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프란시스 쉐퍼의 신학적 뿌리[3] - 성경관/신동식목사

새벽지기1 2016. 3. 12. 10:56

Ⅲ. 프란시스 쉐퍼 사상의 신학적 뿌리 이해

프란시스 쉐퍼의 신학적 뿌리는 이미 그의 생애를 통하여 살펴보았듯이 어렴풋이나마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좀더 깊이 있게 살펴 볼 것이다. 신학적 이해를 결정 할 수 있는 세 가지의 관점에서 살펴보려고 한다. 이것은 쉐퍼의 사상가운데 분명하게 들어 나기 때문이다.


1]성경관

쉐퍼가 가지고 있는 성경관은 매우 분명하다. 이것이 쉐퍼를 매우 분명하게 들어내는 동시에 쉐퍼를 근본주의자로 몰아붙이는 이유이기도 한다. 쉐퍼의 이러한 성경관은 구 프린스톤 신학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특별히 찰스 핫지. 벤자민 워필드 그리고 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그레샴 메이천의 영향속에 있었다.
성경관에 대한 이해는 사실상 미국 교회의 이해이기도 하다 그만큼 성경관으로 인하여 미국 장로교회의 분열이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좀더 자세하게 이 사실을 검증하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나 본 논문의 한계와 전문성을 위하여 역사적 맥락에서 나타난 성경에 대한 이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초기의 신대륙 땅을 밟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였던 뉴 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철저한 성경의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세우는 중요한 기초돌이기도 하다. 이러한 성경에 대한 첫 번째 도전은 독립전쟁 이후의 토마스페인,토마스 제퍼슨등에 의하여 성경의 권위를 비웃는 비평을 하였다. 이러한 비평의 흐름은 1810년 청교도의 본산지라 할 수 있는 뉴 잉글랜드 하바드에서 일어났다. 하바드는 "성경에 대한 비평적 지식"이라는 강좌를 개설하였다. 성경에 대한 비평은 금박시대라 일컬어지는 1865-1900년 사이에 한층 높아졌다. 이 물결의 파고는 찰스 다윈의 과학적 작업에서 뽑아낸 진화론적 생명 철학의 영향이 점증함과 때를 같이하였다. 1870년대 중반에는 프린스턴 대학의 학장이던 제임스 멕코쉬가 자연 도태의 원리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상황 가운데 뉴욕 유니온 신학교의 교수였던 찰스 브릭스 교수의 등장은 성경고등비평의 큰 흐름을 가져왔다. 그는 유니온 신학교 학장 취임 연설에서 성경 연구에 있어서 6개의 장벽이 있는데 1)미신 즉 성경숭배,2)문자영감,3)성경의 진정성,4)성경무오,5)이적,6)장래예언 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성경비평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비평의 소용돌이속에 전통적 프린스톤 신학을 추구하고 있는 A. A 핫지와 웨스트 민스터의 벤지만 B 워필드 그리고 메이첸이 변호하며 대응하기 시작하였다.
A. A 핫지와 워필드의 합작 논문인 "영감"에서 성경의 영감성을 분명하게 언급하였다. 이들은 성경의 외증을 통하여 성경의 권위를 비판하였던 비평가들과는 다르게 성경의 내증을 통하여 강조하였다. 핫지는 신학개요에서 이렇게 주장하였다.

"교회는 성경이 영감받은 기자들의 손에서 나온 당시의 본래의 친필 원본에 대해서만 절대적인 정확 무오성을 주장해 왔다"

이것은 프린스턴의 조직신학자인 찰스핫지의 분명한 사상이기도 한다. 그는 성경변호에 있어서 남에게 굴복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성경의 중요성이 성경이 무엇인가라는 점보다. 성경이 무슨일을 하는가라는 점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였다. 찰스핫지는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명백히 제시하고 있다는 점과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교회에 속한 참된 하나님의 백성을 모두.... 믿음이나 실천에 필요한 제반 사항에 있어 성경의 의미에 관한 견해를 같이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메이첸에 와서 더욱 분명하였다. 그의 책 {현대의 기독교 신앙}에서 그는 이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지지하는 견해는 성경 저자들이 그들의 전생애동안 섭리적인 질서속에서 그들의 과업을 준비했고 이후에, 이 모든 것에 덧붙여 축복되고 경이로우며 초자연적인 성령 하나님의 지도와 동력을 받아 다른 책들과는 달리 오류들로부터 보호되었으며 그러므로 그 결과로 생긴 책인 성경은 그 모든 부분에 있어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물에 관한 언급에 있어서 완전하고, 그 명령에 있어서 완전한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충만하거나 "완전한" 영감의 교리이다. 이 교리는 인기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지혜와 조화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이 교리를 진지하게{그리고 실제 그 교리에 따라 행동하므로}붙들면서, 그리고 동시에 이 세상 쾌락과 현대교회의 많은 교회론적 권위들을 향유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 교리는 모든 면에서 매우 축복된 것이므로, 만약 사람이 그 삶을 이 교리위에 두면 그가 이 세상을 살아가며 만나게 되는 모든 슬픔과 모든 전쟁속에서 매우 즐겁고 아주 침착한 삶을 살게 될 수 있다"

메이첸은 특별히 오번선언서가 출판되고 해외선교부의 문제가 들어나면서 메이천은 더욱 분명하게 성경의 권위에 대하여 논쟁을 하였다. 이러한 소용돌이 가운데 메이첸은 북장로교에서 탈퇴하여 웨스터 민스터 신학교 중심으로 바른 독립교단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소용돌이 가운데 쉐퍼의 학문하는 기간들은 모두 개혁주의 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이었고 본인 스스로가 장로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를 규정할 수 있는 말은 "그는 성경의 사람이었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사실은 그의 회심의 사건에서도 분명히 알 수 있고 그의 목회사역 그리고 그의 라브리사역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성경의 진리를 믿고 살았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당시대의 성경 유오설자들과 맞섰으며 성경무오설을 믿고 고백하는 이들과 함께 그 유명한 시카고 선언을 작성하였던 것이다. 쉐퍼는 온전한 성경관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한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복음주의가 될 수 없다고 말하였다. 특별히 그는 로잔대회의 연설에서 우리가 확고하고 강경한 성경관을 고수해야 하는 이유를 두 가지로 말하였다.

"첫째는 성경을 확고하게 고수 하는 것만이 성경이 스스로에 대해 가르치는바와 또 그리스도께서 성경에 대해 가르치신 바를 충실히 따르는 길이다. 그리고 둘째는 이제 앞으로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우리와 우리의 영적 자녀와 육적 자녀에게 말이다. 그런데 확고한 성경관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앞으로 닥칠 어려운 시대에 대해 준비를 하지 못할 것이다."

성경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없는 한 상대주의 세상에 기독교는 아무것도 줄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확고한 성경관만이 상대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세워진 영향력이 있는 문화의 압력을 버틸 수 있다. 그러므로 확고한 성경관을 위하여 하나가 되어 싸우자고 외쳤다. 쉐퍼는 기독교 신앙이란 하나님의 객관적인 계시인 성경에 근거해야 하며 이런 중생을 체험한 이후에야 일생을 통해 계속되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쉐퍼는 기독교인으로서 우리는 성경의 약속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행동하며, 하나님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세상을 위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며 열매를 맺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확고한 성경의 사람이었다. 이것은 개혁주의의 산물이요 구 프린스톤 신학의 열매이다. 프란시스 쉐퍼의 신학은 철저한 개혁주의 신학이다.