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 십자가와 구속(2) 제2 장 진위 테스트

새벽지기1 2016. 4. 27. 23:00


제 2 장 진위 테스트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  터 영생을 거두리라" (갈6:8)

 

- 우리에게 있어서 중대한 문제는 성령을 위하여 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이다.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심만을 믿어야 하며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할례를 받아야 하고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참으로 의지해야 할 권위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하여 명백해야 한다. 성경이냐 아니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다른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만일 이 책에 기초하여 의견을 말하지 않는 것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 상관하고 싶지 않다. 참된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히심” 십자가에 대한 우리 주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그의 죽으심이 바로 핵심이요 중심이다. 그 주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받기 때문이다.

 

- 사도는 단순히 십자가를 믿는다고만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기독교 신앙고백을 시험하는 시금석이다. 사도는 십자가에 대해 궁극적으로 두 입장만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거치는 것이 되든지, 아니면 우리가 그 다른 어느 것보다 더 자랑하는 것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어디에 서 있는지 명확해야 한다.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그는 모든 지식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련한 자가 되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다. 나는 지혜에 대해 안다. 그것은 감추인 지혜이다 그것은 신비요 하나님의 지혜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류의 삶을 사느냐를 결정할 뿐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점은 긴박하게 하나의 결단을 요구한다.

 

- 십자가의 도가 불신자에게는 거치는 것이라고 한다(고전1:23). 바울은 자기 동족들에게 핍박을 받고 학식있는 헬라 사람들에게 비웃음과 조롱을 받았다.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 십자가를 거리끼는 것이며, 기독교에서 마져 십자가를 조롱하는 일이 있다. 그들은 피를 언급하면 질색하며 “피의 신학”이라고 부른다. 구약의 번제와 희생제사들을 원시적인 종교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십자가는 어설픈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나 현대인들에게는 여전히 거침돌이다. 십자가를 가장 크게 꺼리는 사람들은 표면상으로 십자가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류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십자가를 감상주의적인 관점에서 보고 큰 정념을 가지고 십자가에 대해서 말한다. 십자가를 실상 그대로 알면 참으로 거치는 것임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가장 아름다운 것 일종의 심리적인 행동 등으로 추락시킨다.

 

- 십자가를 바르게 가르치고 있는지 그렇지 못한지를 알아보는 시금석은 십자가를 전했는데 그것이 자연인에게 아무런 거리낌이 되지 못했다면 십자가를 잘못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십자가에 대한 거부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거나 그것이 여러분에게 거리끼는 것임을 느끼지 못했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안 적이 없음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자연인이었던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왜 십자가는 자연인에게는 거치는 것인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과 본질은 같기 때문에 1세기나 20세기 사람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첫 번째, 그것은 현대인의 이지에 거리끼는 것이다. 이유는 그 전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선입견적 관념들과 상념들을 다 잘라버리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구세주가 권능과 능력을 소유한 큰 왕과 정복자로 오셔야 했다. 십자가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일을 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대하여 나름대로 상념을 가지고 있어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십자가는 바로 그러한 생각들을 도려낸다.

 

두 번째, 십자가는 대번에 우리가 관념들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고 선포한다. 생각이나 이해, 철학으로 구원받지 않는다. 가장 선한 사람들, 가장 위대한 사상가들이 우리를 구원하지도 않는다. 십자가는 그들이 믿는 것을 다 무산시켜 버린다.

 

세 번째, 사람들은 십자가에 대한 전체 개념이 부도덕하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하여 그 아들을 징벌하고 죽이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한다. 그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이고 그들의 정의와 도덕성의 의식과는 전혀 배치가 된다고 주장한다.

 

- 그들의 생각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겠다. 내가 이해하기 전에는 어느 것에도 내 자신을 맡기지 않겠다.” 사람은 스스로 모든 진리를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십자가는 신비이다. 대속이 신비요, 죽지 않을 자가 죽는 신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이다. 그들이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신적인 것이고 이적적인 것이며 초자연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미워한다.

