 때만 잘 됩니다.
이것이 더 커지고 모든 삶의 그 깊이와 크기를 담아 낼려고 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게 성취되지않습니다.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멋있고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부족한 사람들이 은혜를 입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곳입니다.
많이 오해하는 것중에 교회는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신앙 칼라는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이 합의하여 만든 교회가 아니고, 하나님이 세워 부르는 곳입니다.

그래서 그 부름은 어떤 특별한 목적이나 특별한 관심으로 공통분모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부르신다는 은혜의 무한성을 오직 유일한 근거로 가집니다.
그래서 늘 놀라는 것이 '저 사람은 왜 우리 교회에 왔을까' 그 생각을 저도 합니다.ㅎㅎ
'저 사람은 다른 어느 교회에 가면 더 좋을텐데,,,',

옛날엔 그걸 좀 철없이 '저 사람은 왜 봉은사를 가지 않았을까' 이렇게 하곤 했었습니다.ㅎㅎ
이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우리보고 나와 관심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취향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런다고요?
사랑만, 사랑만 신앙을 기르며, 교회 공동체를 지키며, 더욱 중요하게 사랑만이 신앙의 본질이고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목적입니다.
기능이나 어떤 명분이 개인의 신앙과 교회 공동체의 중요한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을 마태복음 5장 43절에서 이미 확인해 본 내용인데, 오늘의 내용과 연결해 보시면 그 뜻을 더 잘알게 됩니다.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가장 중요하게 우리와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로 요구하십니다.
법적인, 윤리적인, 기능적인 이해관계적이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아버지를 닮으라고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왜 원수를 사라해야 되느냐? 우리 아버지가 용서와 관용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왜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기도해야 되느냐? 

45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입니다.
우리가 배워야하는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사랑이고, 사랑으로 가는 그 모든 계단들은 관용과 용서로 되어있습니다.

관용과 용서!
우리가 다루는 이 부분은 이것하고 혼돈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질서가 없거나, 책임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과는 다르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이시고 당연히 우리에게 책임을 묻기도하고 질서를 요구하시며 벌을 내리실 때도 있고, 징계하시는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측면에서 확인할 때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기독교 신앙은 이것이 본질입니다.
여러분 자녀를 길러보시면 다 경험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기르면 자녀를 사라하기 때문에 매도 들고 꾸중도 하고 협박도 하고,,, 그러나 우리가 가끔 놓치는 것 있죠.
이것으로 자녀를 기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예를 든 이 나타나는 세계말고 뒤에 더많은 것이 있습니다.

한숨과 걱정과 눈물입니다. 그걸로 기르는 거죠.

그래서 자녀를 길러 보시면, 자녀가 부모의 사랑과 보호속에서 커는 것만이  부모자식의 관계가 아니라,
자식을 길러서 비로소 부모는 인간같아져 갑니다.
 깊이를 가지고 넓어지고 한없이 용서할 수 있고 한없이 인내할 수 있고 한없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 비판문제에 있어서 우리에게 사실은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우리가 옳고 그른 것을 따지느라고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깊어져야하고 채워져야되는 내용들을 놓치게 된다는 사실에 대한 예수님의 지적, 이것을 놓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몸담고 있는 교회가 완벽하면 서로가 좋습니다.
다 같은 뜻을 가지고 그 뜻이 높고 그 뜻이 분명하고 그 뜻을 실천할 수 있고,,, 그러면 좋습니다. 좋지요.
그러나 그러면 사람은 깊어지지 않습니다.
실력이 있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면서 여러분의 삶의 어려움은 여러분이 준비하고 기대하고 선택하고 좋아하고 감당할 수 있는 것, 그것으로만 현실이 엮어지지 않는다는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상치 않는 것, 준비되어 있지 않는 것, 가장 싫어 하는 것, 끔찍한 것이 우리를 도전합니다.
우린 당황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다 극복해야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은,
비판하지 말라의 가장 큰 핵심은 당하라는 거죠!!!

 

그 문제를 다 해결함으로써 사람이 훌륭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당함으로써 더 깊어질 수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겁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이 수모를 당하시고 고통을 당하시고 억울하게 죽으시는 겁니다.

우리의 인생현실 속에서 우리가 변명할 수 없고 자랑할 수 없고 누구에게 말할 수 없는 일을 당한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비로소,

비로소 우리 속에 비밀을 갖게 하며, 이때 말하는 비밀은 말하자면, 

누구에게 털어놓아 날려버릴 수 없는, 혼자 져야되는 짐을 질 실력이 생기며, 그래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거나,

