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로이드 존스

로이드 존스, 십자가와 구속(3) 제3 장 하나님의 지혜

새벽지기1 2016. 5. 1. 07:24


제 3 장 하나님의 지혜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그리스도인은 무엇이 일어나든지,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지, 원자폭탄이든지, 내게는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일에 필적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이제 우리는 멈추어 서서 다른 모든 것은 옆으로 제쳐 놓고 그 십자가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영광스런 십자가가 함축하고 있는 이 심오한 것들, 무한한 것들과 광대한 것들 중 얼마를 발견하기까지 십자가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

 

- 성경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는가?


첫 번째, 그 십자가 사건은 그저 단순한 사람들의 행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언된 일이었다. 이사야 53장, 시편 22편을 읽어 보라.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께서 당하실 죽음에 대한 완벽한 예언이다. 유월절 어린양과 모든 번제들과 희생제물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날이 올 것을 예언하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3장14절에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친히 죽으실 것을 예언하신 말씀이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의 첫 설교에서 “그 나사렛 예수, 예수 그리스도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그렇게 되도록 정하신 이는 하나님이셨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미리 정하셨던 것을 시간 세계 속에서 행하고 있었던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처음과 끝이시다.

 

- 아담 타락 이후에 태어난 우리는 비참한 죄인 아닌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우리 각자 모두에게 있어서 인생은 하나의 도덕적 난제요, 도덕적 실패요, 도덕적 난관이다. 인간은 문명을 발달시켜 일을 바르게 하려고 노력하여 왔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처럼 악하고 교육은 받았지만 더 도덕적이지 못하다. 아무것도 더 나아진 것이 없다. 어떻게 하면 정결하고 건전하고 순결하고 정조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그 법을 모르고 있다.

왜 바울이 그것을 그처럼 자랑하는지 아는가? 하나님께서 이 비참하고 곤고하고 실패로 가득 찬 죄악 세상을 위하여 세우신 계획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이다.

 

두 번째, 십자가는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는 성자만 계신 것만 아니고 성부도 거기에 계신다. 우리의 모든 고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내보이지 아니하시면 하나님을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고 있는가? 심리학이, 현대의 모든 지식이 여러분 자신을 알고 이웃을 알도록 진실로 도와주는가? 진정 그것이 생과 사에 대한 참된 이해를 주는가? 배우면 배울수록 우리의 무지가 더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자연을 통해, 은사를 통해, 유대인을 통해, 역사를 통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 밖에는 보지 못한다. 요한은 요한복음 1:18에서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다. 하나님이 가지신 존재의 속성 때문에 우리는 계시된 것 외에는 알 수 없다. 복음의 메시지는 하나님께서는 무한히 자비롭고 은혜로우사 창조를 통해서, 섭리와 역사를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을 뿐 아니라 그보다도 그의 아들로 말미암아 자신을 계시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 아들은 영원 전부터 아버지의 영원하신 품 속에 계시다가 아버지에 관하여 우리에게 가르치고 일러주시러 오셨다. 그 분은 십자가 위에서 그 점을 최고로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모든 것이 바로 이 십자가에 다 응축되어 있다(요14:6). 예수 그리스도, 특히 그의 십자가상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지 못한다. 하나님을 알고 싶고 영원하시고 영존하신 하나님을 알기 원한다면 여기 오직 한 길, 저 놀라운 십자가를 쳐다보고 응시하고 묵상하고 곰곰이 생각하라.

 

- 거기서 볼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복음은 우리 중 누구라도 우리 자신의 손으로 구원받지 못하며 오직 전적으로 영원한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받으며 바로 설 수 있다고 말한다(엡2:8). 사람들은 수세기에 걸쳐서 그것을 시험해 보았다. 만일 여러분이 하늘에 갈 만하다고 여긴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나 지옥밖에는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아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다. 여러분의 의를 다 떼어내 버리라.

 

- 두 번째는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와 타협할 수 없다.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이 서로 타협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진노는 모든 불의에 대하여 나타난다(롬1:8). 우리들은 순결과 절대 의와 절대 거룩을 생각할 수 없다. 죄를 그저 행동의 차원에서만 생각하지 말라. 죄는 태도의 문제이다. 죄를 죄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다.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요, 불의요,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이다. 더 악한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다.

 

-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시며 동시에 어떻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가? 바울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 네 번째는 하나님의 불변성이다. 하나님은 변하지도 변할 수도 없다는 뜻이다. 그는 언제나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신 그대로 존재하신다. 비록 그의 아들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바꾸지 않으신다.

 

- 다섯 번째는 “우리를 향한 사랑”이다(롬5:8). 용서한다는 수동적이고 타율적인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의 육체 속에 죄를 정하시고 십자가에 세우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사야 53장을 다시 읽어보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셨다”(고후5:21).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내어 주셨다”(롬8:32). 그는 친히 아들을 때렸다. 여러분과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아들에게 행하신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굴을 돌리신다. 우리가 징벌을 당하지 않고 지옥에 가지 않고 지옥에서 비참과 불행 속에서 영원히 보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 일을 하신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신 것은 십자가의 메시지가 전파되기 위함이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받으리라”(행16:31). 그분이 여러분의 죽음을 짊어지고 대신 죽으시고 여러분이 당할 형벌을 지시고 여러분 대신 고통을 받으셨음을 믿으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여러분이 평화를 얻었음을 믿으라. 여러분이 즉시 용서를 받으셨음을 믿으라. 왜냐하면 그는 아버지에 의해서 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 내 모든 의도 십자가를 생각할 때 다 헛되다. 내가 이러한 일을 알게 되는 것은 십자가를 곰곰이 생각할 때이다. 그 십자가 속에서 모든 신적 속성들의 조화를 보게 된다. 거룩과 사랑을 보며, 긍휼과 진리가 함께 만나며, 의와 평화가 서로 입맞추는 것을 본다. 그 속에서 의와 사랑과 자비와 긍휼 사이에는 전혀 모순이 없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라.”

 

- 자기의 선한 행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교회에 다닌다고도 말하지 말라. 여러분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있는가? 그 십자가가 여러분의 모든 것이 되는가? 그것이 여러분의 생명인가? 십자가를 자랑하지 않는 한 그 십자가를 알지도 못했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을 보지도 못한 것이다.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그것을 진실로 믿지 못한다. 만일 그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들 모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눈을 열으사 십자가의 영광을 보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