 

- 모든 인간의 고통들은 교만에서 파생된다. 사람이 타락한 것도 교만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그 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것이 우리더러 교만에 영합하여 우리를 높이고 자신을 믿으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의 교만을 참으로 훼손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왔을 때 그를 미워하였을 뿐 아니라 그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해 오셨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말한 것처럼 선행을 하는데 시간을 보낸 것이다.

 

-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찿아 구원하려 함이로다”(눅19:10) 이 말씀은 그들을 격분케 하였다. 자기들이 구원받는 쪽에 있는 것을 반대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타락하여 구원이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잃어버린 자들이라는 암시를 싫어했던 것이다. 그들은 “내가 백퍼센트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소. 그러나 저 절망적인 사람과는 다르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고 또 종교적인 사람과 비종교적인 사람들이 있소. 모든 사람들이 같은 입장에 있다고 말해서는 안 되오. 당신은 모든 도덕적 원리마저 다 파괴시키고 있소. 당신은 방종과 방탕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오” 세상은 선을 행한다고 하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다. 그들은 조직을 구성하고 세상을 바로 잡으려고 애도 쓴다.

 

-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차이가 없다고 한다. 우리의 모든 의가 더러운 옷과 같고, 우리가 가장 좋게 여기는 것은 모두 분토와 배설물이요, 전적으로 쓸모가 없다. 우리 자신과 우리의 능력을 믿는 우리에게 당신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땅바닥에 메다꽂아 버린다.

여러분은 땅바닥 먼지와 재와 흙 가운데 절망적으로 누워 끝내 소망이 없는 존재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그리고 마음이 상한 적이 있는가? 이는 자기를 표현하고 자기를 믿으라는 현대의 이단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이다. 바울은 단순히 십자가에 탄복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또한 단순히 아름답고 기이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단순히 그것을 그저 믿고만 있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믿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이다. “결코 자랑 할 것이 없으니” 십자가를 떠벌리고 자랑하는 것이다.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그것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역사상 가장 의미심장한 일이었고 일어난 사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임을 의미한다. 이것이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 됨을 뜻한다. 그가 그 됨도 십자가 때문이다. 그것 없이는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찾는다. 바울이 여기서 자랑한다는 말이 그러한 뜻이다.

 

- 그는 그로 하여금 십자가를 자랑하도록 만드는 것을 그는 그 십자가에서 본 것이다. 죽지 않을 자가 죽다니요! 전 우주에서 그처럼 놀라운 광경을 어디에서 볼 수 있겠는가? 사랑과 슬픔이 함께 하고, 왕관과 가시가 함께 어우러져 있음을 본다. 죄 없으신 분이 징벌을 당하는 것을 본다. 전적으로 완전히 무죄한 자가 악하고 무가치하고 비열한 자를 위해서 죽어가고 있다. 이 끝없는 역설, 전혀 모순되어 보이는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가 되어 광채와 영광을 발하고 있다.

또 “말씀” 되신 영광의 주를 본다.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잡고 계시는 분” 원자핵들을 붙잡고 계시며 전 우주를 장악하고 계시는 분, 바로 그분이 기진하여 죽어가고 계심을 발견한다. 능력과 무능력이 동시에 함께 어우러져 있다. 아버지의 영광만 생각한 나머지 자기의 영원한 영광을 버리고 실로 종의 모양과 형체로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분을 본다.

 

- 그 분을 다시 볼 때, 무엇보다 더 놀라운 것은 사랑함으로 그 모든 일을 행하셨다는 점이다(롬5:6-10).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는 그 사랑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는 자기를 미워하는 자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이다(갈2:20). 신성 모독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인 다소 사람 바울을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셨다. 이것이 바로 그의 사랑의 분량이다. 이 모든 것의 희미한 그림자만이라도 보았다면 그것을 믿지만 말고 그리고 그것을 찬미하지만 말고 그것을 떠벌리며 자랑해야 한다.

 

-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여러분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그 사실을 진실로 믿는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으면 진실로 믿는다고 말할 수 없다. 여러분이 진실로 믿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안다면 그것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이 된다. 그것이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든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든지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당신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을 위하여 심어 왔고 심고 있으며, 결국 영생을 거둘 것이라는 말을 들을 만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