이해가 안가는 사람을 만났을 때 그가 나와 동일한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갖었을 거라는 걸 비로소 깨우치기 시작하는 관용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솔로몬의 재판에서 이런 중요한 사건을 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고 하나님앞에 지혜를 구하여 크게 칭찬을 받습니다.
그가 어떻게 지혜로운 사람인가가 이 사건으로 드러나죠.
어느 두 여인이 동시에 애를 낳았는데 애를 잘 기르다가 아직 갖난 아이지만, 한 어미가 자다가 애를 깔아 죽였습니다.
얼른 깨어나서 아직 자고 있는 옆에 여인의 애와 자기 애와 바꾸었죠.
그 깨어난 여인이 자기가 안고 있는 애가 죽은 것을 보고 놀라 보니까 자기 애가 아닙니다.
보니까 상대방 여인이 자기 애를 안고 있습니다. '그 애가 내 애라'
그러니까 죽인 여인도 '살아 있는 애가 내 애라'
그래서 솔로몬 왕앞에 왔죠.
솔로몬이 뭏습니다. 누가 진정한 어미이냐? 서로 자기가 맞다는 거죠. '살아있는 애가 내 아이다'
'둘이 다 한 아이를 자기 애라고 하니 둘 다 한 아이를 나누어 줘라' 이게 판결이었죠. 
그러자 생모가 두 손을 들었죠. '아닙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 아이는 저 여인 것입니다. 죽이지 말아 주십시요'

이 지혜의 뜻을 아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런 아버지십니다!

애를 낳기 전에는 이 경지에 아무도 가지 못합니다!
애 엄마가 되지 않고는 애를 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가 범죄자가 되고 자기가 거짓말한 자가 되는 것을 감당해 내지 못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하고싶은 얘기입니다!!!

우리는 비판이 옳고 그른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다.
완전을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성경의 완전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가라는 것이죠.
고린도전서 8장에 아까 우리 갈라디아서6장 3절에서 본바와같이
그래서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생각과 다른 성경에서 지적하는 신앙의 본질에 관한 가르침을 만납니다.

 

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2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3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지식과 사랑은 다르다 그러죠.
지식으로 아는 것은 아직 다 아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이것은 고린도 교회의 당시 현실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은 지성적으로 높은 수준의 사람들이었고,

또 여러가지 성령의 역사, 은사, 성령의 체험을 가진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자신들의 신앙을 자랑했고 대단히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어떤 문제의 이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의 확신과 자랑이 부작용을 낳았냐하면, '우상 제물을 먹을 수 있다' 가 된 겁니다.
간단치 않은 문제입니다.
우상 제물을 먹는 문제는 사도 바울도 괜찮다고 한 문제입니다.
이것도 복잡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은 원래 없는 거니까. 우상은 원래 없는 거니까.
없는 걸 있다고 믿는 것이 사람들이 스스로 속이는 것이지, 있는 데 믿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을 믿음으로써 허구속에 빠져 있는 거니까, 돌이나 나무에 조각상 앞에 뭔 음식같다 놨다가 그다음에 갖다 먹는게 뭔 상관이냐, 이 기독교적 깊은 이해입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 중에는 우상은 원래 없는 거니까 우상 제물 먹는 건 아무상관 없다가 됐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지적은 그겁니다.
그러나 그 이해에 이르지 못한 성도들이 우상 제물을 먹는 걸 보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다른 우상을 섬길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해서, 하나님만 유일한 신이 아니고 여러 신 중에 하나라고 오해하는 일이 생긴다면, 네 지식이 네 지식을 갖지 못한 성도를 시험에 들게 할 것 아니냐.
그건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이란, 믿음의 네 이웃과 또는 믿지 않는 자들일지라도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위하여 자신이 가진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그래서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너 잘났다는 것밖에는 증명할 것이 없다.
사랑은 다른 사람을 끌어 안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칩니다.
여러분의 인생이 고달픈 것은, 기도하여 해결할 문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고달픔은 여러분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많은 것이 있죠.
자기 자신도 있고 자기 가족도 있고 교회도 있고 이 시대도 있고 이 나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조건속에 있더라도 우리가 가만히 보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이루려고 하는 문제,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심으로써 가장 나쁜 환경, 조건, 이웃으로도 만들어 내야하는 것이 같은 것이라면, 우리는 사실 다른 것에 대하여 불평할 필요는 없습니다.
억울함 속에 계시고 고통속에 계십니까?
무엇을 만들어야 되는가 보십시요.
상대방을 고치는 싸움이 아니라, 내가 되는 싸움을 하십시요.
이 팔을 고치는데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짐을 지는 것입니다.
짐을 지는 것입니다.
짐지는 연습, 짐지는 실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것이 사랑으로 가는 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지금 처한 자신의 신앙의 수준이나 여러분이 몸담고 있는 이 시대와 이 사회와 교회 공동체에 대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전하시고 여러분 스스로의 신앙훈련과 순종을 하십시요.
믿음의 싸움을 하십시요.
환경을 바꿔달라고 해서 아무 책임도 지지않는 생각없는 사람이 되겠다는 날강도같은 생각을 털어 버리십시요.
감사함으로 여러분의 인생을 사시고 여러분의 조건을 감내하십시요.

 

기도하십시다.
하나님 아버지 은혜를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우리의 인생에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억울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어떤 조건 어떤 상황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우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는 것과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해야되는 책임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없고, 어떤 손해볼 것도 억울할 것도 없는 현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길을 뒤쫓는 자이며, 그것이 비장함과 무슨 능력의 싸움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싸움이라는 것 기억하여 충성하게 하옵소서. 인내하게 하옵소서. 믿음을 가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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